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인격은 그와 함께 쓰여진성경에 기록된 전치사들 안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안에"(in), "위해"(for) 그리고 "함께"(with)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 살았으며, 또한 자기 "안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품었으며, 그리고 그들 가운데 들어가 함께 거하신다고 말한다(계3:20).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위해" 살고 또한 자기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죽는다.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함께" 하며, 자기 사랑하는 사람들과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 그러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철학은 전치사들인 "안에"(in), "위해"(for) 그리고 "함께"(with)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 안"(in)의 삶을 포기하고 산다. 우선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나 이웃의 누구를 위해 사는 것보다 무엇을 위해 산다. 오직 삶의 목적은 무엇에 해당하는 물질과 명예와 그리고 욕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산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사람들 안에 관계를 맺으며, 그들을 안에 들어가고, 하나님 안에 들어가 살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그런 삶을 즐겨하신다.
그러나 오히려 사람들은 오직 자신에게만 몰입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이 된다(ego-centered). 그 결과는 자기만이 최고라고 하는 생각(egotist)을 가지든지, 아니면 자기만을 오직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나르시즘(narcissism)에 빠져서 자신 밖에는 모르며 세상을 닫고 사는 몰상식한 인간(egoist)이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가치는 전혀 반대다. 그래서 그의 삶은 우리들의 모범이 된다.
"위하여"(for)의 삶의 가지는 우리들에게는 익숙한 용어다. "자유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 조국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등 수 많은 용어들이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그들을 수식하며 보호하는 전치사 "위하여"(for)가 없으면 무의미하다. 정의, 자유, 충성, 가족, 사랑하는 이가 어쨌단 말인가? 그들 모든 용어들은 생명력을 불어넣는 전치사 "위하여"(for)가 없다면 이미 죽은 용어들이다. 즉, 행동없이 생명력을 잃은지 오래된 개념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분명 그 개념들은 주체가 되는 주인 격인 "누구를 위한" 혹은 "누구의" 정의, 자유, 조국,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 연관될 때만 의미가 발생한다.
악을 위한(for) 몰입 내지 지향은 진정한 가치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위하여"(for)의 삶을 살았다. 삶의 진정한 의미의 주체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살았으며, 또한 삶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인간 간의 진정한 삶의 풍성을 위해(for)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우리들에게 삶의 방향성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함께"(with)의 삶을 살았다. 때로 혼자 산다는 것, 즉 고독은 삶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지만, 우리들은 궁극적으로 혼자 있고 싶어 한다. 이미 함께 사는 불편을 겪은지 오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이혼과 별거와 단절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셨고, 또한 그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했다. 즉, 존재의 이유도 방식도 오직 관계를 통하여 찾으셨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과 그 어떤 관계도 없다면, 그는 그 아무것도 아니다. 의미도 없고, 이유도 없어진다. 그리고 서서히 파멸로 치닫고 혼돈과 바닥없이 추락하는 끝없는 무저갱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잠시 살다갈 이 땅에서도 결코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오직 사람을 사랑할 때만이, 그리고 진정한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은 성숙과 자기만족의 거룩함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이러한 가르침의 진정한 모델이 된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예수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