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 그리스도 이야기
루 월리스 | 시공사 | 784쪽 | 22,000원

이 책, 첫인상이 '무서운 얼굴의 장인어른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긴장감이 드는 두꺼운 분량을 자랑했다. 여기에 두꺼운 표지의 양장이다. 띠지의 '교황의 축성을 받은 미국 대중소설의 금자탑, 50년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기념비적 작품, 최고의 번역가 김석희의 국내 최초 번역'이라는 카피는, 마치 "우리 집안은 대대로 왕조 출신에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고, 나는 의사이고, 내 딸은 외동딸로서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이다!" 하고 엄포를 놓은 듯하여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내가 과연 이 여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처럼,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게 했다. 하지만 표지에 있는 전차 경주 이미지는 '살짝 내비친 장인어른의 미소'처럼 친근감을 줬다. 영화 '벤허'의 명장면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 책은 소설이다. 즉,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분량은 두껍지만, 이야기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읽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신약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상을 궁금해하는 독자라면 아주 쉽게 몰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한다면, 띠지의 '카피'에서 밝힌 대로 우리나라 최고의 번역가인 김석희의 번역에 있다. 마치 한국 사람이 쓴 소설 같다. 가령 "눈꺼풀을 가볍게 움직이고 콧방울을 실룩거리고 무관심을 가장하여 께느른한 태도로 지껄이는 등 풍자를 살리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지만(121쪽)..."을 읽을 때는, 이 책이 한국 소설인지 외국 소설인지 혼동이 가서 다시 앞표지를 보고 확인하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곧잘 인용되고, 로마 시대의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여, 번역자를 신경쓰지 않고 읽기 시작했더라도 '「로마인 이야기」를 번역한 사람(김석희)이 번역했겠다'고 추측하게 한다.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제목 '벤허'는 주인공의 가문 이름이다. 성경 열왕기상 4장 8절에 나오는 명칭이기도 하다(성경에서는 영어 이름 'Ben-Hur'를 '벤훌'로 번역하고 있다). 벤허를 가족끼리는 '유다'라고 부른다(예수님을 배반한 제자 '가룟 유다'가 아니다).

큰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주인공 유다와 오랜 친구이지만 적이 되어 버린 '메살라'의 적대적 관계를 다룬다. 고전 소설답게 선악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는 점에서 '단순하다'는 비평도 나올 수 있겠지만, 이야기에 빠지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또 귀족 가문의 주인공 유다가 실수로 총독을 다치게 하여 노예가 되고 검투사가 되어 '메살라'와 전차 경주를 벌이는 장면에서는 영화 '글래디에이터'가 떠오른다(당연히 1880년 출간된 '벤허'가 먼저다).

여기에 예수님의 삶이 등장하면서, 이 책은 두껍지만 어렵지 않게 책장을 넘기게 한다. 분량이 784쪽이나 되지만, 가격이 22,000원에 불과할 정도로 저렴하다.

1959년판 영화 ‘벤허’ 스틸컷. 올해 리메이크작이 찾아올 예정이다.
1959년판 영화 ‘벤허’ 스틸컷. 올해 리메이크작이 찾아올 예정이다.

이처럼 좋은 번역가와 분량 대비 저렴한 가격, 신약시대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는 등의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사건들이 너무 영화적이다. 귀족 가문인 유다가 기왓장을 떨어뜨려 총독이 다치게 되어 노예가 되는 사건도, 갑자기 큰 재물을 얻게 되고 상대인 메살라와 싸움이 시작되는 장면도, 예수님을 만나서 따라다니게 되고 잃어버린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다시 만나는 과정까지, 모두 자연스럽지 못하고 급작스러우며 극적으로 이뤄진다.

부제가 '그리스도 이야기'였지만, 예수님 이야기는 초반과 끝에 나올 뿐이지 중심은 아니다. 그냥 '유다의 복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유다'가 '가룟 유다'가 아니었음을 알게 됐을 때 아쉬웠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읽힌다'는 점에선 부인할 수 없는 소설로서의 재미가 있다. 뻔한 선악 구도의 할리우드 영화가 인기 있는 이유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심적이진 않지만, 예수님의 삶을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은 신선하면서도 새롭기까지 하다.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책은 첫인상이 딱딱하고 권위 있으며 무섭게 생긴 장인어른 같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허술한 부분도 발견하고 인간적인 정도 느끼게 되어 편한 마음으로 흥겨운 시간을 갖게 되는 듯하다. 그래서 만남을 파하고 나면 서로 포옹하며 "장인어른의 외동딸을 귀하게 여기며 마음고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래, 부족한 내 딸을 잘 부탁하네!" 하는 인사가 오가게 하는 책이다.

겁먹지 말자. 이 책은 무섭게 생겼지만 속정이 깊으신 장인어른과 같다. 그러니 펼쳐 읽어 보자.

/이성구 부장(출판사 순전한나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