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의 중요한 명령으로부터 시작된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머물고 있던 곳을 떠나 이방인으로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야 함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창세기 12장 2절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고 있다.
구약의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장차 아브라함이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정리해 볼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구약의 아브라함 사건은 다문화 목회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해서 다문화 목회와 선교를 이해하기에 필요한 두 가지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도 타지에서 이주민으로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23장 4절에서 사라의 매장지 막벨라 굴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헷족속에게 자신을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소개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소개한 ‘나그네’와 ‘거류하는 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르’와 ‘토샤브’이다. 이 두 단어는 타지에서 유입되어 기존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이방민족을 지칭하는 전문용어다. 즉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타지에서 지내게 된 첫 번째 이주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계약은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온 인류와의 계약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라는 말씀 중 ‘큰 민족’이란 단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큰 민족이라는 의미 속에는 바로 다문화와 다민족이라는 의미가 숨어져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답고 거룩한 비전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으로 망가진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구원의 은혜를 준비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의 대상은 바로 ‘큰 민족’인 이 땅에 모든 민족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아브라함 사건은 우리에게 온 인류가 이제 죄로부터 끊어졌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될 것이며 이의 대상은 모든 민족 즉 다문화, 다민족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이방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처소인 천국을 떠나 세상 속에서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방인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의 고통에 쉽게 동감할 수 있는 것 같다. 마태복음 25장 34절에서 한 임금이 등장한다. 그 임금은 의인이라는 사람들을 청하여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명령하게 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의인의 대답은 의외로 37절에서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질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론과 같은 대답으로 임금은 40절에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지극히 작은 자들과 같이 아픔과 외로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 모습을 외면할 수도 있고 관심 없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작은 실천이 복음의 열매로 맺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