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김인수 목사
미주장신대 전 총장

외국 목사나 교인들로부터 흔히 받는 질문이 하나 있다. 왜 한국 교회는 그렇게 빠르게 성장했느냐는 질문이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늦게 시작된 한국 선교는 괄목한만한 성과를 냈다. 따라서 한국 초기 교회 성장에 대해 선교사 파송 교회가 “근대 선교의 또 다른 기적”이라 말한다.

중국은 1807년 영국 회중교회 목사 로버트 모리슨(R. Morrison)이 선교를 시작했다. 그가 선교를 시작한지 27년만인 1834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까지 불과 10명에게 세례를 주었을 따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중국에는 단 세 명의 신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태국은 1831년 미국 회중교회가 18년 동안이나 선교했으나 아무 실적 없이 철수했다. 미국 장로교회가 1840년부터 선교를 시작하였으나 역시 18년 동안 단 한 사람에게도 세례를 주지 못했다. 이듬해인 1858년에, 그러니까 회중교회 선교로부터 실로 27년 만에 나이 츄네(Nai Chune)라는 기독교학교 교사가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로부터 2년 후에 한 사람이 더 세례를 받음으로 태국 선교 30년에 단 두 명이 세례를 받은 기막힌 역사를 기록했다.

한편, 몽골은 1817년 런던 선교회가 보낸 슈미트(T. Schumidt)가 10년 선교에 단 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같은 해 선교를 시작한 스톨리브라스(E. Stallybrass)와 스완(W. Swan)이 25년간 선교했으나 아무 실적이 없어 1841년에 떠났다. 1870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온 길머(J. Gilmur)가 22년간 선교했으나 역시 헛일만 하고 떠났다. 결국 이들이 선교한 47년 동안 단 한 사람의 결신자도 얻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선교 역사를 남겼다.

그런데 같은 아시아에서 어떻게 한국 교회는 선교 30년이 채 못 돼 장로회 총회가 창립되고 총회가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을까? 이런 경이적 선교 결실을 얻을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어느 나라에서는 수십 년을 선교해도 얻지 못하는 세례교인을, 선교사가 전도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에게 예배당이 없어 냇가로 가서 세례를 베풀 정도로 한국 선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우리는 초기 한국 선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원인을 찾았으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 분석을 한다.

첫째, 무엇보다 기독교가 한국에 선교될 무렵, 한국에는 강력한 국교(國敎)가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에 “미신 외에는 종교가 없다”라는 외국인들과 선교사들의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종교가 없었던 게 아니고 무교, 불교, 유교 등의 잡다한 종교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민족종교로 정착되지 못했다. 시대에 따라, 정권에 따라 종교가 뒤바뀌는 과정에서 어느 하나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인도, 중국, 태국, 몽골 등 아시아 여러 나라 선교가 그토록 어려웠던 것은 수천 년 내려오는 민족종교가 굳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강력한 민족 종교가 없었으므로 타 종교가 들어와도 특별히 저항하는 세력이 없었다. 또한 한국인들은 여러 종교를 복합적으로 믿을 수 있는 심성이 형성되어 있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저항이 별로 없었다. 가톨릭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크게 박해를 받은 이유는 종교 자체보다도, 권력 세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희생양이 된 측면이 강했다. 한국에 강력한 민족 종교가 없었기에 한국 선교가 용이 했다는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 복음화를 가속화 하시기 위한 뜻이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둘째, 기독교가 들어왔을 당시 한국은 국내, 외적으로 무척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국가적으로는 조선조 500년 역사가 쇠락의 길로 내닫고 있었다. 한발과 기근 등 자연재해가 연속되면서 흉년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갔다. 고달픈 삶에 지친 하층민들이 유민(流民)과 낭인(浪人)이 되어 각지로 떠돌며 도둑질과 약탈을 서슴지 않은 상황이 전개됐다. 국외적으로는 여러 제국주의가 세계 각지에 새로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때였다. 이들 국가들이 한국이라는 약소국에 군침을 흘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침략의 구실을 찾던 때였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외국 간 전쟁이었다. 그러나 한국이 전쟁터가 되어, 우리 땅과 민족이 회복하기 어려운 참화를 겪어야만 했다. 이 모든 고통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힘 싸움에 희생양이 된 때문이다.

이렇게 어려운 때 한국은 새로운 힘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러·일전쟁 후 한국인들이 교회로 몰려간 이유에 대해 한 선교사는 다음과 묘사했다. “[러·일전쟁을 겪은] 마음의 불안정 때문에 한국인들은 여기저기 무엇을 찾아 지지와 보호를 받고 싶어 한다. 이것이 물론 복음이 채워주려 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주더라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으며, 복음에 대해서 듣고, 묻고 싶어 한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강한 것에 의지하는 사대(事大) 성향이 강해 그 동안 중국에 기대고 살아왔다. 그러나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을 이기고, 1905년에는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까지 이기는 것을 보았다. 한국은 일본이 이렇게 강대국이 된 것은 서양 기술과 산업을 받아들여 근대화된 연유라는 점을 간파했다. 따라서 선진된 문화와 힘을 가진 선교사들을 통해 이것을 받아들이려는 의도 속에 신앙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한 일본인이 “조선인들은 사대주의 사상을 갖고 있어 구미인(歐美人)이라면 무엇이든지 훌륭하게 생각한다”고 한 말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상황에 따라 강자 편에 서고 거기서 이익을 얻으려는 사실 모두를 부인할 수만은 없다. 일반인들 중에는 선교사의 그늘에서 고생이나, 관리들의 괴롭힘도 면하고, 재판의 불공정도 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사람은 아무 문제없고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특별히 외부의 힘을 의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이나, 가정, 국가도 어려움에 봉착하면 도울 힘을 찾는 법이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 성장의 요인 중 이 신앙의 전래 시기가 극히 어려운 때였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는 요인 중 하나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