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안수를 받은 목사 선교사로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은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이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믿음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적 분위기에서 자랐다.
언더우드가 12살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저지에 정착했다. 그들 가족은 화란 개혁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언더우드는 1877년에 뉴욕대학교 수학 후, 화란 개혁교회 계통 뉴브룬스윅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그는 신학교에 다닐 때 하루 5시간만 자고 나머지 19시간을 학업과 여러가지 종교적인 일에 활용했다. 그의 이런 정열적 삶은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도 계속돼 결국 건강을 상실하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원인이 된다.
그가 신학교 2학년 때 한·미조약이 체결됐다. 그의 급우 중 하나가 이 기사가 실린 신문을 오려 교실 벽에 붙여 놓은 것을 언더우드가 읽었다. 이것이 그가 자기 전 생애를 바쳐 일하게 될 한국과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1883년 10월 언더우드는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열린 미국 신학교연맹대회에 참가하였는데, 여기서 감리교인 아펜젤러(H. G. Appenzeller)를 만났다. 그는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한국에 온, 그래서 일생 동안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된 사람이다.
신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뉴브룬스윅 대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로 청빙하는 교회도 있었지만, 선교사 지원을 결심한 터여서 이를 거절하고 선교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가 신학교에 다닐 때 당시 일본 명치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올트만(A. Altmann) 목사가 방문해 연설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나갈 사람이 없느냐고 물으면서, 그곳에 죽어가고 있는 영혼 1,300만을 위해 일할 선교사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를 지원하고 있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그는 화란 개혁교회 총회에 가서 인도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지만, 그 교회는 그런 계획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선교사 파송이 여의치 않자 뉴욕의 한 교회의 초빙을 수락하는 편지를 써서 막 우체통에 집어 넣으려던 찰나 “한국에 갈 사람 없느냐?” “한국은 어찌할 터이냐?”하는 쟁쟁히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언더우드는 이 소리에 편지를 도루 호주머니에 집어놓고 한국에 가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국 북장로교회 본부를 찾아 인도 선교사 파송을 제안했다. 본부는 인도에는 계획이 없으나 한국에 간다면 파송해 줄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언더우드는 한국도 어차피 아시아이므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했다.
언더우드는 화란 개혁교회 목사로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 본부로부터 한국선교사 파송을 받았다. 그때 그는 약혼을 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약혼녀에세 자기가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았노라 말하고 결혼 한 후 같이 한국에 나가 선교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약혼녀는 선교에 뜻이 없었다. 그녀는 언더우드에게 한국에 가는 대신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한국 선교를 지원하자는 역제안을 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선교사 결심이 굳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언더우드는 그녀를 설득하려 노력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급기야 언더우드는 최후통첩을 했다. 나와 결혼하고 한국에 가든지 아니면 우리 약혼은 없었던 것으로 할 수 밖에 없다며 선택하라 했다. 그녀는 심사숙고 끝에 파혼을 선택했다. 언더우드는 어쩔 수 없이 결혼과 가정을 포기하고 한국 선교행을 택했다.
약혼녀로부터 파혼 선언을 들은 언더우드는 25세 총각 선교사로 1884년 12월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이듬해인 1885년 1월,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해 그 곳에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한국에 들어가는 배를 기다리며 그 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마침 기선 하나가 한국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언더우드는 이 배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하여 4월 2일 부산에 이르렀다. 거기서 하루를 보낸 후 제물포로 출발하여 4월 5일, 그러니까 바로 부활주일 오후에 비 내리는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 배에 전에 하트포드에서 열렸던 미국 신학교연맹대회 때 만났던 아펜젤러 부부가 미국 북감리교회의 파송을 받고 한국으로 가기 위해 탑승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동시에 한국 땅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선교사가 같은 날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 목사는 그때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생명과 자유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원하나이다.”
주한 미국 대리 공사 푸크는 언더우드의 입국은 허락했으나 아펜젤러 부부의 입국은 만류했다. 이유는 당시 아펜젤러 부인은 임신 중으로 불편한 몸이었고, 불과 몇 달 전에 있었던 갑신정변 여진으로 정국이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정치적 상황 속에 만삭의 외국 여자가 입국하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푸크는 일단 그들에게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할 수 없이 아펜젤러 부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언더우드만 제물포에서 이틀을 지낸 후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하여 한국에 이제 개신교 목사가 상주하게 됐고, 개신교 선교시대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됐다.
언더우드는 몇 달 전 입국해 일하고 있던 의사 알렌 선교사의 영접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알렌이 갓 시작한 제중원에서 일하는 것으로 한국에서의 첫 사역을 시작했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있었던 청일전쟁이 끝난 후, 천진조약이 맺어져 전운의 기운이 사라지고 정치적 안정이 찾아왔다. 일본에 간 아펜젤러 부부는 약 두 달 후에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됐다. 그가 오기 얼마 전 감리교회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톤이 내한했고, 아펜젤러 부부 입국 시 스크랜튼의 모친 메리 스크랜톤이 입국하여 감리교 선교 시대도 개막됐다.
언더우드의 내한으로 한국에 장로교회 선교 역사가 비로소 첫 닻을 올리게 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사역하면서 장로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다. 다방면에 수많은 일을 이룬 그를 일컬어 ‘팔방미인’(man of all seasons) 선교사라 일컫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