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회가 흔들리고 있다. 그것도 뿌리째 흔들리고 있고, 외부의 도전 또한 만만치 않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내 개신교 교세의 감소는 과거에 비해 가속화되고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로 인식되어 온 미국 내에서조차도 개신교는 점점 게토(ghetto)화 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2011년 미국교회협의회(NCC)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한해에도 북미 지역 교회 전체 회원 수가 약 1%(145만 8000여 명)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에는 지난 십년간 개신교인의 숫자가 14만 명이나 감소한 것으로 통계청이 발표했다. 물론 교단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감소세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금년으로 135년 역사를 맞이한 한국 개신교 역사와 200년 이상 된 미국 개신교 역사는 서로 맞물려서 세계사의 향방을 결정짓는 커다란 한 축이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사(선교사)에 한 획을 그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교회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성장한 한국 교회와 명실상부한 기독교 국가로서 위엄을 떨쳐온 미국에서 개신교의 위기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체감적으로 느끼는 현상이 되었다. 위기의 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중심을 잃은 외형적 성장에서 복음의 알짬에 근거한 성장으로
교회는 생명이 약동하는 유기체와 같다. 그러기에 성장은 너무나 당연하고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를 물어야 한다. 목회자의 자기과시적인 허세와 맞물려 호사스런 예배당 건축과 관료적인 교회행정과 자본주의적인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교계의 현실 속에서 복음의 정신이 질식당하고 있다. 성공 신화와 번영 신학에 물든 채 교인수와 일 년 예산으로 목회자의 영력과 리더십이 검증되는 세태가 당연한 듯 인식되는 풍토 속에서는 건전한 복음이 자랄 수 없다.
‘좋은 것이 좋다’는 단순 논리에 기댄 외형적 성장이 마치 복음의 실행인 것처럼 오인된 위태로운 상황에서 진정한 복음이 제공하는 영적 생명 공간은 제한되거나 협소화되고 있다. 맘몬에 철퇴를 내려야할 교회가 오히려 맘몬과 그 정신이 할거하는 공간으로 변질될 때 하나님은 퇴락한 그 예배당에 계시지 않음이 분명하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 11:17)이라 규정하셨다. ‘만민’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포용적 의미와 ‘기도’라는 간단 소박한 의도 위에 성전이 세워져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포용적 의미와 간단 소박한 기능을 멀리할 때 교회는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아니 성전 자체보다는 성전을 떠받치고 있는 관료화된 성직체계가 더 심각한 문제였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교회의 성장은 필요하고 당연하다. 문제는 성장의 동력과 방향이다. 주객을 전도한 성장이 문제이다. 외형적 성장을 위해 교회의 본질과 복음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면 외형적 성장을 잠시 중단하고 안을 찬찬히 살펴야 할 때이다. 목회자의 야망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인 양 포장되지는 않았는지, 성령의 지도보다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기대지는 않았는지, 외형적 성장을 위해 생명지향적인 관계를 버리지는 않았는지를 물어야할 때이다. 복음의 알짬을 버린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며, 잠시 동안 ‘반짝 성장’은 할 수 있겠지만 세대와 세대를 잇지 못한 채 한순간 무너짐은 처참할 것이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를 제어할 수단은 없지만 둥지를 치고 머무르지 않게 할 수는 있다. 교회의 직분을 맡은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미혹과 욕망이 지나갈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둥지를 쳐서 알을 낳지 않도록 복음의 알짬을 다시 붙잡아야 할 것이다.
권력지향화에서 본질지향화로
현대 교회는 이제껏 네 가지 단계를 밟아 오면서 현재 위기에 봉착했다. 그 네 가지 단계란 교회 성장, 교회 성장 후기의 성장 침체, 수평 이동과 제도적 교회의 틀을 벗어난 개인적(홀로의) 영성 추구이다. 이러한 침체의 원인은 교회가 섬김 대신 권력을, 변두리 대신 중심을, 알짬보다는 화려한 외형을 추구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필요한 조직을 세워나가면서도 성령께서 언제나 역사하실 수 있도록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걸러내어야 한다. 지나친 형식추구로 인해 알맹이, 즉 복음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조직을 인위로 세우는 데 열심인 나머지 그 조직을 튼실하게 할 회중 각자가 지닌 성령의 은사가 그 속에서 질식당하지 않도록, 영적 권위는 존중받되 그것이 권력화 되지 않도록 교회는 늘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뒤바뀌면 본말이 전도된다. 구유를 소중히 여긴 나머지 그 구유 안의 아기 예수님을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교회의 직분도 그러하다. 어쩌면 교회가 영적 탄력과 그 순수성을 서서히 잃기 시작한 것은 교회가 점점 제도화 되고 권위적이 되면서부터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공간이 점점 좁아진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초기 교회는 처음부터 직제를 갖춘 제도화된 교회는 아니었다. 교회 회중이 각자의 은사에 따라 상보적 관계로 제 역할을 감당한 평등지향적인 공동체였다. 이러한 평등지향적인 교회가 점차 교권화되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 본위의 조직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역에 다다르려는 오만함을 뜻하는 헬라어 ‘휴브리스(hubris)’가 권력을 거머쥔 인간의 눈을 멀게 하여 위에 계신 분을 망각케 한다. 휴브리스에 빠진 교회의 권력이 더 위험한 이유가 여기 있다. 휴브리스의 늪에 빠진 교회는 교권(敎權)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무한권력처럼 휘두른다. 십자가 장식을 내걸었지만 십자가 정신을 잃어버린 십자군 원정처럼, 휴브리스에 빠진 교회는 십자가를 칼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위험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교회가 휴브리스에 빠질 때, 거룩한 권위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섬김의 은사로 사용하기보다는 남을 배척하고 억압하고 약자 위에 군림하는 공동체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라고 하는 영적 교만으로 인해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서(마 7:3; 눅 6:41)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교회가 휴브리스에 빠져 권력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복음의 정신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권력지향적인’ 교회가 아니라 ‘본질지향적인’ 교회, ‘센터(center)’로 나가려는 구심적 교회가 아닌 ‘변두리(margin)’를 향해 뻗어 나가는 원심적 교회가 복음적 교회이다. 원심적 교회는 외형적 성장보다는 복음에 근거한 생명을 분여(分與)하기 위해 낮고 소외된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교회이다. 뻗어나가되 낮아지고 섬김으로써 성장하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가 겨자씨에 깃든 생명의 신비를 구현하는 ‘하나님 나라’ 지향적인 교회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