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며칠 전 서울 도심지에서 기가 막히고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다. 서울 시내에서도 사람이 살기에 꽤 괜찮은 동네에서 세 모녀가 동반 자살을 했다. 도대체 왜? 세 모녀가 함께.

세 모녀는 서울 송파구 단독주택 지하방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이불 두 채를 깔면 더 이상 공간이 없는 비좁은 방이다. 누렇게 뜬 벽지 위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부부와 두 딸의 가족 사진이. 그런데 화목해 보이는 사진 속 가족은 이제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오던 이들 가정에 느닷없이 불행의 폭풍이 몰아쳤다. 12년 전.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게다가 큰 딸은 고혈압과 당뇨가 심했다. 그런데 쪼들리는 가정경제 때문에 치료도 받지 못했다. 홀로 된 엄마는 먹고 살기 위해 근처 놀이공원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둘째 딸은 종종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생활비와 병원비를 충당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고달프고 정말 아슬아슬하다.

그래도 집세와 공과금을 미룬 적 없이 착실히 냈다. 월 38만원의 집세. 매달 20만원 정도인 공과금. 만만치 않은 돈이지만 그래도 근근이 버티며 살았다. 그러는 과정에 둘째 딸은 신용불량자로 낙인이 찍혔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식당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엄마가 길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다. 결국 식당일을 그만두게 됐다.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들어오던 수입이 끊겼다. 이들은 막다른 길에 몰렸다. 한 달간 고민했다. 그러나 길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함께 죽자!' 극단적인 선택이 마지막 선물이었다.

1주일 전부터 방 안에서 텔레비전 소리만 나고 인기척이 없었다. 집주인이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어 신고를 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세 모녀는 나란히 누워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숨은 이미 멎어 있었다. 숨진 세 모녀 옆에는 흰 봉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겉면에 적혀 있는 글씨가 우리네 눈시울을 적신다.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봉투 안에는 현금 70만원이 들어 있었다. 봉투에 적힌 글을 본 집주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다. "정말 착한 양반이었는데..."

생활고와 투병에 지친 이들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방 창문은 청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바닥에 놓인 그릇에는 번개탄을 피운 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방문도 침대로 막아 놓은 상태였다. 기르던 고양이도 모녀 옆에서 함께 죽어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마음이 아프다. 당뇨병을 앓으면서도 치료를 받을 수 없는 큰딸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메었겠지. 살려고 몸부림치다 보니 원하지 않게 신용불량자가 된 둘째 딸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어머니의 어깨는 너무 무거웠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더 갈 길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도 방치된 사회적 약자가 많다. 그들을 향해 비난하기는 쉽다. 그들에게 한 마디 싸늘한 말을 던지는 건 어렵지 않다. '노력하지 않으니 할 수 없지 뭐' 라고 정죄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이렇게 버티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죽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용트림하는 자들도 있다. 바로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이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큰 선물이 될 수 있다. 사회적기업으로 발 벗고 나서는 착한 기업들이 더 일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손에 있는 것을 펼 줄 아는 넉넉한 부자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많은 성도들을 모으기 위해 화려한 건물을 짓느라 빚더미가 되기보다,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누군가 내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내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려 하지 않는다. 알고 보면 내가 강도의 이웃이고,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고,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웃인 것을.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내 이웃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세상은 달라질 게 없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은 주저 않고 서글픈 선택을 한다. 극단적인 죽음의 길을.

'극단적 선택의 카드'가 나오기 전에 '공감의 카드'가 나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회. 마음에 있는 서글픈 이야기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세상. 무거운 짐을 갖고 끙끙거리는 사람들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가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다. 아니 자기 짐도 지기에 버겁다. 자신을 추스르기에도 급급하다. 조금 여유가 있어 남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가슴이 차가워져 있다.

죽음의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뒤덮기 전에 사회적 장치가 손을 내밀 수 있었다면. 그토록 차가운 시신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진 않았을 것을. 한 가닥 살아야 할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복지정책. 알고 보면 그 누군가는 복지 혜택을 받지 않아도 살만한데. 욕심을 조금만 포기하면 누군가가 죽음의 카드를 꺼내진 않을 텐데. 이기심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누군가가 죽음을 엿보지 않아도 될 텐데.

이제 복지누수 현상도 점검해 봐야 한다. 꼭 받아야 할 사람이 받을 수 있도록 더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책상머리 정책으로는 안 된다.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꼭 받아야 할 사람이 누락되지 않게 해야 한다. 복지혜택을 누리기 위해 위장이혼이라고? 죽음의 길목에서도 방세를 챙기면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양심 앞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가?

가난한 자와 병든 자, 고아와 과부를 돌아봐야 할 교회의 책임이 더 절실해진다. 불신 사회로부터 따가운 눈초리를 피할 수 있는 길도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좀더 적극적으로, 좀더 세밀하게 이웃에게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십자가에 온몸을 던져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처럼, 교회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적어도 살아야 할 사람이 희망의 끈만은 포기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