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유일한 양식인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에 기대어 살았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도 유일한 양식인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에 기대어 살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며 살아가기를 마다한다면 살아 있기를 마다하는것과 같다. 말씀을 먹지 않는다고 당장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이 말씀의 은혜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비록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처럼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은 단지 그들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것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존재들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만나를 내려 주신 그날부터 그 이후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면 바로 바구니를 들고 들판으로 나아가 그날 먹을 양식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빋았다. 그러나 내일이나 모레까지 먹을 양식이 아니라, 오직 오늘 먹을 양식이었다. 이른 아침, 눈뜨자마자 오늘 먹을 양식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었던 그들의 그모습이 바로, 지금 우리의 살아가야 할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살 방도가 없다는 겸비함으로 오늘 하루를 살 새로운 힘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양식을 공급해 주신 시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지는 모르지만 이른 새벽에 들로 나가면 이슬처럼 만나가 내려와 있었다. 만나를 거두는 시간은 매일 정확하게 새벽이었다. 새벽에 하나님으로부터 그날에 필요한 힘을 공급받은 것이다. 이 만나의 사건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신령한 영향력을 공급받는 일에 바치는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의 충만함으로 시작되는 하루와 척박하고 메마른 심령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얼마나 다른지 아는가? 매일 새벽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삶보다 기적적인 삶이 있는가? 새벽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인생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아 승리의 하루를 출발하는 것이다. 무엇이 정상적인 하루의 출발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에너지를 공급받아 시작하는 하루 하루가 쌓여 한달이 되고 일년이 되고 평생이 된다. 중요한 것은 어제받은 은혜, 내일 받을 은혜가 아니라 오늘받은 은혜이다. 오늘 받은 은혜가 어제의 받은 은혜요 내일 받을 은혜이기 때문이다. 만나는 하루치만 거둘수 있었다. 어제의 하루, 내일의 하루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을 말해 보라면 꼭 10년,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왕년의 간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옛날 경험한 은혜의 위대함을 말해 주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초라함을 보여주는것이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날마다의 삶이 은혜요 체험이요 간증이다. 과거에 강력한 은혜의 체험을 했을 지라도 그 은혜가 지금 유지되고 있지 않다면 은혜없이 사는 지금의 처지에 대한 위로에 불과하다. 폐인된 선수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곧 오늘의 만나는 자신에게 없다는 반증이다.
만나의 공급은 생명의 공급이다.생명은 인간의 첨단 기술로 만들수 없는 것이다. 생명의 공급뿐 아니라 생명의 유지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은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 능력조차 하나님의 공급에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의 만나 공급은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어 가나안 정복을 가능케 했다. 궁극적인 승리는 매일 매일의 승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매일의 승리는 매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생명의 양식인 만나를 매일 아침 거두는 심정으로 새벽마다 해야하는 두가지 일이 있다. 말씀과 기도이다. 배고픈 것은 양식이 필요하다는 증거이며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영혼의 양식에 대한 배고픔이 있어야 한다. 배고픔은 새벽의 고단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양식의 섭취와 함께 호흡이 필요하다. 호흡이 없다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호흡으로 공급된 산소가 양식을 에너지로 만들어준다. 고단하다고, 약하다고 말씀과 기도생활에 소홀하기 쉽지만 고단할수록 약할수록 말씀 섭취와 기도가 절실한 때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에게는 목숨과 같은 미래였다. 오늘의 소중함은 목숨이상이다. 반드시 주님의 손에 붙들려야만 한다. “왜 새벽이어야만 하는가?” 현대인들 뿐만 아니라 광야를 걷던 그들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것을 메고 40년을 걸어야 했다. 그들에게 있어 새벽 시간은 우리만큼 일어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깊은 잠 속에 빠져 의식없이 누워 있다가 깨어 일어나는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다. 일어나지 못하면 더 이상 생명은 허락되지 않은것이다. 새벽에 일어나는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처음 만난 분이 하나님이었다.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 처음 시야에 들어온 분이 하나님이었다. 새벽은 새로운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그의 뜻을 묻고 그의 능력을 구하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지난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새벽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의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인가? 모든것의 시작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시작만이 시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살 방도가 없다는 겸비함으로 오늘 하루를 살 새로운 힘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양식을 공급해 주신 시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지는 모르지만 이른 새벽에 들로 나가면 이슬처럼 만나가 내려와 있었다. 만나를 거두는 시간은 매일 정확하게 새벽이었다. 새벽에 하나님으로부터 그날에 필요한 힘을 공급받은 것이다. 이 만나의 사건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신령한 영향력을 공급받는 일에 바치는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의 충만함으로 시작되는 하루와 척박하고 메마른 심령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얼마나 다른지 아는가? 매일 새벽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삶보다 기적적인 삶이 있는가? 새벽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인생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아 승리의 하루를 출발하는 것이다. 무엇이 정상적인 하루의 출발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에너지를 공급받아 시작하는 하루 하루가 쌓여 한달이 되고 일년이 되고 평생이 된다. 중요한 것은 어제받은 은혜, 내일 받을 은혜가 아니라 오늘받은 은혜이다. 오늘 받은 은혜가 어제의 받은 은혜요 내일 받을 은혜이기 때문이다. 만나는 하루치만 거둘수 있었다. 어제의 하루, 내일의 하루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을 말해 보라면 꼭 10년,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왕년의 간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옛날 경험한 은혜의 위대함을 말해 주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초라함을 보여주는것이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날마다의 삶이 은혜요 체험이요 간증이다. 과거에 강력한 은혜의 체험을 했을 지라도 그 은혜가 지금 유지되고 있지 않다면 은혜없이 사는 지금의 처지에 대한 위로에 불과하다. 폐인된 선수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곧 오늘의 만나는 자신에게 없다는 반증이다.
만나의 공급은 생명의 공급이다.생명은 인간의 첨단 기술로 만들수 없는 것이다. 생명의 공급뿐 아니라 생명의 유지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은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 능력조차 하나님의 공급에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의 만나 공급은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어 가나안 정복을 가능케 했다. 궁극적인 승리는 매일 매일의 승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매일의 승리는 매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생명의 양식인 만나를 매일 아침 거두는 심정으로 새벽마다 해야하는 두가지 일이 있다. 말씀과 기도이다. 배고픈 것은 양식이 필요하다는 증거이며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영혼의 양식에 대한 배고픔이 있어야 한다. 배고픔은 새벽의 고단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양식의 섭취와 함께 호흡이 필요하다. 호흡이 없다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호흡으로 공급된 산소가 양식을 에너지로 만들어준다. 고단하다고, 약하다고 말씀과 기도생활에 소홀하기 쉽지만 고단할수록 약할수록 말씀 섭취와 기도가 절실한 때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에게는 목숨과 같은 미래였다. 오늘의 소중함은 목숨이상이다. 반드시 주님의 손에 붙들려야만 한다. “왜 새벽이어야만 하는가?” 현대인들 뿐만 아니라 광야를 걷던 그들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것을 메고 40년을 걸어야 했다. 그들에게 있어 새벽 시간은 우리만큼 일어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깊은 잠 속에 빠져 의식없이 누워 있다가 깨어 일어나는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다. 일어나지 못하면 더 이상 생명은 허락되지 않은것이다. 새벽에 일어나는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처음 만난 분이 하나님이었다.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 처음 시야에 들어온 분이 하나님이었다. 새벽은 새로운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그의 뜻을 묻고 그의 능력을 구하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지난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새벽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의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인가? 모든것의 시작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시작만이 시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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