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금관) 가야의 기독교 국가설
가야는 문헌에 따라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구야(狗邪·拘邪)·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기록돼 있다. 김수로왕은 지금의 김해 지역에 나라(금관 가야, 金官伽耶)를 세워 가야국의 시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 김 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은 먼 아유타국(阿踰陀國) 출신인 것으로 유명하다.
가야 연맹 기독교 전래 가능성에 대한 주장은, 주로 김해 가야를 기독교 국가로 이해한 조국현 목사의 <가락국기해설>(대구말씀교회)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구지가)라고 하면서 춤을 추라는 하늘의 음성으로 시작되었다는, 수로왕과 다섯 가야 임금들의 탄생과 여섯 가야의 건국 설화를, 조국현 목사는 '구하소서, 구하소서 머리 되신 주님이 나타나시옵소서 만일에 나타나시지 않으시면 구이거나(불로 심판받음) 먹히옵니다(외세의 침략으로)'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를 시작으로 가락국기의 모든 내용들을 기독교와 관련지어 해석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단히 정교하다. 가락국기 전체 구조를 "가야는 정말 기독교 국가였다"고 만들어버린다. 가야국명은 "간나라"가 되어 "큰나라" "신의 나라"로 해석된다. 수로왕과 아유타국 공주의 결혼은 신의 뜻이었고, 아유타국은 도마가 선교한 인도의 국가로 해석된다. 수로왕은 허황옥을 맞기 전부터 기독교와 관계된 사람으로 모태신앙인이었고, 김수로왕릉 정문에 있는 신어문(神魚紋) 즉 쌍어문(雙魚紋)도 기독교 문양이요, "가락"이라는 이름조차 허 황후 모국인 고대 인도의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라는 의미로 읽힌다. "파사 석탑"이나 금관가야 제8대왕 질지왕이 주후 452년 건립했다는 "왕후사"도 불교적 유물이 아니라 기독교적 유물이라는 것이다.
가락국기(駕洛國記)는 본래 고려 제11대 임금인 문종조(文宗朝) 1075-1084년에 편찬된 가야의 역사책으로, 저자는 금관주(金官州: 김해 지방)의 지사(知事, 지금의 지방장관)였던 문인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책은 전해지지 않고 있고 <삼국사기>에도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 일부가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요약되어 남아 있다. 그리 길지 않은 "가락국기" 안에는 개벽한 이래 아직 나라의 이름도 군신의 호칭도 없고 그저 간(干)으로 불린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력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명의 추장 아래 백성들이 모두 10,000호에 75,000명이었다는 진술로 시작되어, 신라 유리왕 즉위 19년(주후 42년) 있었던, 일명 구지가로 알려진 위에서도 소개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어라는 하늘의 음성으로 시작되었다는 수로왕과 다섯 가야 임금들의 탄생 설화와 여섯 가야의 건국, 가락국 수도와 궁궐 건립, 수로왕과 신라 탈해왕(脫解尼師今)의 다툼 이야기, 아유타국 공주 출신 허황옥(許黃玉)과의 혼인과 아유타국에서 함께 온 사람들과 혼수품, 계림(雞林, 신라) 등의 직제를 모방하여 촌스러운 관제의 정비, 수로왕릉과 사당(祠堂)에 얽힌 설화, 신라에 합병된 이후부터 고려 시대까지 김해 지방의 연혁, 수로왕묘(廟)에 할당된 토지 결수, 왕후사(王后寺) 창건 관련 내용, 2대 거등왕(居登王)부터 마지막 구형왕(仇衡王)까지의 왕력(王歷), 신라에 투항한 연대에 대한 고증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가락국과 관련된 이 같은 내용을 과연 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을까? 어떤 문제가 있을까?
가야 기독교설의 난제
첫째는 그 내용이 대부분 설화적이고 후대에 조작된 흔적이 많아, 모든 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점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삼국과 달리 가락국은 건국부터 멸망 때까지 왕위 계승이 부자 상속이었다. 이것은 당시 다른 삼국의 현실과 비교해 볼 때 그대로 믿기 어려운 기록이다. 특히 가야가 멸망한 다음부터 김 씨(金氏)를 왕실의 성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수로왕 후손이라 자처하는 김해 김 씨의 족보를 주로 참조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삼국 왕들의 평균 재위 연수가 신라 약 18년, 고구려 약 25년, 백제 약 22년 인 데 비해 김해가라는 수로왕 즉위년인 주후 42년부터 제10대 왕 구형왕 562년까지 평균 52.1년이나 된다. 그런데 전기 5왕의 재위 기간이 총 365년, 평균 73년인 데 비해 후기 5왕은 총 155년, 평균 31년이다. <가라비문>에 보면 전기 5왕 당시 국구, 즉 왕비의 혈족들은 김해가라 특유의 관명인 반면, 후기 5왕 시절 국구의 관명은 신라의 것으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하나는 가야에서 신라 박 씨 족의 갈문왕제가 아닌, 거란족의 국구장제를 따르는 스키타이 계열(즉 흉노 계열)이 지도층을 형성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금관, 동복, 철복의 발굴 등도 흉노적 성격이 강하다), 또 한 가지는 김해가라의 권력구조에 전·후기 사이 무슨 이유인지 분명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김해가야의 전·후기 역사 단절 기간은 상당히 길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기 5왕들의 재위 기간을 어떤 식으로든 연장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그때 수로왕의 재위 기간도 157년으로 대폭 늘어났다. 후기 김해가야는 자신들의 전기 역사 멸망의 단절기를 숨기고자 전기 5왕들의 재위 기간을 늘이는 동시에 시조 신화를 후기 가야 시대에 맞추어 당연히 각색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해가야 전·후기 공백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마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영토 확장 시기, 가야 권력층에 큰 변고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것은 후기 가야의 친백제적 성격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즉 근초고왕의 영토 확장 이후 가야 지역은 친백제의 담로 지역으로 편입되었음을 보여 준다 할 수 있다.
둘째, 만일 허황후가 정말 인도 출신이라면 신하들의 이름도 당연히 인도식이어야 옳다. 그런데 가락국기에 보이는 '허황후가 데리고 온 신하들'인 신보(申輔)·조광(趙匡) 등은, 고려시대 이후에 한반도에 처음 등장한 성씨들이다. 이 같은 문헌사적 기록들은 허황후의 본가가 과연 인도인지 아니면 중국인지 학자들 간에 최근까지도 여전히 치열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셋째, 김해가라는 주후 42년에 개국했다. 공식적 세계 최초 기독교 국가는 아라랏산 근처에 있던 아르메니아였다. 12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 다대오가 선교한 나라였던 아르메니아가 로마보다도 먼저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은 주후 301년경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틴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 지방의 낙동강 유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아르메니아보다도 260년 먼저인 주후 42년 이미 김수로왕이 기독교인이 되어, 사도 도마의 선교에 의해 복음화된 인도 아유타 왕국의 공주를 배필로 맞았다는 주장은 전혀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적 비약이다.
넷째, 가야 유적의 문제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보면 과거 수로왕릉 묘역 안에 사당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조선 시대 초기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세종실록》 20년 10월 기묘조에 당시 경상도관찰사 이선(李宣)은 "김해에 이르러 읍성 서쪽 길옆을 살펴보았는데, 가락 시조의 능침이 논에 잠겨 있어서, 혹은 길을 열어 밟고 다니고 혹은 소나 말을 놓아 기르기도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세종대왕에게 보고하고 있다. 즉 쌍어문을 기독교 유물로 보는 것은 전혀 타당한 해석법이 아니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적 색채가 강한 가락국기
가락국기가 기록된 삼국유사는 승려인 일연이 저술한 것으로, 기독교적 근거보다는 오히려 불교적 각색의 증거가 나타난다. 또한 가야 연맹체에 신라의 영향보다 오히려 중기에 백제의 담로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백제의 영향을 받은 후기 가야의 불교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허황후의 영향과 백제 담로의 영향을 받은 가야는 기독교가 아닌 불교적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가야의 기독교적 성격이 사실이라면
만일 가야의 기독교적 성격이 사실이라면, 불교적 각색이 훗날 이루어진 것이라 평가하더라도 그 이전에 존재하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핍박과 편린(片鱗)이라도 나와야 정상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석가처럼 서방의 어떤 '나무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한 한 인물'을 신봉하는 종교가 한때 가야 지방에 있었다는 등의, 전형적이고 강력한 기독교적 특징을 보여 주는 기록이나 구전(口傳)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 구체적인 증거 문헌이나 전승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최근 들어 나타난 고대 가야 기독교 국가설에 대한 일련의 주장들은 그런 공백을 메우기 위한 안쓰러운 해석적 시도라 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한반도 (경북 영주) 사도 도마상' 진위 논쟁처럼, 가락국기에 나타난 기독교적 증거 논쟁도 설령 이들 증거들이 일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런 유물만 가지고서 검증되는 종교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와 예배의 종교이다. 이런 구체적 흔적이 없다. 따라서 가야 기독교설에 나타난 증거라는 것이 설령 어느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양보하더라도, 그것은 정통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신앙 집단이라기보다는 이미 변질될 대로 변질된 일그러진 기독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되겠다. 제도권 사학계는 가야의 기독교적 성격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앞으로 신중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명확한 다양한 증거들이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