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초 로마 제국의 막시무스 황제 때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다. 황제 숭배를 당연시하던 로마 제국에서 다른 왕을 섬긴다는 것은 반역죄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반역죄로 처형당할 때다.
당시 이집트에 거주하는 로마 귀족 가문에 용모와 학식이 출중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캐더린이다. 그녀는 주님의 복음을 영접하여 황제 숭배를 우상 숭배라고 하면서 비난하였다. 황제는 그녀가 아까워 여러 학자들을 그녀에게 보내어 화유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그들마저도 화유당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캐더린은 결국 고문을 당하게 되고 순교를 한다. 그런데 그녀의 시신이 사라져 버렸다. 전승에 의하면 그녀의 시신은 천사들에 의하여 시나이산 제일 높은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기독교는 황제가 후원하는 종교가 되었다. 교회는 점점 권력과 가까이 가게 되었으며 점차 기독교에도 부패의 기운이 돋아나게 된다. 이때 일부 수도사들은 도시를 떠나 광야에 가서 명상과 묵상으로 하나님을 찾는 운동을 했다. 이것이 수도원 운동이 시작이다. 시나이 광야 시내산 근처에도 수도사들이 점차로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점차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고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주후 330년 헬레나 모후가 이곳 시내산에 성지순례차 왔다. 이곳에 헬레나 모후는 불붙는 가시떨기나무 자리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납하는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수도원장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산꼭대기에 가라는 계시를 준다. 산꼭대기에 가보니 막시무스에 의하여 순교한 캐더린의 시신을 발견한다. 이 시신을 교회로 옮기고 수도원의 이름을 캐더린 수도원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4세기경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순례하게 되었고 5세기에는 시나이 교구가 세워졌다. 그리고 비잔틴 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정방형의 사각형 요새처럼 수도원을 증축하기 시작한다. 이 수도원이 완성된 것은 주후 557년이다. 아랍이 이곳을 침입하여 점령한 후 수도사들은 30명까지 줄어들었으나, 수도원장이 마호메트에게 수도원의 보호를 요청하였고 마호메드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옛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가 있게 되었다.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십자군이 등장함에 따라 캐더린 수도원은 기독교 세력과 아랍 세력 사이에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곳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이곳을 점령할 때도 수도원은 보호되었다. 이곳은 아이콘이라고 불리는 목판 성화로 유명하다. 그 아이콘들은 약 2000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수도원 내의 문은 비잔틴 황제인 유스티아누스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며, 1400년 이상 된 것이다. 교회 안에는 12기둥이 있으며, 이것은 12달을 의미한다고도 하지만 또한 예수님의 12제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기둥 위에는 성자들의 아이콘이 있다.
교회 제단 뒤에는 불붙는 가시떨기나무를 기념하는 예배당이 있고, 이곳은 거룩한 곳이라고 하여 지금도 신발을 벗어야 한다. 캐더린 수도원의 교회 이름은 변화교회라고 부른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교회 전단 중앙에 있는 모자이크로 표현하고 있다. 그 그림 속에는 엘리야, 요한, 베드로, 예수님, 야고보, 모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둘레에는 12제자, 12예언자, 건축 당시 수도원장인 롱지너스, 집사 요한 등 모두 26명의 모습이 있다. 교회 뜰에는 이드로의 샘이 있으며 가시떨기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시나이 반도에서만 자라난다고 하여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유명하게 된 것은 시내산 사본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콘스탄티노플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간의 주도권 다툼이 한창일 때다. 당시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불에서 동방정교의 수장인 그리스 정교회의 총대주교와 로마 가톨릭의 교황 간에 누가 우위에 있는가를 다투는 동안, 영국측은 그리스 정교회 편에, 프랑스측은 가톨릭 편에 섰다. 정교회의 총대주교는 영국의 호의에 감사하면서 자신이 영국의 성경사본 수집을 돕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영국 왕 제임스 1세에게 특별 선물을 보내려고 한다. 당시 영국 대사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과 동 시대에 살았던 테클라는 순교자가 남긴 사본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주기로 약속한 사본은 제임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가 1627년 찰스 1세에게 전해졌는데, 학자들의 연구 결과 당시로서는 가장 오래된 사본이다.
이 사본은 그리스 총대주교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는 길에 입수했다고 해서 알렉산드리아 사본이라고 하는데, 이 사본은 신약성경이 기록된 지 350년이 지난 약 400년과 450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시나이 사본의 발견 과정에는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발견보다도 더 극적인 이야기가 있다.
1844년 독일 출신의 콘스탄틴 티센도르프는 학생의 신분으로 중동 지역에 있는 교회와 수도원 순례에 나섰다. 당시 중동을 다녀온 사람들처럼 잘하면 사본을 발견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여행을 하였을 것이다. 그는 일정에 따라 시내산으로 알려진, 게벨 무사 북서쪽에 자리잡은 캐더린 수도원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는 온갖 종류의 사본들이 쌓여 있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고 한다. 남겨진 그의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커다란 홀 중앙에 놓인 커다랗고 넓적한 바구니에는 오래된 양피지들이 가득했는데, 그것들은 수도원의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사용될 것이었다. 서고 담당자는 썩은 양피지 두더미를 이미 태웠노라고 했다. 나는 이 종잇더미 속에서 내가 본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희랍어로 기록된 꽤 많은 구약성경 사본들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위의 글은 티센도르프가 같은해 5월 24일에 직접 목격한 내용을 기록한 글이라고 한다. 그는 수도사들에게 사본들은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리고 모두 129장을 찾아냈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얻고 싶었지만 수도사들은 43장만 주었다고 한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후견인인 독일의 작센주 영주에게 사본들을 가져다 주었다. 작센공은 그 사본들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보냈고, 지금까지 그 사본들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보관돼 있다. 1846년 티센도르프는 이 시내산에서 얻은 사본들을 책으로 출판하였고, 이 사본들은 4세기에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발견 장소는 밝히지 않았다.
1853년 티센도르프는 다시 시내산 캐더린 수도원을 찾았다. 그러나 수도원의 누구도 사본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 티센도르프가 발견한 것은 창세기 몇 구절이 적힌 조각이 전부였다. 1859년 2월에 티센도르프는 수도원을 다시 방문했다. 수도원의 서고 담당자에게 자신이 출간한 헬라어 구약성경[70인역본]을 한 부 선물로 주었다. 그러자 서고 담당자도 수도원이 가지고 있는 70인역본을 자랑하면서 보여 주었다. 붉은 천에 싸인 꾸러미를 펼쳐보이자 15년 전에 보았던 사본들과 새로운 사본들이 있었다. 그러나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보여만 줄 뿐 전혀 빌려줄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티센도르프는 카이로까지 수도원장을 찾아 가서 사본을 검토할 기회를 달라고 설득했다.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두 달에 걸쳐 사본들을 모두 베꼈다. 티센도르프는 사본들의 안전을 위하여, 당시 그리스정교회의 보호자인 러시아 황제에게 그것들을 맡기도록 수도사들을 설득했다. 1859년 11월 수도원은 사본들을 러시아 황제에게 보냈다. 그러나 러시아가 공산 혁명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 사본들을 판매하려고 할 때, 미국과의 협상은 결렬되어 영국에 판매가 된다. 당시 가격으로 10만 파운드(달러로 환산하면 50만 달러)로,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구입한 가격 720만 달러의 14분의 1일이다. 영국은 이 사본의 구입을 국민들이 기부한 자금으로 충당하였다. 티센도르프에 따르면 이 사본들은 바티칸 사본처럼 주후 350년경에 필사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