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스를 보면 세상은 온통 싸움판이다. 동네 싸움 정도가 아니다. 피 흘리며 사람들이 죽어간다. 이라크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락크 북쪽에 있는 소수 민족을 산으로 몰아내어 굶주림과 갈증으로 민족을 몰살 하려고 하고 있다. 5살난 아이가 물을 달라고 하다가 죽었다. 이 어미의 울부짖는 소리가 미 전국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 나왔다. 미 정부가 죽어 가는 저들을 위해 인도적 차원에서 비행기로 물과 식량을 투하하고 있다. 지금, 가자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으로 상대적으로 화력이 약한 팔레스타인의 시민과 어린아이들 1000여명이 죽었다. 그럼에도 정권을 잡고있는 하마스는 종전을 원치 않고 계속 피를 흘리려고 하고 있다. 그 것이 전 세계인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나쁜 여론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 는지도 모르겠다. 종교간에도 수없이 싸웠다.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종파 와 해석의 문제로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현실은 피 흘리며 고통을 주는 전쟁을 치루었다. 왜 평화를 원하면서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않되는가? 누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한 필요한 전쟁이라고 하지만 말 장난일 뿐, 계속 진행 되는 전쟁의 원인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 이다. 원하는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원치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현실을 본다. 이런 현상을 이해 할 수 있도록 이미 2천년 전에 바울은 이렇게 탄식 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구나. 내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하는 힘이 바로 내 속에 있는 죄의 힘이다.” 이렇게 설파 했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죄성이 있다.
정신의학자인 스콧 팩 박사는 그의 저서 “다가지 못한 길”에서 “악은 자기 성찰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러나 진실된 사람은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 성경의 반을 기록한 바울만큼 인간의 죄성을 철저하게 해부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기 힘으로 통제 할 수 없는 죄성때문에 고통 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 며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설파하였다. 배신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용서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이 당한 배신을 통해서 용서를 배우 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은 죄의 결과이지만 고통이 없이는 성숙도 없다. 세상의 모든 것에서 인간의 죄성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죄가 있는 이 세상 이 어쩌면 역설적으로 우리를 성숙케 하는 가장 위대한 교육현장 일 수가 있다. 그래서 인생 대학이 최고의 대학이다. 참혹한 전쟁의 역사를 생각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절감하고 또 그 필요성을 동시에 생각해 본다. “하나님, 이 고통스런 전쟁이 그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