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구 목사
(Photo : 기독일보) 빌립보교회 곽영구 목사

이민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 10명중 8-9명은 이민 사회를 참 힘들다고 말합니다. 굳이 이민 사회가 아니어도 점점 사람들은 살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누리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면서도 말입니다. 더 빨라지고, 더 편해지고, 더 다양해졌음에도 사람들은 살기가 점점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와 같은 힘겨운 상황을 광야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삶 가운데 지나가게 되는 광야는 사람에게 두 가지를 안겨 줍니다. 하나는 강함이고 다른 하나는 독함입니다. 성경은 광야를 통해 사람이 단련되고, 훈련되어 진다고 교훈합니다. 하지만 자연인인 사람은 광야의 삶을 이유 없는 고난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삐뚤게 먹기도 합니다. 40년 광야생활을 했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으로 설명됩니다. 광야 생활을 하고 야전사령관과 같은 지도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내적으로 강하고 외적으로 유한 성품의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광야는 모세의 온유함을 더욱 빛나도록 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더욱 독해졌습니다. 마치 광야의 가시와 같습니다. 말에도 가시가 있고, 행동에도 가시가 있습니다. 서로를 찌르기 위해 자신의 가시를 더욱 날카롭게 만듭니다.

성경은 사울과 다윗의 차이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울과 다윗은 왕좌로서 삶의 시작이 동일했습니다. 둘 다 겸손했고, 리더십 감각이 있었습니다. 전장에서는 전술이 탁월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에게는 광야가 없었고, 다윗에게는 광야가 있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무너졌고, 다윗은 세움을 받습니다. 사울에게도 자기만의 광야가 있었지만 다윗에 비하면 미약한 과정이었지만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독한 사람이 됩니다. 광야의 연단은 사람을 강하게 하든, 독하게 합니다. 광야가 없어도 삶 가운데 그만한 대가를 치르지만 광야를 통해 독해진 사람도 역시 그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고생의 길인 광야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이와 같은 차이점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 같이 고생스럽게 살면서 누구는 온유해지고, 누구는 독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광야의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상위 1%의 사람들에게도 역시 나름의 광야가 있습니다.

광야는 우리에게 욕망이 아닌 필요에 의해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욕망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늘 불만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늘 남 탓하게 되고, 원망하게 되니 감사가 없고, 만족이 없으니 행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필요에 의해 사는 사람은 광야에서 무엇을 만나도 감사합니다. 물 한 모금,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이어도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8).

광야는 욕망의 사람과 필요에 의해 사는 사람을 구분해 줍니다. 욕망의 사람은 허망한 것을 쫓기에 현실적인 것에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필리핀의 이멜다가 구두 3000켤레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필요를 따라 사는 사람은 현실적인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작은 것에 만족하기에 작은 것에서부터 삶의 집중도가 높습니다. 맡은 일에 책임감이 있고, 성실하게 삶의 몫을 감당합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성취감이 있으니 보다 진취적인 사람이 됩니다. 욕망을 따르지 않으니 필요에 의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부족을 깨달아 더불어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광야는 모두의 길이지만 필요를 쫓는 사람에게는 온유함의 길이 되고 욕망을 쫓아 걷는 사람에게는 가시를 만드는 길이 됩니다. 광야와 같은 이민생활 속에서 우리도 보다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스스로가 궁금합니다. 독한 사람, 강한 사람, 우리는 어느쪽의 사람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