"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 22:21)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나그네)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레 25:23)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민족 역사와 신앙 형성에 근본 골격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출애굽은 하나님과는 물론 이웃과의 관계 형성에도 빼 놓을 수 없는 근본 바탕이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출애굽과 가나안 입국 사이에 있었던 시내산 언약에서 구체화되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변화를 주었던 역사적 전환점이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생활 거처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바뀐 점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출애굽의 보다 크고 중요한 의미는 이스라엘의 신분이 근본적으로 뒤바뀐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가장 취약한 사회 계층 중 하나인 이방 나그네 신분으로 살았다. 그런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소유하게 되면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당시는 땅 소유가 어떤 것보다 우선적 가치를 지닌 농경사회였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땅 소유는 하나님 백성으로의 신분 상승과 함께 따라와야 할 요소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여 안정적인 사회 구조를 이루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바른 정체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과, 그 정체성에 적합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앙적 당위성이 요구되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 유지와 거룩한 삶의 실천을 위하여, 잊지 말고 간직해야 할 신앙적 자세가 곧 나그네 의식이다.
이스라엘의 나그네 의식은 두 방향에서 검토될 수 있다. 하나는 출애굽이 있기 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겪었던 나그네로서의 고된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안정적인 삶을 이룬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자세로서의 나그네 의식이다.
첫째로,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겼었던 나그네로서의 고된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이 있기까지 430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나일강 하구의 비옥한 삼각주지역 고센 땅에 정착하여 풍요로운 삶을 누렸지만, 그들의 신분은 본토인과 구별되는 이방 나그네로서의 삶이었다. 출애굽 직전의 마지막 기간은 강제 노역으로 혹사당하는 노예 생활이었다.
언약법은 이스라엘이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그들의 애굽 경험을 제시하고 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 22:21)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지냈었던 그들은 누구보다도 나그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방 나그네를 사랑으로 잘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출 23:9; 신 10:19).
역사는 과거를 통하여 오늘을 바르게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 것에 그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이방 나그네를 잘 대우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신앙적 깨우침은, 과거 애굽에서의 역사 경험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삶의 지혜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었지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나그네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안정된 국가 체계를 이루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새로운 땅의 소유자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나그네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땅의 참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였지만, 그것은 주인이신 하나님께 빌린 것일 뿐이다.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구적인 소유권 이전으로서의 선물이 아니다. 땅의 소유권은 여전히 본래 주인이신 하나님 손에 남아 있다. 그것이 땅을 정식으로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그네 신분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이다.
나그네 신분으로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없다. 오늘의 본문의 문맥은 희년과 관련되어 있다. 희년 제도에 따르면, 매 50년마다 각자가 사들인 땅이라도 본래의 소유자에게 무조건 돌려 주어야 한다. 이것은 매 50년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분배해 주셨던 땅의 상태가 본래대로 회복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희년 제도는 땅의 참 소유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에 의해 흔들린 땅 분배의 원칙을 제조정하시겠다는 정당한 요구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나그네 의식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조정하는 중심축 역할을 한다. 그것은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신앙적 자세이며, 구원의 복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실제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이방 나그네를 압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과거 애굽에서의 경험을 잊지 않으려는 삶의 진지함이며, 가나안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나그네 의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는 삶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