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막 11:1-10).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에 이르렀을 때 '제자 두 사람'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셨다. 거기서 아직까지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두 마리를 풀어 끌고 오라고. 만약 누군가가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시키셨다. 그러면 즉시 보내줄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로 오셨음을 보여주신다(슥 9:9). 지금까지 예수님은 '종'으로서 섬기는 사역을 하셨다(막 10:45). 그런데 오늘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 위엄 있는 모습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이다. '하나님의 대변자'로 오셨다.
두 사람의 제자는 왕이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했다. 그랬더니 주인이 순순히 나귀 새끼를 풀어 주었다. 왕이신 예수님이 미리 준비해 두신 것이다. 제자는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순종하는 자이다.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납득이 안 된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현실적 문제에 매일 필요도 없다. 주님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순종할 때 예수님은 '모든 걸 예비'해 두신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문제가 발생할 것 같은데, 모든 일들이 순적했다. 예수님께서 미리 다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나귀의 주인도 그렇다. '내 전 재산인데'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 것인데 왜?'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면 손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아깝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나귀 새끼를 내어주었다.
그렇다면 나귀는 어떤가? 나는 경험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힘이 없다고, 나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힘든데 어떻게 해' 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왕이신 주님이 쓰신다고 하니까 군소리 없이 내어주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쓰신다고 하실 때는 친히 일하실 것이다.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다. 필요하다면 능력을 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흉내도 낸다. 나만 예수님의 제자처럼 살아가는 양 교만을 떨 때도 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예수님이 걸어가신 '같은 길?'을 따라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얹어 놓았다. 그리고 왕이신 예수님을 태웠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폼을 잡으실 수 있도록 카페트를 깔아주는 것이다. 게다가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큰 소리로 외쳐 찬양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와 그가 이루실 메시야 왕국을 찬양했다(삼하 7:13).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바로 그 메시야라고 찬양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여호와의 종으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고 찬양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점검해 봐야 한다. 진짜 예수님께서 걷고 계신 길을 나도 걷고 있는지? 먼저, '내가 꿈꾸는 왕'을 따르고 있는지, '왕이 꿈꾸는 제자'의 길을 걷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한다. 무리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로마 정부와 악한 세력들을 멸하시고, 유대 민족을 해방시킬 것을 기대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영광스러운 새로운 왕국이 건설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자신들이 만든 예수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맞추어가는 퍼즐은 그들이 꿈꾸는 퍼즐과는 딴판이다. 혹시 내가 기대하는 퍼즐을 갖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 않는가?
둘째로 겸손하고 온유한 평화의 왕처럼, 섬기는 종의 길을 걷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큰소리치고 군림하는 통치자의 길을 걷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강하고 멋진 말이나 전차를 타고 행진하지 않으셨다.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셨다. 겸손하고 온유한 평화의 왕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리다툼을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면서 다른 길을 제시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가? 이방집권자들처럼 힘과 권력으로 군림하는 왕으로 통치하려고 하지 않는가? 예수님처럼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는 섬기는 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왕이신 예수님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제자가 된다.
셋째로 불의의 세력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는 제자인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다.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은, 본래 하나님 임재의 도시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영광스럽고 거룩한 도시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가는 당시의 예루살렘은 인간의 사악함과 불의가 득실거리고, 거짓과 위선과 부조리가 난무하는 죄의 온상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잔인함이 용인되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약한 자가 압제당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곳을 당당하게 올라가셨다. 거짓과 위선과 불의와 항거하기 위해. 그러나 그 항거는 복수와 보복의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조용한 침묵의 항거였다. 십자가 죽음의 항거였다. 나는 불의를 일삼는 자는 아닌가? 불의에 저항하는 제자여야 한다. 악한 일 앞에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그러나 칼을 들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음으로, 침묵으로 불의를 이길 수 있어야 한다.
A. J. 크로닌 박사라는 분이 있다. 그는 의사였다. 그러다가 기독교 작가가 되었다.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남들이 외면하는 광산촌에서 의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 광산촌에 한 그리스도인 간호사가 있었다. 그 간호사는 쥐꼬리 만한 봉급을 받으면서도 아무 불평 없이 무엇이 그리 기쁜지 늘 웃으며 정성껏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하루는 크로닌 박사가 보기에 하도 안쓰러워서 그 간호사에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이 지닌 가치만큼 여기서 대우를 못 받고 있어요. 그걸 알고 있나요?"
그러자 간호사가 대답했다. "박사님, 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할까요? 저는 그냥 제가 살아 있고 그분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에요."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는 제자인가? 과연 주님과 같은 길을? 그렇지 않으면 다른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