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한국에 나와 선교하던 선교사들은 한국에 하나의 개신교회 설립을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이 일은 여러 이유로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이 일이 성사됐으나 한국에서 실패한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비록 교파나 파송한 교회는 달라도 협력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노력을 경주했다. 이런 노력은 구체적 결과를 가져왔다. 장로교회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부터 한국에서 선교하는 선교부 간의 협력과 일치를 추구해 나갈 생각을 가졌다. 특히 같은 신조를 고백하고, 정치체제를 갖는 장로회 선교부 간의 협력문제를 심도 있게 구상했다. 그러던 중 미국 북장로교회 다음으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내한했다. 1889년 데이비스(J. Henry Davies)가 그의 누이동생과 함께 내한했을 때, 언더우드는 우선 이들과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할 생각을 했다. 그는 ‘미국과 빅토리아 교회 연합선교회’(The United Council of Missions of the American and Victorian Churches)를 형성하자고 제안했고, 데이비드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연합 선교회 의장은 북장로교회의 선교사 헤론(J.W.Heron, M.D.)이 맡았고, 빅토리아 장로교회 데이비스가 서기, 그리고 언더우드, 알렌, 기포드(E.Gifford)가 창립 멤버가 됐다. 그러나 이 협의회는 데이비스가 한국에 온 지 1년 만인 1890년 천연두에 걸려 부산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활동이 중단되고 말았다.
1892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장로교 협의회가 다시 태동됐다. 여기서 잠시 미국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 그리고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본디 미국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는 하나였다. 그러나 노예제도 문제로 남과 북이 대립하면서 1861년 남북전쟁(The Civil War)이 발발했다. 이 전쟁을 전후에서 북쪽 장로교회는 북장로교회, 남쪽 장로교회는 남장로교회, 북쪽 감리교회는 북감리교회, 남쪽 감리교회는 남감리교회가 됐다. 한국에는 남, 북 장로교회와 남, 북 감리교회가 동시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각각 선교했다.
1893년 1월 서울에서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는 ‘장로회 정치를 갖는 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했다. 한국에 나와 사역하던 장로교 선교사 전원이 이 협의회에 참여했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 후에 한국에서 개혁교회의 신앙과 장로교회의 정치 형태를 갖는 하나의 교회를 만드는 데 있었다. 1893년 1월 개최한 공의회 제1차 회의에서 남장로교회는 아직 선교부가 들어가지 않은 충청, 전라 양도를 선교 구역으로 정했다. 이런 현지 결정에 따라 1893년 3월 미 본국 남, 북 장로교 선교부 대표들이 뉴욕에서 모였다. 두 선교부는 한국 선교 사역에 긴밀히 협조키로 하고, 한국에 단일 장로교회 설립을 두 장로회 총회가 승인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초창기에는 이 공의회가 소속 선교회에 행정적 치리권을 갖는 것은 아니고 권고만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에 치리 할 수 있는 기구가 아직 없었던 때라 1907년 독(립)노회가 창립될 때까지 행정을 관장하는 상회 구실을 했다.
이 협의회는 한국 선교를 수행에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인 선교지 분할문제를 협의했다. 1893년 1월에 모인 제1차 회의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후에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회와 호주 장로교회 선교회가 이 협의회에 가담함으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네 장로회가 이 공의회를 통하여 연합하게 됐다. 호주 장로교회는 본래 북장로교회가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부산 지역에 선교 거점을 동시에 갖고 있었는데, 이 협의회를 통해 그 지역을 분할키로 했다. 부산 지역에 두 개 선교 지역을 공동 선교구로 합의했다. 경상도 남부는 호주 선교부에 이양하고, 낙동강 이북은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기로 했다.
1905년 5월, 한국에서 선교하던 네 개 장로교회(미국 남·북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와 두 개 감리교회(미국 남·북 감리회)가 연합하여 ‘개신교복음주의선교협의회’를 구성했다. 이 협의회 목적은 “선교 사업에 협력하고, 궁극적으로 한국에 복음주의에 입각한 하나의 토착교회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이 협의회에 모든 복음주의 선교회가 회원으로 참가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 협의회는 먼저 선교부 간에 선교지 분할의 문제를 다루고, 선교지 교회와의 관계문제, 연합 사업으로 찬송가, 그리고 선교사 잡지 「코리아 미션 필드」 (The Korea Mission Field)의 발간, 그리고 주일학교 공과, 기도 달력 발행 등을 협의했다. 기도 달력에는 교파 이름을 모두 제거하고 단순히 ‘예수교회’(Jesus Church)라 쓰기로 했다. 또한 서울과 평양에 있는 각 교파가 경영하던 학교들도 모두 통합하여 연합학교로 운영키로 결의했다. 이 계획에 따라 북감리회와 북장로교회가 경영하던 두 도시의 학교들이 통합됐다. 평양에 있던 두 곳(북감, 북장)의 소년학교와, 서울에 있던 세 곳(북감, 남감, 북장) 학교가 모두 통폐합됐다. 평양에 있던 두 곳 소녀학교도 얼마 후에 통합됐다.
이 협의회는 신문의 연합 발행도 실천에 옮겼다. 또한 1902년에 잡지를 연합하여 발간하기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어 1905년에 이르러 「크리스챤 뉴스」(The Christian News)가 감리교회의 신문과 병합됐다. 그때부터 장로교와 감리교신학교의 학술적인 잡지 외에 한국 내의 모든 잡지는 연합으로 발간됐다.
이 협의회가 수행한 일 가운데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선교지 분할문제였다. 1908년에 이 문제에 대해 한 번 협의가 이루어졌고, 다음에 1909년에 이르러 여러 선교부가 이 문제에 대한 결의안에 서명했다. 전국을 여섯 선교회(북장, 남장, 호주장, 캐나다장, 북감, 그리고 남감)가 각각 일정 지역을 분할하여 선교한다는 내용이다. 소 종파들도 이 계획에 참여하여 같이 협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선교 영역에 제한을 두고 싶지 않다고 거절하였으므로 그들까지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들 대교회들의 지역 분할은 오늘까지 그 근본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지속되어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