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믿음이다. 믿음은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말한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이 손발로 옮겨질 때 실제화된다. 믿음은 구경하기 위해 박물관 진열해 놓은 기념물이 아니라 사용하기위한 도구이다. 움직임이 없거나, 사용되지 않는 믿음은 실제하지 않는 믿음과 같다.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조들의 믿음의 행적을 일관되게 추적한다. 선조들의 믿음을 추적하면서 구체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믿음의 특징이 있다. 처음 등장하는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증거를 얻었으나 가인의 손에 죽게 된다. 결국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결과가 되었다. 그의 믿음은 자신의 희생을 각오한 제사로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첫번 제사였을 그 제사에 자신의 생명을 바친 것이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에녹이다. 성경상으로 최초의 승천자이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 나라로 옮겨진 사람이다. 통과하지 않고 들림받은 이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으면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겨졌을까? 창세기 5장22절에 보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을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다. 하나님과의 동행한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잠깐 만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사는 것이다. 함께 사는 것은 하나님과 일치된 삶이요 나 자신에 의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삶이다. 하나님에 의한 삶은 하나님께 바쳐진 삶과 같다. 그는 365살에 하늘로 들림받는다. 에녹의 365년 동행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바가 크다.
에녹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의 아들과 손자를 건너 뛰어 증손자인 노아이다. 노아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적인 천재지변을 경험하게 되는데 직접 사건을 목격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자신의 삶 전부를 걸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방주를 만든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전혀 있을 수 없는 홍수를 위해 인생 전체를 탕진하는 어리석은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었던 홍수 심판 경고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전부를 바쳐 만든 방주를 통해 완벽하게 구원받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홍수 심판 경고를 그대로 믿었고 자신의 소유는 물론 삶의 전부를 바쳐 말씀대로 순종한 그는 특별한 믿음의 모델로 삼을만 하다. 믿을 수 없는 미래의 사건을 말씀 그대로 받아 들이고 모든 재산과 일생을 바치는 결단은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세계적인 홍수 재앙 가운데서 홀로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인류 가운데 유일한 믿음의 소유자였다는 증거다.
또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노아의 8대손 아브라함이다. 많은 선조들을 건너뛰어 아브라함의 믿음이 소개된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면서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절대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은 절대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환경과 상황에 근거하는 믿음이 아니라 오직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 산 믿음이다. 하나님은 상황을 보고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고 역사하신다. 인간적인 가능성을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가능성만을 신뢰하는 믿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다.
기존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말씀만 의지하여 모험을 감행했던 아브라함은 여러가지 시험을 극복해 나간다. 시험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시험인 이삭을 바치는 사건이다. 낳을수 없는 아들을 주신 하나님은 이제와서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브라함 자신에게 잔혹하기 이를데 없지만 그보다 더 잔혹한 것은 그 뜻을 받아 들여야 하는 이삭 자신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이삭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혹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했거나 착각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은 것으로 밖에는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에게 순복한다. 일차적으로 아버지에게 자신을 다 바치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지만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자신을 내놓는다. 이삭의 믿음이 돋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찌보면 아버지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삭이 바쳐졌던 모리아 산은 훗날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는 성전터가 된다. 우연이 아니다. 제물을 바치는 곳이 제단이요 성전이다. 날마다 제사가 드려지는 곳이 성전이다. 그 성전에 날마다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자신을 바치는 믿음의 고백을 날마다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믿음은 나의 전부를 맡기는 것이요 순종은 나의 전부를 주님이 쓰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전부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증거다. 자신의 전부를 드린 사람만 하나님의 전부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소유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일부냐 전부냐를 보시는 것이다. 보화가 감추인 밭을 사는 조건을 기억하는가? 자기 소유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다 팔았느냐 안 팔았느냐에 핵심이 있다. 자기 소유를 다 판 사람만 그 밭을 소유할 수 있다. 예수와 나의 전부를 바꾸는 삶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