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문화원(원장 박흥식 교수) 목요강좌가 지난달 29일 이어령 박사(명예원장)와 이재철 목사(100주년기념교회)의 ‘성서 스토리텔링: 야곱’을 끝으로 올해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대담에서 두 사람은 먼저 야곱의 ‘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7차례에 걸친 ‘스토리텔링’ 강좌의 취지와 목적에 관해 설명했다.
먼저 야곱에 대해 이재철 목사는 “야곱과 그 자녀들의 이야기는 창세기 절반(25-50장)이나 나오는데, 그만큼 야곱이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고 야곱의 이야기가 곧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뜻”이라고 했고, 이어령 박사는 “끝없이 경쟁하고 때로는 속고 속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제 힘으로 끝까지 성취하려는 야곱은 창세기에서 현대인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했다.
이재철 목사 “하나님의 선택 있지만, 응답하는 우리의 문제 남아”
이어령 박사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 이유 따지면서 비극이 시작”
이후 두 사람은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목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어린아이로 만들지 않으셨고, 가인과 아벨, 노아와 아브라함도 성인일 때 부름받았다”면서 “그러나 야곱은 태어나지 않았을 때 이미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며 선택받았고, 하나님 언약의 정통성이 야곱에게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저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아니었다면 절대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었음을 알고 있다”며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됐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야곱”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절대 주권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허물 많고 보잘것 없고 많은 결점이 있지만 하나님은 때로 때리시고 쓰다듬으시고 치시면서도 우리를 세워가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으로 우리를 선택하셨지만, 각자 얼마나 그 앞에 순종하는가 하는 개인적인 ‘응답’의 문제가 생긴다. 이 목사는 “그런 의미에서 야곱과 바울의 삶은 참 대조적”이라며 “바울은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선택받은 그 순간부터 철저히 순종했고, 야곱은 (형을 제치고) 선택받았음에도 살고싶은 대로 살고 속고 속이는 삶을 살면서 삶을 허비하다가 겨우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마무리한 인물”이라고 전했다.
이어령 박사는 이에 대해 “선택받은 동생 야곱은 형의 약점을 이용해 장자권을 사는 등 기본이 안 돼 있는 사람이었고, 형 에서는 훨씬 인간미 있고 사나이다우며 멋있을 뿐 아니라 동생에게 속은 뒤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죽이겠다고 하는 효자이기도 했다”며 “이를 보면 하나님의 선택은 권선징악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종의 부조리이고, 우리 머리로는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우리를 만드신 분의 차이라는 것.
이 박사는 “여기 있는 컵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듯, 우리도 우주 전체를 기획하신 의도, 디자인하신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우리는 짐승이나 물건들과 달리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우리 자신으로부터 뛰어나가 바라볼 수 있게 됐는데, 이는 마치 컵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꼴”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이 완벽하면 괜찮을텐데,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자만이 알 수 있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자기 파산이 오거나 자기 부정을 일으키는 등 비극적인 일이 생긴다. 그는 “컵이 만들어진대로 사용되면 그걸로 만족하듯, 피조물인 우리 또한 만드신 분의 뜻대로 살면서 만족하고 있어야 하는데도 의식이 들어와 만들어진 입장에서 자신을 보게 됐고, 이것이 바로 원죄”라고 덧붙였다.
이어령 박사는 “하나님은 선택한 자를 야곱처럼 반드시 시험하셔서 세속적 가치로 보면 안 믿는 게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는데, 그래도 선택 당하는 것이 좋은가”라며 “원죄를 지은 사람은 야곱처럼 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추적하고 도망하는 고된 일생이 끝나려 할 때 화해하고 정착하고 휴식하려 하는 이러한 야곱의 일생이 현대성, 오늘날 야곱을 통해 나 자신을 느낄 수 있게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이재철 목사 “져 주시는 하나님… 하지만 심은대로 거둠을 기억” 이어령 박사 “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 죽어야 사는 역설의 존재”
세상에 존재하는 선악에 대한 예정론과 신정론 등에 대해서도 화두를 던졌다. 이재철 목사는 “다른 이의 발뒤꿈치를 잡는 사람, 남을 등쳐먹은 사람, 속이고 속는 사람인 야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도 끼치고 속이기도 한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그 분과 일대일로 대면할 수 있었다”며 “흔히 야곱과 씨름한 이를 천사라고 생각하는데, 야곱이 그 지명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브니엘)’이라고 한 걸 보면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 당신이셨다”고 서두를 열었다.
“여러분,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기나? 불가능하다”고 한 이 목사는 자신의 경험담을 펼쳤다. 아들 네 명이 어린 시절 자신과 씨름이나 레슬링을 하자고 덤볐는데, 충분히 이길 수 있지만 져 줬기 때문에 백전백패 했다는 것. 그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지 않나, 하나님도 우리에게 져 주신다”며 “그래서 부조리하고 부도덕하고 살던 이재철, 20세기의 야곱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불러 세우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심은대로 거두는 법칙(갈 6:7)”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져 주시기 때문에, 계속 내가 야곱처럼 누구를 속이고 등쳐먹고 내 마음대로 욕심대로 살아도 되는가” 하고 질문했다. 야곱이 장자권을 받고 삼촌 집으로 가서 20년간 속고 속이는 기간이 있었지만,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 20년간 피멍 든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 그는 “하나님께서 계속 져 주시고 내 편이 돼 주시지만, 바른 씨를 뿌리지 않을 때는 그 씨를 반드시 내 손으로 거두게 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 목사는 다시 한 번 야곱과 바울을 대비하면서 “우리가 선택받아 믿을 수 있게 된 바에야 바울처럼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나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인생을 더 의미있게 세우는 길”이라며 예정론에 대해 “야곱의 그런 속이는 성격 때문에 삼촌 집으로 도망가서 아내 네 명을 얻어 열두 아들을 이뤘다는 시각도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야곱이 속이는 삶을 살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서 더 아름답게 야곱의 인생이 낭비됨 없이 자신의 뜻을 펼치셨으리라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령 박사는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둘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상대적인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며 “하나님의 창조가 이렇게 절대적이냐 구조적이냐에 따라 예정설과 자유의지설이 생겨나는데, 우리는 어떤 때는 하나님이 전부 예정하시고 간섭하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경우에는 가만 놔두신다고 생각한다”고 해석했다.
이를 교통신호로 비유했다. 어떤 고등학생이 세상의 제도를 모두 부정하고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경우와, 시골에서 올라와 교통신호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빨간 불이 켜졌는데도 지나가는 경우는 다르다는 것. 그는 “처음부터 교통신호 바깥에 있으면 지킬 것도 어길 것도 없는데, 우리가 세상에 선악이 존재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라며 “하나님께서 절대자이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하나님은 악이 무엇이고 사람을 죽이는 게 무엇인지 하는 인간의 이원론적 체계를 초월하신 분”이라고 했다.
“져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라는 이야기다. 정말 상대방을 속인 적도, 속이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성인 군자는 상대방이 속일 경우 속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속이는 것 자체를 전연 상상하지 못하면 속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는 “모세가 율법을 얘기했을 때 간음이 뭔지 몰랐다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며 “간음을 전혀 할 생각이 없었는데 율법을 배우면서 간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간음을 알기 때문에 간음하지 마라는 말을 하게 된다”고 뒷받침했다.
이렇듯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육신을 입고 인간과 하나님을 이어주려 오신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그 분의 오심이 극적인 이유는 하늘과 땅 어디로도 정의되지 않는 애매함 때문”이라며 “십자가 자체가 가장 혐오스럽고 잔인한 형틀이지만 그것이 있기에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못박히지 않으면 부활이 없으며, 죽음인 동시에 생명인, 이는 악의 상징 속에 가장 성스럽고 구원이 있는 역설의 모순”이라고 전했다.
이어령 박사는 “어디까지가 자유의지이고 구속이며,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간섭이고 인간의 자유의지인가” 라며 “구조 바깥에서 보면 하나님이 절대자이시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참여하시면 하나님도 우리와 같은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가지면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 결부시키게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박사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겼다고 하셨지만, 이긴 야곱이 진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라”며 “인간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데까지 갔지만, 그런 힘으로도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의 구조적 사회 안에서 이뤄지는 힘은 별개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일곱 차례의 스토리텔링, 이어령 박사의 의도는
“성경의 과학적 오류 때문에 무신론? 저차원적”
이어령 박사는 “지상의 논리와 하나님의 논리가 따로 떨어져 있으면 모르겠지만, 단절된 상태에서 지상에 관여할 경우 하나님은 상대적이 된다”며 “그러므로 어디까지가 신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영역인지, 어디까지가 자유의지이고 결정론적인지, 사실 지금도 저로서는 이게 풀리지 않기 때문에 스토리텔링으로밖에는 안 된다”고 밝혔다. 논리로는 되지 않지만, 이야기로는 된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스토리텔링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 구조 속에서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느냐,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며 “만화처럼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진실 구조가 다른 것으로, 이야기 흐름에서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같은 역사적 사실도 실록처럼 표현할 수도, 시로 쓸 수도, 이야기로 할 수도 있는데 창세기 이야기는 모두 스토리텔링으로 돼 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저는 성경이 무오류의 책이 아니라 오히려 오류 투성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 책이 인간이 멋대로 쓴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인간이 썼다면 이것보다 훨씬 논리적으로 잘 쓰지 않았겠나”라고 반문했다. “우리 상식대로 성경을 읽는다면 믿을 사람이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각도로 읽어보면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도 생기고 지금 이렇게 죄를 짓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 한 발짝 가까워져 가는 진전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고도 했다. 마치 야곱이 벧엘에서 사닥다리 꿈을 꿨듯, 이것이 자신은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의 신에 의해 도달하는 ‘상승적 인간’이다.
이어령 박사는 “노아의 방주를 읽으면서 포유류가 무엇을 잡아먹었나, 비가 샜나 이런 것을 따지거나, 하와에게 가죽옷 입혔다는데 쫓아내면서도 사랑하셨다고 읽어야지 왜 동물을 죽였는지 논쟁한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라며 “사르트르나 마르크스 이러한 자들도 그런 단계의 논의로 무신론이 된 것이 아니고, 그런 식의 저차원적 논의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교회의 타락이나 목회자 비리 때문에 교회를 비방하는 일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영화관에서 본 어떤 영화가 재미없으면 다음부터 영화관에 가지 않느냐”며 “부분으로 전체를 얘기해서는 안 되고, 이런 식의 비약이 계속되면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희망이 없어진다”고 했다.
이재철 목사는 강좌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은 늘 나를 보고 계시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개입하시는데, 민감하게 깨어있다면 때로 내 인생의 다리를 절게 하셔도 그게 나를 위한 하나님의 복임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결과적으로 우리 인생이 이 시대를 위한 창세기로 엮일 수 있다”며 “그동안 (이어령) 선생님께서 성서 스토리텔링을 통해 구조적 관점으로 텍스트를 바르고 깊이있게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특히 철저하게 부정할 때 그 부정의 끝에서 전적인 신뢰의 하나님을 만난다고 말씀하셨는데, 시간나실 때 그 말씀들을 한 번씩 되새겨 보신다면 여러분들의 신앙 과정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먼저 야곱에 대해 이재철 목사는 “야곱과 그 자녀들의 이야기는 창세기 절반(25-50장)이나 나오는데, 그만큼 야곱이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고 야곱의 이야기가 곧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뜻”이라고 했고, 이어령 박사는 “끝없이 경쟁하고 때로는 속고 속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제 힘으로 끝까지 성취하려는 야곱은 창세기에서 현대인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했다.
이재철 목사 “하나님의 선택 있지만, 응답하는 우리의 문제 남아”
이어령 박사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 이유 따지면서 비극이 시작”
이후 두 사람은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목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어린아이로 만들지 않으셨고, 가인과 아벨, 노아와 아브라함도 성인일 때 부름받았다”면서 “그러나 야곱은 태어나지 않았을 때 이미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며 선택받았고, 하나님 언약의 정통성이 야곱에게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저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아니었다면 절대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었음을 알고 있다”며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됐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야곱”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절대 주권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허물 많고 보잘것 없고 많은 결점이 있지만 하나님은 때로 때리시고 쓰다듬으시고 치시면서도 우리를 세워가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으로 우리를 선택하셨지만, 각자 얼마나 그 앞에 순종하는가 하는 개인적인 ‘응답’의 문제가 생긴다. 이 목사는 “그런 의미에서 야곱과 바울의 삶은 참 대조적”이라며 “바울은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선택받은 그 순간부터 철저히 순종했고, 야곱은 (형을 제치고) 선택받았음에도 살고싶은 대로 살고 속고 속이는 삶을 살면서 삶을 허비하다가 겨우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마무리한 인물”이라고 전했다.
▲이재철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다. ⓒ문화원 제공 |
이어령 박사는 이에 대해 “선택받은 동생 야곱은 형의 약점을 이용해 장자권을 사는 등 기본이 안 돼 있는 사람이었고, 형 에서는 훨씬 인간미 있고 사나이다우며 멋있을 뿐 아니라 동생에게 속은 뒤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죽이겠다고 하는 효자이기도 했다”며 “이를 보면 하나님의 선택은 권선징악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종의 부조리이고, 우리 머리로는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우리를 만드신 분의 차이라는 것.
이 박사는 “여기 있는 컵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듯, 우리도 우주 전체를 기획하신 의도, 디자인하신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우리는 짐승이나 물건들과 달리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우리 자신으로부터 뛰어나가 바라볼 수 있게 됐는데, 이는 마치 컵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꼴”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이 완벽하면 괜찮을텐데,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자만이 알 수 있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자기 파산이 오거나 자기 부정을 일으키는 등 비극적인 일이 생긴다. 그는 “컵이 만들어진대로 사용되면 그걸로 만족하듯, 피조물인 우리 또한 만드신 분의 뜻대로 살면서 만족하고 있어야 하는데도 의식이 들어와 만들어진 입장에서 자신을 보게 됐고, 이것이 바로 원죄”라고 덧붙였다.
이어령 박사는 “하나님은 선택한 자를 야곱처럼 반드시 시험하셔서 세속적 가치로 보면 안 믿는 게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는데, 그래도 선택 당하는 것이 좋은가”라며 “원죄를 지은 사람은 야곱처럼 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추적하고 도망하는 고된 일생이 끝나려 할 때 화해하고 정착하고 휴식하려 하는 이러한 야곱의 일생이 현대성, 오늘날 야곱을 통해 나 자신을 느낄 수 있게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이재철 목사 “져 주시는 하나님… 하지만 심은대로 거둠을 기억” 이어령 박사 “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 죽어야 사는 역설의 존재”
세상에 존재하는 선악에 대한 예정론과 신정론 등에 대해서도 화두를 던졌다. 이재철 목사는 “다른 이의 발뒤꿈치를 잡는 사람, 남을 등쳐먹은 사람, 속이고 속는 사람인 야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도 끼치고 속이기도 한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그 분과 일대일로 대면할 수 있었다”며 “흔히 야곱과 씨름한 이를 천사라고 생각하는데, 야곱이 그 지명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브니엘)’이라고 한 걸 보면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 당신이셨다”고 서두를 열었다.
“여러분,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기나? 불가능하다”고 한 이 목사는 자신의 경험담을 펼쳤다. 아들 네 명이 어린 시절 자신과 씨름이나 레슬링을 하자고 덤볐는데, 충분히 이길 수 있지만 져 줬기 때문에 백전백패 했다는 것. 그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지 않나, 하나님도 우리에게 져 주신다”며 “그래서 부조리하고 부도덕하고 살던 이재철, 20세기의 야곱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불러 세우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심은대로 거두는 법칙(갈 6:7)”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져 주시기 때문에, 계속 내가 야곱처럼 누구를 속이고 등쳐먹고 내 마음대로 욕심대로 살아도 되는가” 하고 질문했다. 야곱이 장자권을 받고 삼촌 집으로 가서 20년간 속고 속이는 기간이 있었지만,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 20년간 피멍 든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 그는 “하나님께서 계속 져 주시고 내 편이 돼 주시지만, 바른 씨를 뿌리지 않을 때는 그 씨를 반드시 내 손으로 거두게 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 목사는 다시 한 번 야곱과 바울을 대비하면서 “우리가 선택받아 믿을 수 있게 된 바에야 바울처럼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나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인생을 더 의미있게 세우는 길”이라며 예정론에 대해 “야곱의 그런 속이는 성격 때문에 삼촌 집으로 도망가서 아내 네 명을 얻어 열두 아들을 이뤘다는 시각도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야곱이 속이는 삶을 살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서 더 아름답게 야곱의 인생이 낭비됨 없이 자신의 뜻을 펼치셨으리라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성도들이 대담을 듣고 있다. ⓒ문화원 제공 |
이어령 박사는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둘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상대적인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며 “하나님의 창조가 이렇게 절대적이냐 구조적이냐에 따라 예정설과 자유의지설이 생겨나는데, 우리는 어떤 때는 하나님이 전부 예정하시고 간섭하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경우에는 가만 놔두신다고 생각한다”고 해석했다.
이를 교통신호로 비유했다. 어떤 고등학생이 세상의 제도를 모두 부정하고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경우와, 시골에서 올라와 교통신호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빨간 불이 켜졌는데도 지나가는 경우는 다르다는 것. 그는 “처음부터 교통신호 바깥에 있으면 지킬 것도 어길 것도 없는데, 우리가 세상에 선악이 존재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라며 “하나님께서 절대자이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하나님은 악이 무엇이고 사람을 죽이는 게 무엇인지 하는 인간의 이원론적 체계를 초월하신 분”이라고 했다.
“져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라는 이야기다. 정말 상대방을 속인 적도, 속이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성인 군자는 상대방이 속일 경우 속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속이는 것 자체를 전연 상상하지 못하면 속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는 “모세가 율법을 얘기했을 때 간음이 뭔지 몰랐다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며 “간음을 전혀 할 생각이 없었는데 율법을 배우면서 간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간음을 알기 때문에 간음하지 마라는 말을 하게 된다”고 뒷받침했다.
이렇듯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육신을 입고 인간과 하나님을 이어주려 오신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그 분의 오심이 극적인 이유는 하늘과 땅 어디로도 정의되지 않는 애매함 때문”이라며 “십자가 자체가 가장 혐오스럽고 잔인한 형틀이지만 그것이 있기에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못박히지 않으면 부활이 없으며, 죽음인 동시에 생명인, 이는 악의 상징 속에 가장 성스럽고 구원이 있는 역설의 모순”이라고 전했다.
이어령 박사는 “어디까지가 자유의지이고 구속이며,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간섭이고 인간의 자유의지인가” 라며 “구조 바깥에서 보면 하나님이 절대자이시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참여하시면 하나님도 우리와 같은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가지면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 결부시키게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박사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겼다고 하셨지만, 이긴 야곱이 진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라”며 “인간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데까지 갔지만, 그런 힘으로도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의 구조적 사회 안에서 이뤄지는 힘은 별개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일곱 차례의 스토리텔링, 이어령 박사의 의도는
“성경의 과학적 오류 때문에 무신론? 저차원적”
▲이어령 박사가 이야기하고 있다. ⓒ문화원 제공 |
이어령 박사는 “지상의 논리와 하나님의 논리가 따로 떨어져 있으면 모르겠지만, 단절된 상태에서 지상에 관여할 경우 하나님은 상대적이 된다”며 “그러므로 어디까지가 신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영역인지, 어디까지가 자유의지이고 결정론적인지, 사실 지금도 저로서는 이게 풀리지 않기 때문에 스토리텔링으로밖에는 안 된다”고 밝혔다. 논리로는 되지 않지만, 이야기로는 된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스토리텔링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 구조 속에서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느냐,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며 “만화처럼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진실 구조가 다른 것으로, 이야기 흐름에서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같은 역사적 사실도 실록처럼 표현할 수도, 시로 쓸 수도, 이야기로 할 수도 있는데 창세기 이야기는 모두 스토리텔링으로 돼 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저는 성경이 무오류의 책이 아니라 오히려 오류 투성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 책이 인간이 멋대로 쓴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인간이 썼다면 이것보다 훨씬 논리적으로 잘 쓰지 않았겠나”라고 반문했다. “우리 상식대로 성경을 읽는다면 믿을 사람이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각도로 읽어보면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도 생기고 지금 이렇게 죄를 짓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 한 발짝 가까워져 가는 진전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고도 했다. 마치 야곱이 벧엘에서 사닥다리 꿈을 꿨듯, 이것이 자신은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의 신에 의해 도달하는 ‘상승적 인간’이다.
이어령 박사는 “노아의 방주를 읽으면서 포유류가 무엇을 잡아먹었나, 비가 샜나 이런 것을 따지거나, 하와에게 가죽옷 입혔다는데 쫓아내면서도 사랑하셨다고 읽어야지 왜 동물을 죽였는지 논쟁한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라며 “사르트르나 마르크스 이러한 자들도 그런 단계의 논의로 무신론이 된 것이 아니고, 그런 식의 저차원적 논의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교회의 타락이나 목회자 비리 때문에 교회를 비방하는 일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영화관에서 본 어떤 영화가 재미없으면 다음부터 영화관에 가지 않느냐”며 “부분으로 전체를 얘기해서는 안 되고, 이런 식의 비약이 계속되면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희망이 없어진다”고 했다.
이재철 목사는 강좌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은 늘 나를 보고 계시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개입하시는데, 민감하게 깨어있다면 때로 내 인생의 다리를 절게 하셔도 그게 나를 위한 하나님의 복임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결과적으로 우리 인생이 이 시대를 위한 창세기로 엮일 수 있다”며 “그동안 (이어령) 선생님께서 성서 스토리텔링을 통해 구조적 관점으로 텍스트를 바르고 깊이있게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특히 철저하게 부정할 때 그 부정의 끝에서 전적인 신뢰의 하나님을 만난다고 말씀하셨는데, 시간나실 때 그 말씀들을 한 번씩 되새겨 보신다면 여러분들의 신앙 과정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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