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하고 있는 조원태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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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하고 있는 조원태 담임목사

뉴욕우리교회(담임 조원태 목사)와 동양제일교회(담임 빈상석 목사)는 지난 3월4일부터 9일까지 인디언 원주민지역인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에 단기선교답사를 다녀왔다. 두 교회의 담임목회자와 선교책임자들이 동행한 이번 선교답사를 통해 북미 원주민들이 복음을 배척하고 있는 실태와 그들을 그렇게 몰고간 역사적 상처의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조원태 목사는 단기선교 답사를 마친 후 주일설교에서 ‘예수님의 선교’(누가복음 10: 25~37)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북미 원주민 선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조원태 목사의 설교는 복음에 상처 입은 북미 원주민들에 대한 한인교회들이 가져야할 선교적 자세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이에 기독일보는 조원태 목사가 3월10일 주일예배에서 전했던 설교를 게재한다. 다음은 설교 주요 내용.

사우스 다코타 라는 인디언 보호구역에 선교답사차 다녀와서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예수님의 선교에 대해서 묵상하게 해주셨다. 우리가 발딛고 사는 미국은 아직까지도 세계 최대의 기독교 국가이고 아직까지도 세계 최대의 선교국가인데 미국 내에서 선교를 하러 간다는 것이 사실 어색하고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디언 보호구역은 방문해보니 복음의 난청지역이었다. 실제로 통계로도 인디언들은 미전도종족으로 분류된다. 요즘 반기독교정서가 팽배하게 세상에 들어차 있다. 이런 세상에는 복음을 제시하기도 힘들고 목회도 힘들다. 그런데 인디언 보호구역은 제가 부딪혀 본 많은 지역 가운데 대표적으로 반기독교 정서가 드리운 지역이다. 그리고 방문하니까 그 자초지정도 이해가 됐다.

미전역에 인디언 보호구역이 100여 곳이다. 인디언 원주민들을 고립하고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정책시안이었다. 이곳을 방문한 이후 저의 안락함이 남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풍요로운 도시 뉴욕을 살다가 이 지역으로 가보게 된 은혜에 감사하다. 운디드니(Wounded Knee)라는 학살장소에 가봤다. 마지막 결사항전이 있던 시기에 수백명의 인디언들을 구덩이를 파서 생매장을 시켰다. 어린이와 부녀자를 막론하고 수많은 인디언들을 죽였다. 그들을 죽인 장본인들이 공교롭게도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제 옆에는 없었지만 얼굴이 뜨거워졌고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영토확장의 명분으로 인디언들을 죽였는데 그곳이 반기독교의 장소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본문의 예수님 시대 때에도 기독교라는 이름이 걸려있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반대했던 수많은 무리로 인해 반기독교 정서가 역사상 가장 팽패했다고 볼 수 있고 오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사람 마음 가운데 들어가 있었다.

오늘 나오는 율법교사가 왜 이런 정서가 가득했는지를 보여준다. 시험삼아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책에는 어떻게 기록돼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서 읽고 있느냐고 다시 물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참 좋은 대답이라면서 그대로 행하라고 하신다. 또 질문을 던진다. 선행에 대해 묻는다. 여기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사장은 지금의 목회자로 볼 수 있다. 여러분들이 아는 목회자가 종교인이 그것을 못본척하고 지나친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그 종교를 보겠는가.

오늘날 반기독교정서는 마귀의 전략이겠지만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한다. 반유대교 정서가 팽창할 위기에서 그것을 구해낸 주인공은 사마리아인이었다. 이것은 체면도 아니고 양심의 가책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의 몸처럼 여기고 돌 본 것이다. 흉내낸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해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줬다. 아파볼 때 아픈 사람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다.

예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시작이 된 것이다. 옆에 있는 누추한 사람처럼 변해서 그 사람 입장이 되는 것도 쉽지 않고 그 자체도 부부간에 다투고 옥신각신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선교의 시작이다. 심지어 죄인의 모양이 되어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선교를 완성하셨다. 사도신경에는 지옥 음부까지 내려갔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선교를 가봤을 때 그곳은 강도만난 자의 현장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도 못했고 언뜻 알아도 그냥 지나치는 행인같은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내 갈길 간다는 삶이 뉴욕의 라이프를 대변한다. 일방적으로 선교를 하려다 오히려 강도가 되어 상대에 상처를 준 지역이었다. 수백년동안 이땅에 인디언선교를 하겠다고 한 결과가 황폐한 선교지와 텅빈 교회였다. 인디언 박해의 역사가 과연 이런 것도 있었는가 하는 내용들도 있었다. 심지어 인간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을 심각하게 벌인 흔적도 있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물질로 생각하는 크리스천들도 많다. 이제 지난날의 신앙을 누군가 나서서 참회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개척해 나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더 원하신다고 깨달았다.

예수님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가 물었다. 물론 도움을 준 자라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그대로 행하라고 하셨다. 율법교사는 이웃의 정의, 내가 사랑해야할 이웃의 경계는 어디냐고 물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자체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서 이웃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미션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션이라는 미명아래 정복을 행해왔다. 당시 유대인들의 이웃의 경계는 동족이다. 자기 가족과 동족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방인은 철저히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백성들이다. 거기에 바리새파라는 유대인 집단은 또 이웃의 영역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다른 몇 소수 종파도 제외했다. 자기 중심적으로 정한 이웃에 대한 정의 그것을 예수님이 물어보신다. 누가 율법교사의 이웃인가를 물어본 것이 아니라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인가를 물어보셨다.

우리 가정은 아빠가 중심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 중심이다. 우리 몸에도 심장이 중심이 아니라 아픈 부위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 율법교사에게는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아니었다. 인디언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을 보호구역을 지정해 거기에 별도로 살도록 한다. 호로자식이라는 우리 말은 오랑케의 침입으로 혼혈아를 낳은 아녀자들에게 큰 상처를 줬다. 민족의 아픔의 한인데 그것이 욕이 되었다. 내 선교를 중지하고 내 의를 나타내려고 선교하는 것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선교가 변해야 한다.

이번 선교답사를 통해서 미국 인디언이 한인이민교회의 주요선교 사명임을 강하게 콜링을 받았다. 성경은 땅과 자손을 약속해주신 책인데 이 북미대륙의 원주민은 인디언이었다. 청교도들이 처음 미국땅을 밟았을 때 인디언들은 음식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청교도들을 대접했다. 그 땅 위에 코리안들이 100년 넘게 살고 있는데 강도만난 자를 못본척 살아서는 안된다.

2000년 9월8일 연방정부 인디안 관리청 국장 케빈 가버 국장이 인디언국 175주년 행사장에서의 서부개척 당시 인종말살에 참여했다는 것과 때로는 병균을 살포하고 독한 술을 제공해 정신을 파괴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학살의 현장을 지우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 인디언들과 미국인들이 현장에서 오열하며 화해의 눈물을 흘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추수감사절을 인디언의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세상에서도 이렇게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저는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성만찬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플로리다에서 우리 교단의 이웃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를 했다. 그 미국교회 1천여명 성도들을 초청해서 우리가 대접한 일이 있었다. 그 교회 담임인 백인 목사와 흑인인 부목사, 그리고 저는 동양인이었다. 저는 일본인들을 용서하는 기도문을 발표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흑인 목사가 백인들에게 당했던 서러움들을에 그들을 경멸했던 자신을 참회하는 기도를 했고, 담임 목사도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거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속이라는 것은 세상에 전혀 없는 것이다. 기독교 외에는 어디에도 대속이라는 개념이 없다. 이 땅에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대속에 참여해야 할 때다. 이것이 수준높은 크리스천들의 삶이다. 서로 잘못만 정죄하고 잘못마저도 이웃에게 뒤집어 씌우고 내 자녀에게, 또 반려자에게, 또 옆에 있는 이웃에게 전가한다면 강도만난 자를 지나치는 모습이 될수밖에 없다. 내 탓이고 내가 대신 죄를 지고 가겠다고 할 때 반기독교 정서가 물러날 것이다.

반기독교정서가 지금보다 더 심했던 그 때 당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을 통해 그것을 물리치셨다. 반기독교 정서의 본산이라 볼 수 있는 로마까지도 굴복시키겼다. 여러분의 가정이나 삶의 자리는 어떠한가 돌아보시기 바란다. 우리 한국인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인디언들을 돌봐야 한다. 선교답사에서 배웠던 인디언들의 인사가 ‘우리는 다 가족이다’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모친이요 가족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데도 부모가 자녀를 놓아두고 죽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아무 부담없이 그 어린아이들을 다 자랄때까지 부양한다. 노력을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복음이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주셨구나 깨달았다. 지금까지 목회를 어떻게 했던 것인가 참회를 했다. 내가 아플 때 남의 아픔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에 공감해주시는 능력에 탁월하시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가족이 되게 하셨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한 가족이고 한 패밀리다. 복음은 말하는데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기 바란다. 마치 김샌 콜라와 같이 김샌 복음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복음은 떨어지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율법교사는 김샌 복음만 알고 있었다. 정작 살아있는 복음을 갖고 그 복음의 능력을 행한 이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이웃의 경계를 정해서 상대를 고립시키려다 사실은 여러분이 고립된 것은 아닌지 살펴 보시기 바란다. 강도만난 자를 고치고 치료하는 예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