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성경에 등장하는 사도 베드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며 적극적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통해 그 이름이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뀌는 영예도 얻었다.
예수께서 다가올 십자가 고난에 대해 예언하셨을 때, 그는 옥에 갇혀도 죽음이 임해도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하였다. 하지만 그는 예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혀서 심문을 받으시던 날,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그가 아직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은 하였지만, 아직 그 안에 성령의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지만, 그 진리가 나의 신앙이 되고 믿음이 되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성령의 역할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목격하였지만, 그저 고향에서 고기나 잡으면서 살고자 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고 부활하신 것도 믿지만, 그것이 진정 내 것이 되어 내 삶에 역동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 성령이 내게 임하셔서 내 안에서 역사하실 때, 그 고백이 비로소 능력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믿음으로 거듭났으나 여전히 능력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그에 반해 매순간 능력 있게 살아가는 신자들도 있는데, 그 차이는 바로 성령 충만에 있다. 성령이 충만해야 비로소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신약 시대 에베소에는 아볼로라는 유대인 신학자가 있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학문이 깊고 성경에 능통하였다. 그는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열심히 가르쳤다.
하지만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는 물세례만 알고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가르치기는 잘했지만 성령의 능력이 없었다. 그가 요한의 물세례만 배우고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아볼로는 율법파라고 할 수 있다. 아볼로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중심으로 성경을 알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는 했지만 성령의 역사와 은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는 공의의 하나님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는 세례 요한의 외침은 알았지만, 예수님의 보혜사이신 성령의 충만함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아볼로와 같은 율법파들은 구약에 나타난 공의의 하나님만 알아서 자신들을 속박하고 제한하며, 뜨거운 열심을 내지 못한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성령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들은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아직 '교인'에 머물고 있을 뿐, 그리스도의 '제자'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은 성령 충만함에 달려 있다. 성령이 내 안에 충만히 거하시지 않으면 내가 주인이 되어 나를 움직이게 된다. 똑같이 예수를 믿어도 사람마다 신앙생활에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이 성령 충만함의 차이 때문이다. 이것은 인격의 차이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계신 성령이 얼마나 나를 지배하며 사시느냐의 차이다.
우리는 복음서의 베드로와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너무나 다른 것을 보게 된다. 복음서의 베드로는 실패자이지만,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성공자이다. 복음서의 베드로는 자신이 생각하고 말한 대로 실천하지 못하지만,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복음서의 베드로는 소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만,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 베드로는 관원들이 예수를 전하면 잡아 죽이겠다고 해도 끝까지 복음을 전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베드로가 이렇게 실패를 딛고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성령의 충만함에 있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120 문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했더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다. 어떤 이들은 방언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를 나눴다. 찬송을 하며 구제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신자들의 믿음생활이 힘든 것은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 또한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길은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추구했던 그 옛날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 열심히 주를 섬기며 이웃을 위해 구제하고 선교하는 회복의 역사가 한국교회에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채천석 목사(크리스찬북뉴스 대표, 필리핀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