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꿈을 꾸며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 그리고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색깔들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려고 한다. 그것은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남을 도우려고 하는 마음', '자기도 바쁘면서 순서를 양보하는 마음', '어떠한 어려움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마음', '누군가의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 주려는 마음', '자기의 몸을 태워 빛을 밝히는 촛불과도 같이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등이다. 삶의 모양이 각각 다른 색깔 이지만 누구나 꿈은 삶을 신명나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삶의 토대 위에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주고,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작지만 희망의 불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각자가 바라는 꿈은 삶의 현장 속에서 두개의 얼굴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 꿈이 꿈꾸는 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느껴 절망의 삶을 사는 것이다. 꿈의 두 얼굴이 현실의 결과물로 어떻게 주어지든 꿈을 꾸는 사람들은 그 결실을 위해 피나는 노력과 수고를 해야 한다. 꿈이 현실에 실현 가능하게 하도록 적극적인 삶과 긍정적인 사고를 하도록 심리학에서는 가르친다. 그런데 목적하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무리 적극적(Active)으로 노력한다 해도 실력이 부족하면 바라는 소망은 허상이 되어 버린다. 지난 브라질 월드컵에 대한민국의 축구팀이 벨기에 팀과 경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벨기에 선수는 10명이 뛰었고 대한민국의 선수들은 11명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 모두가 벨기에 팀의 선수가 1명이 부족하기에 경기를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
우리 축구선수들이 실력이 부족함에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바람이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월드컵 경기를 통해 보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1명이 많은 선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경기에서 패배를 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축구가 16강의 기적을 이루려고 하는데 있어서 축구의 실력이 너무나 차이가 남을 확연하게 드러냈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땀을 흘려 선수들이 뛰었다 할지라도 승리의 기적은 일어나지 아니했다. 세상은 적극적인 행위와 사고만으로 바라는 꿈이 무엇이든지 이루어 낼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위인들이 살아왔던 삶과 그들이 한 명언을 통해 '도전'을 갖도록 한다. 그 중에 하나의 예가, 30세에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 나폴레옹의 이야기 이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There is no impossible in my dictionary) 이 말은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를 진격하던 중 그의 군대 병사들에게 도전을 준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바라는 세상의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된다. 나폴레옹이 적극적인 사고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신념처럼 믿은 것이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군대들이 자신의 신념을 따라 오도록 한 것이다. 신념을 통해 꿈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한 인간의 노력일 뿐이다. 기적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 현실로 가능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삶에 성숙한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속에서 불가능한 일들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겸손함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미성숙한 사람들은 스스로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과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아무리 노력을 해보아도 결실이 주어지지 아니하면 사람의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게 주어진다. 그것의 실체가 바로 사람의 삶을 어둡게 하는 '포기와 절망'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의 삶에 나쁜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흩어지게 한다. 캠프파이어를 하다보면 장작불이 함께 하는 것과 흩어질 때의 차이를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장작불이 잘 타려고 하면 장작들을 서로가 기둥이 되게 세워 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장작불을 갈라놓게 되면 그 장작은 오래 타지 못해 꺼지게 된다. 이러한 것은 장작이 타다 남은 재까지도 흩트려놓게 되면 아무런 불빛을 낼 수 없게 된다. 이와 반면에 눈에 불꽃이 보이지 아니하는 재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서로가 붙어 있기만 하면 그 가운데서도 희망의 불꽃을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다. 기적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을 한지 2년의 세월을 보내며 힘겹게 가나안 입구인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을 한다. 그곳에서 이스라엘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대표 한 사람씩을 불러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하게 한다.
그 후 그들은 모세에게 돌아와 각자가 본 가나안 땅에 대해 보고를 한다. 그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부족의 대표들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모세에게 말한다. 우리의 모습은 아낙 자손과 비교해 볼 때 메뚜기와 같기에 가나안 땅을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긴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하기를 아낙자손이 큰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신앙관을 가졌다. 동일하게 주어진 상황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결과는 완전히 다르게 주어졌다. 하나님을 믿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밟게 되는 기적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과 대장부인 아낙 자손들만을 바라본 그들에게는 광야에서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죽게 된 것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밟아 보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패배주의가 너무나 팽배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다 실패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은 시편에 나오는 다윗왕도 동일하게 경험한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까"(시편6:2-3) 그러나 나의 현실의 삶에 고통이 있다 할지라고 자신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꿈을 포기 하지 아니하면 기적은 반드시 일어난다. 사단은 자신의 바라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도록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관을 버리도록 조장을 한다. 삶 속에서 기적을 체험하기를 바란다면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소망의 불씨를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잠언24:16)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33:3) 주께 기도하며 인내하는 자는 하나님의 때에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주님이 주시는 기적을 체험 할 수 있다.
크로스로드 한인교회 김칠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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