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Photo : )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소설에서나 나올 수 있을 법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47세 아내가 있다. 그는 약사이다. 4살 위인 남편을 만나 3자녀를 두고 살았다. 2006년 남편이 간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이후 남편은 몇 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2007년 가족들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지 않고, 아내와 10대와 20대가 된 세 자녀, 그리고 시누이와 함께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수상한 동거였다. 아내는 남편의 시신을 거실 카펫 위에 눕혀두고 함께 생활했다. 약사 출신이니 물론 방부처리는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어떻게 함께 동거를? 아내는 주기적으로 남편의 옷을 갈아입혀, 남편은 깔끔한 차림이었다. 가족들은 아침에 집을 나갈 때 평소처럼 시신을 향해 인사를 하며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생활했다. 이들은 외부인과 접촉을 거의 삼갔다. 밖에서 집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을 쳐놨다. 그렇기 때문에 7년 동안이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지내왔다.

이웃 주민들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당을 열심히 다니기는 했지만, 과격한 언행이나 이상 징후 없이 평상시 매우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잘못된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 "남편이 죽지 않았다. 곧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들 가족은 남편이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잘못된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그릇된 삶을 낳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과격 이슬람교도들이 일으키는 테러행각도 그렇지 않은가? 이들은 인류를 위협하는 테러를 거룩한 순교로 미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테러를 통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종교적으로 영광스러운 일인 것이다. 이런 잘못된 종교적 신념을 가졌기에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벌인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 사망을 인정할 수 없어 살아있는 것처럼 대했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살다 보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많다.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가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원치 않더라도, 현실은 현실이니까.

멀쩡한 배우자도 내팽개치고 이혼하겠다고 하는 요즘 시대에, 더구나 불치의 질병에 걸린 배우자를 두고 외도를 하는 요즘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얼마나 배우자를 사랑했으면.... 사랑이 식어가는 이 시대에 사랑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잘못된 집착이요 애정이기는 하지만. 이웃 주민들은 말한다. "집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다른 친구 집은 가봤는데."

7년 동안이나 이웃과 관계가 단절된 삶을 살았다. 7년 동안이나 이웃 주민들은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의심을 해 보지도 않았다. 이 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관심과 무관심 사이. 우리는 어디를 거닐고 있는가? 7년 동안 이웃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한 번 의심해 보지도 않는 우리네 삶. 옆집에서, 앞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분주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네 삶. 아니 작은 층간 소음에도 서로 흉기를 들이대며 다투는 우리네 삶. 배려하는 마음도, 조심하는 마음도 없는 이기적인 우리네 삶. 과연 괜찮은 건가? 이토록 서로에게 관심을 끊고 살아가도 되는 건가? 이웃이 신음하는 것도, 이웃이 아파하는데도, 이웃이 심각하게 다투는데도, 아무런 관심 없이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 과연 괜찮은가?

인생은 미완성. 서로에게 기대기도 하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주면서 살아가는 게 아름다운 인생 한마당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어우름의 세계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예수님이 나에게 물으신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수상한 가족들은 철저하게 남편과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주변 세계에 알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7년 동안 주변 사람들을 속이느라 얼마나 조바심이 났을까? 그동안 철저하게도 잘 숨겨왔다. 그러나 숨기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도 한계에 부딪힌다. 누구에게나 숨기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들통나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세상에 영원히 숨길 수 있는 완전한 비밀은 절대로 없다. 때가 되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을 통해 오랫동안 숨긴 비밀이 들통난다.

더구나 인간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하나님의 레이더망은 뚫을 수 없다. 하나님의 감시 카메라는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이다. 하나님의 감시 카메라에 걸려들지 않는 미세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것도, 아무리 은밀한 것도 다 걸리게 되어 있다. 어두컴컴한 야밤에 행한 일들도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 약사라고 하면 최고의 학벌을 가진 사람이다. 이성과 합리성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런 비합리적인 생각을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10대와 20대가 된 세 자녀들은 어떻게 된 건가? 이들이라도 문제 수습을 했으면 될 게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이들 모두 합리적인 사고 작용이 마비되었다. 종교적 신념이 그렇게 만든 걸까? 가족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집착에 사고를 마비시킨 걸까? 그렇지 않으면 배우자와 가족의 죽음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 여하튼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네 이성을 마비시키는 일들이 한두 가지이던가?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외상 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누군가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보면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을 한다. 급한 성격의 사람들은 속상한 일 앞에서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감정이 합리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것이다. 주변에서 '저 사람이 왜 저러지?' 하는 생각을 갖는데, 정작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이권이 개입되어도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다 보면 이해 안 되는 행동을 한다. 주변에서는 '저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미 이권에 눈이 멀어서 판단이 흐려져 있다. "나에게도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