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기독일보에서 매주 몇몇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최근 설교문을 요약 정리해서 소개하는 <주일강단>을 시작합니다.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눈물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목회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이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은혜와 소망을 전해줄 것을 믿습니다

아틀란타새교회 담임 심수영 목사
본문 : 시42:1~11 “낙심 가운데 찬양”


20세기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가 그의 대표적인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서 그는 경험이 많고 노화한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이자 풋내기 악마인 웜우드에게 인간을 유혹하는 방법에 관한 서른하나의 편지를 기록합니다. 가상적인 이야기 입니다. 편지에서 풋내기 조카 웜우드는 낙심에 빠지게 한 크리스천으로 말미암아 기뻐합니다. 그 낙심 가운데 무능력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기쁨과 성취감에 있을 때 스크루테이프는 속단 하지 말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들을 연단하기 위해 오히려 다른 사람 보다 크고 더 깊은 낙심에 빠지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을 냅니다. ‘절망가운데 소망이 없어 보이고 순종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마치 하나님이 멀리 사라진 것처럼 자신을 버린 것같이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순종할 때 우리의 존재는 위험해 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낙심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누구나 다 낙심에 빠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낙심 되는 일로 오히려 내가 더 성숙하고 강해 질 것이냐 아니면 낙심에 빠져 무기력하게 되고 포기 하게 되고 또한 인생을 한탄하는 가운데 소망을 잃고 우울증에 빠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삶 속에 낙심 되는 일 가운데 우울증에 빠져서 고민과 갈등 가운데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시편 기자도 한 동안 그는 우울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낙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향하여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라고 했습니다. 사실 불안해하고 낙심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던 것은 사실 입니다. 오늘 제목을 보면 고라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라고 쓰여 있습니다. 마스길 이라는 뜻은 가르친다라는 뜻입니다. 노래를 통해 인생의 대한 깨달음을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의 저자는 대부분의 신약 학자들이 이야기 하듯이 다윗의 시편이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시편 42편이 쓰여지게 된 배경은 사무엘하 15장 16절에 나오는 이야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 압살롬에게 그가 쓴 뿌리와 보복의 앙심을 품고 아버지를 반격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갑니다. 한 나라의 왕이 하루 아침에 쫓김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조롱을 당합니다. 전전긍긍하며 자기의 목숨 하나 붙어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제까지 삶 속에서 지금의 삶의 현실 속에서 어떤 낙심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낙심 가운데 일어설 수 있습니까? 낙심되는 일을 통하여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낙심 되는 일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까? 낙심은 하나님 앞에 저와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낙심은 실망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망스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 온 여러분의 삶 속에 실망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다윗의 실망은 사람들과 환경에 대한 실망이었습니다. 9절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슬프게 다니는 한 나라의 왕이 궁전에 있지 않고 슬프게 다니는 상황과 환경으로 낙심합니다. 오늘도 그런 환경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때로는 가난과 때로는 외로움과 우리가 처해져 있는 환경과 사람을 통해서 낙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머리를 둘 곳도 없는 힘든 상황을 가져 오게 된 것은 자기의 아들 압살롬 때문이었습니다. 4절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우리 마음이 언제 상합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실망합니다. 마음의 상처와 쓴 뿌리는 가까운 사람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아들과 남편이, 아내가 부모와 형제들로 옵니다. 이러한 상황이 오게 되는 것은 인간이 약하고 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악하다는 것은 인간은 자아 중심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내가 놓인 상황 때문에 실망하지만 가장 큰 실망은 내 자신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흔들리고 불안해 하는 자신을 보고 낙심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 다는 것은 이 세상의 문제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16세기 종교 개혁가 마티 루터는 심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고 그 고통 가운데 위로하기 위해 방 천장에 성경 구절을 써 놓고 위로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누워서 잠을 못 이룰 때 마다 성경 구절을 읽고 암송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 악귀가 떠나는 용사였습니다. 믿음의 용사에게도 실망되고 낙심 되는 일이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남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더더욱 자기 자신을 정죄해서도 안됩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고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이 현실 가운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해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믿음의 훌륭한 사람만 기록해 놓았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낙심 되는 때에 겸손하고 두번째 낙심 가운데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입니다. 사막이나 추운 겨울에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생존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하는 3가지 있습니다. 3가지의 법칙은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서 산소가 3분 없으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막이나 추운 겨울에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피신처를 3시간 내에 찾지 못하면 죽는 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일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면 죽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3주간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호흡, 은신처, 음식, 물 외에 우리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마실 것이 풍요로워도 먹을 것이 많아도 세상의 부요함을 가져도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낙심을 경험하면서 바라 볼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은 하루아침에 왕의 신분에서 인생의 밑 바닥을 치면서 가장 신뢰했던 자기의 사람들, 자기의 자식조차 자기를 대적할 때 다윗 왕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주를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생의 낙심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깨달아야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대가를 지불 하더라도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 없이 이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해결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은 낙심 되는 삶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옳고 그름이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절대적인 하나님이 옳다고 말씀 하실 때 옳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육신의 인생의 연약함을 발견할 때 마다 진정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인생에 낙심이 일어날 때마다 겸손하심 가운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시기 원합니다. 낙심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는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낙심 가운데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외로울 때 친구가 되시는 연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여러분 삶의 낙심거리가 크면 클수록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커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습니까? 그만큼 기도 응답의 역사가 클 것입니다.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한 다윗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진심으로 우러나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11절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지식적인 감정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찬양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고백입니다.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또 하나의 고백은 세상을 향한 간증을 통한 찬양입니다. 낙심 가운데 경험한 은혜가 너무나 커서 시편의 시를 쓴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이 만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세상을 향한 간증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낙심과 문제가 그것을 체험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체험을 통하여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낙심 가운데 찬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망과 낙심 가운데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의 기쁨은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있는 주님으로 행복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그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가까이 나오시길 초대합니다.

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 담임 정인수 목사
본문 : 삼상30:1~6, 고전10:13 “시험인가? 승리인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고질적인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인간에게 찾아오는 유혹과 시험입니다. 성경에 보면 시험과 유혹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찾아와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단에 드리라는 하나님의 시험에 대처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요셉이 주인 여자로부터 받았던 치열한 유혹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사무엘서 보면 죽음이 다윗에게 찾아왔던 무서운 시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음서도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았던 시험이 나옵니다. 이것은 적어도 우리의 인생에 인간의 현실에 시험과 유혹이 끊임없이 침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후 다양한 영적 장애물에 직면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영적 장애물이 시험과 유혹입니다. 제가 나이가 들면서 제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보는 시간을 많이 갖습니다. 제 삶에 시험과 유혹이 많이 찾아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시험과 유혹의 많은 과정 속에서 발견한 진리를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가 신앙이 성숙하든지 우리가 신앙의 걸음마 단계에 있건 상관없이 시험은 찾아 옵니다.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직분여하에 관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시험과 유혹은 계속 오는 것입니다.

인생과 목회의 길을 걸어가면서 다양한 시험과 유혹으로 때때로 힘이 들었습니다. 제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그 때 시험과 유혹이 없었다면 연단되는 내 인생의 행로가 없었다면 오늘날 내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해서 시험이 다가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집에 가는 것을 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자기가 자주 가던 술집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오늘 내가 그 술집을 지날 때 주차할 장소가 없으면 그냥 지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지나는 길에 술집 주차장을 힐끗 보았습니다. 주차할 장소가 없자 뒷길로 주차할 곳을 찾았습니다. 이미 유혹에 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탐욕과 욕망이 많이 남아 있을 때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탐욕은 마치 우리 머리 위를 날아 다니는 새와 같습니다. 마틴 루터는 “우리가 머리 위에 나는 새를 막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새가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스쳐가는 수 많은 탐욕과 유혹 그리고 정욕의 생각을 우리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생각을 지속적으로 품고 살면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 그것으로 큰 죄가 싹트고 자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이 찾아 올 때 마다 단호히 ‘NO’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 말아야 하는 장소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은 유혹하는 주인의 여자로부터 그 자리를 신속히 피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입니다.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면의 유혹의 요소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시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회개의 과정이 없이는 속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리더들도 속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나는 죽노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날마다 회개와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속물에서 벗어나 유혹의 여지들을 사전에 차단하는 지혜로운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째는 인간은 시험을 받더라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인간은 변덕이 심하고 변화가 심해도 하나님은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살전5장 24절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한 자의 시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세번째 진리는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험을 받을 때 우리에게 도움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당할 때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고전10장 13절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고 또한 우리가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가지로 우리에게 피할 길을 내십니다. 첫째로 초자연적으로 우리의 시험에 개입하셔서 시험의 강도를 줄여 주십니다. 우리 심령에 놀라운 영적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두번째 우리가 분투하는 동안 끝까지 시험과 싸우도록 힘을 더하십니다. 세번째 하나님은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은밀하게 그 시험을 이기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말씀 가운데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시험에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시험에 대해서 두 가지 내용이 다른 단어가 교체되어 사용 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시험은 영어로 testing이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역경이라는 말입니다. 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세워가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 99세에 가진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무서운 시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에 얻은 이삭을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 놓을 때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이겨야 다음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가난과 관계의 어려움 통해서 우리를 의도적으로 시험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서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에 이겼을 때 우리를 축복하시고 인생의 다음 무대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두번째 성경에 시험은 temptation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단이 악한 의도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사단이 가져다 주는 의도적인 시험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시험 또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성경에 이 시험에 있어서 가장 많은 승리를 얻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자기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했습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쉽게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무엘을 통해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10년이 지나도 왕이 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피신과 곤경과 박해 속에서 훈련을 받습니다. 다윗과 대조적인 인물은 사울입니다. 사울은 쉽게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맨 처음 전쟁에서 쉽게 대승을 얻고 쉽게 백성에게서 신임을 얻고 교만이 싹틉니다. 마음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울은 쉽게 시험에 쓰러지고 맙니다. 치열한 시험을 통과한 사람만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사울은 사람들의 칭찬에 아주 민감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영광만 도모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쉽게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우매함에 빠집니다. 반면에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임에도 끊임없는 시련과 연단을 받습니다. 다윗은 혹독한 배신과 죽음과 공포의 위협을 받습니다. 광야로 밤새 쫓기고 절박한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다윗이 놓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다윗이 그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고난이 와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계속해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했습니다. 용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과할 때 마다 그를 담대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삼상 30장은 다윗에게 몰아친 가장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다윗이 부하들과 함께 블레셋 땅을 떠나서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아말렉 족속들이 들어와 초토화 시켰습니다. 다윗에게 말할 수 없는 시련이 다가 온 것입니다. 이 순간 다윗이 겪었던 가장 큰 시험은 부하들의 배신이었습니다. 30장 6절 말씀에 아말렉에 가족이 붙잡힌 것을 알게 된 부하가 돌을 들어 다윗을 치려고 합니다. 그들이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은 그 배신의 커다란 시험에 그는 절망하지 않고 부하들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외칩니다. ‘다시 모이라 우리 아내와 자녀들을 찾으러 나서자’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하들의 마음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하들의 마음을 다스려 주셔서 부하들이 다시 용기를 얻고 다시 나아가서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힘을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가족을 찾고 승리하게 됩니다. 다윗은 가장 어려운 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시험을 극복합니다. 가장 중요한 리더십은 위기를 극복하는 리더십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위기가 왔을 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입니다. 우리는 위기를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위기 속에서 별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도록 지키십니다. 오늘 다윗은 놀라운 리더십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체험하게 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극복하는 길은 첫째로 사단이 우리를 쓰러뜨리는 상황을 잘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입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다닌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나의 취약점은 어디인가? 나는 어떤 장소에서 시험을 많이 받는가? 돈인가? 나쁜 습관인가? 성적인 유혹인가? 나의 감정 상태가 어떤 때에 시험이 많이 찾아 오는가? 그러므로 성경은 시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거기에 맞는 적절한 대책을 세우고 자신이 연약해 지는 자리는 가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마귀로 틈 타지 못하게 하라’ 라고 합니다. 두번째 시험이 올 때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시편 50편 15절입니다. 시험이 닥칠 때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다윗과 에스더, 다니엘,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내사’ 라고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믿음의 주를 놓치지 않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시편 50편 15절에 ‘환란날에 너희는 하나님을 부르짖으라’ 히브리서4장 15절에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아픔과 공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 모든 인간이 겪는 모든 시험을 체휼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란의 시간, 위기의 시간이 오면 우리는 멈추어 서서 한번 우리 인생을 점검해야 합니다. 믿음과 신앙, 성령의 사람과 연대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영광 돌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시험에 빠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긍휼하십니다. 우리가 몇백번, 몇천번 하나님께 나아가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훗날 우리 인생을 돌이켜 볼 때 바로 그 시험이 하나님이 나로 하나님의 형상을 빚어가게 하는 축복의 시간이었음을 알고 오히려 그 시험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내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이겨 나아가길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험을 이김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소망교회 담임 박대웅 목사
본문: 롬5:12~21 “은혜의 왕노릇1”


오늘 본문의 주제는 ‘은혜의 왕노릇’입니다. 왕노릇이라는 헬라어의 뜻은 강력한 영향력이나 통치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통치와 영향력을 미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시작이 되었고 지금도 이 땅에 확장 되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눅17장 21절에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우리 자신이 하나님 은혜의 통치, 하나님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으면 우리가 곧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왕노릇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제거하시고 부활을 통해서 은혜의 왕노릇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부활의 은혜를 영접하는 자들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담 자신이 왕권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 받은 대행권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등한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과실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였습니다. 아담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그 왕노릇을 거부한 대가로 이제 죄악의 왕노릇 아래 사망의 왕노릇 아래 노예로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만 아담 한 사람의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운명을 결정 짓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담의 실수와 실패를 초월하는 크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두번째 아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와 사망의 왕노릇을 제거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 15장 55절에 죄와 사망의 권세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또한 승리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이 요절 말씀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더욱 넘치게 왕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의 비해서 은혜의 왕 노릇이 넘치게 역사한다는 말씀입니다. 인류 인간들의 죄악의 역사 그 위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의 역사가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다고 강조합니다. 왜 강조할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델이고 다윗은 하나님 나라 통치의 모델인 것입니다. 나라를 국가를 구성하는 3가지 요소는 백성과 통치와 영토입니다. 하나님께서 넘치는 은혜로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시는데 아브라함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가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이고 다윗 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통치 하시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것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모델이 보이고 하나님 나라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는 것입니다.

족보에는 훌륭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족보에는 심지어 창녀들도 들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도 믿음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못난 인간들을 거룩한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하게 기록하였을까요? 이것은 왕의 족보에 올라간다고 해서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왕노릇하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죄인도 영광스럽게 왕의 족보에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이름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접하기만 하면 이 왕의 족보, 생명책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의를 세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넘치는 왕노릇으로 말미암아 나를 영광스럽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동안 여호와의 열심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여호와의 열심은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속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왕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바로 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의 통치를 이 세상에 행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두 달의 한 번식 성찬식을 통해서 주님의 살과 피에 연합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로마서 6장 4절, 5절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합과 함께, 합하다 라는 것입니다. 이 뜻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종전에 인간과 전혀 다른 DNA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영적인 행동은 마치 영적인 복제가 이루어지는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DNA가 우리 안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DNA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과 생명, 왕권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영적인 축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는 의미는 우리는 병들고 깨질 수 밖에 없는 질그릇입니다. 그런 질그릇 속에 그 예수님의 DNA, 그 보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고, 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사도 바울은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이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의미는 예수를 믿기 전에 나는 사라졌고, 예수와 함께 그와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 작은 예수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은혜로 이세상에 대해 왕노릇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잃어버린 통치권을 다시 돌려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받은 통치권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를 우리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5절~7절입니다. ‘함께’ 라는 단어를 세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우리를 일으키시고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 앉혀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안에 가지고 있는 예수님과 같은 위대한 통치권, 왕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만 살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왕권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모르는 앞으로 오는 여러 세대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은혜로 세우신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 세상에서 엄청난 영향력과 통치력을 발휘하도록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왕권을 위임해주셨습니다. 그 왕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왕권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마귀의 권세에 두려워하게 되고 세상의 권세에 종노릇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4장 21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인간 대통령보다 더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재창조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주신 통치권입니다.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마귀에게 여전히 조롱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죄사함과 하늘나라 가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왕으로 권세를 나타내도록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면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행함 있는 믿음을 통하여 이 세상은 하나님의 놀라운 통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왕노릇하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권세가 나의 권세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위임해주신 권세입니다. 여러분 집에 전기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기를 믿음으로 플러그를 꽂아서 사용할 때 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력이 들어와도 믿지 못하고 사용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능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권세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면 여러분 통해서 나타나는 능력도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믿음은 파이프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내가 큰 파이프로 그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유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가슴 떨리는 흥분되는 내가 왕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인정에 대해서 마치 100불짜리 복권에 당첨 된 것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아무런 흥분이 없을까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바로 마귀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위임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용하기 시작하게 되면 아무리 마귀가 불화살을 쏘아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두려움, 질병이 다가와도 예수의 이름으로 주신 권세로 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마귀가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안의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의 생명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왕으로써 통치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성화요, 선교입니다. 은혜가 더욱 넘치고 왕노릇 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만큼 위대한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통해서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위임하신 놀라운 능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그 사실을 믿으시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몸이 연약한 자,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 , 죽음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서 여러분의 왕권을 사용하시고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베드로를 향해서 구걸을 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 분의 권세로 명령하노니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자기를 통하여 역사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확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한 것입니다. 그 명령으로 나면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입니다. 능력이 모자라서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는 수천만 볼트의 하나님의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안의 믿음의 파이프를 강하게 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왕권을 위임하신 뜻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환경과 세상의 권세에 지배 당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이 환경을 지배하고 사람을 지배하고 만물을 지배하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복음 스타일, 사랑의 스타일이 되어서 이 세상을 변화 시키는 주님의 위대한 전도자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복음 스타일이 나를 얼마나 흥분하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보여 준다면 그 복음 안에 춤춘다면 이 세상의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여러분이 추는 영적인 춤을 따라 추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 시대를 향하여 일어서기 원합니다. 이 시대를 향하여 이 복음에 흥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은혜의 왕노릇 안에 나오고 싶다라는 열망을 갖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