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양일 목사입니다. 지난 7일 미국 워싱턴에서 서울로 급히 달려와서 병석에 있던 저의 부친을 상면하였고, 기도하며 찬송하던 중, 8월 10일 오후 4시 7분, 중앙보훈병원에서 93세의 연세로 부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환하고 인자한 모습을 남기고 숨을 거두신 부친을 생각하며 이글을 올립니다.


병세 악화로 입원하신 부친의 병원 주치의로부터 부친의 임종이 2-3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연락 받았습니다. 마음이 불안하여 전전긍긍하다가 일주일을 앞당겨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한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것은 의식이 있는 아버지 곁에서 찬송과 기도를 드리며, 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들을 함께 보내며 아들의 도리를 조금이나마 이행하려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였습니다.

강서구 둔촌동에 위치한 중앙보훈병원을 찾아 병상의 부친을 문후 드릴때, 부친은 3일째 인사불성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10여분 기도드리자 부친의 몸으로부터 약한 미동을 느꼈음으로, 다시 간절한 마음으로 부친의 손과 머리를 안수하며 기도드렸습니다. 3일 동안 의식이 없었던 부친께서 의식을 회복하시고 두차례 머리를 흔들며 응대를 하였고 이어서 눈도 뜨셨고 깜빡거리시며 자기의 의사를 표시하셨습니다. 큰 아들인 나와의 만남을 기뻐하시며 안도하시는 부친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기뻤습니다. 만 이틀동안 부친의 병상 곁에서 기도하며 찬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찬의 생명이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순간들을 장남과 함께 할수 있도록 섭리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28년간 목회사역을 감당하느라 장남의 도리를 하지못해 항상 죄송스러웠던 저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시고 치유해 주시며 은혜의 시간들을 허락하신 주님앞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는 8월 10일 금요일 오후 4시 7분 아들 목사의 기도와 찬송중에 숨을 거두시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8월 13일, 대전에 소재한 국립묘지인 현충원 장군묘역에서 안장식을 가졌습니다. 국가의 배려로 장례행렬을 선도할 헌병 경호차와 조문객들이 타도록 45인승 버스를 제공하고 화환을 싣는 화물차등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헌병 경호차를 선두로 대전 현충원에 도착하였을 때 시간은 오전 10시였습니다. 오전 중에 계속 내리던 비가 그쳤고, 헌병차와 링컨운구차와 조문객을 실은 버스가 다시 장군묘역으로 출발하였고 5분후에 장군묘역에 도착하여 모두 하차를 하고 상주를 비롯한 조문객들이 안장할 장군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바람이 없는 적당한 온도의 날씨로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짐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이어서 안장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군악대와 의장대와 안장식을 돕는 군인들과 국가를 대표한 두 분 현역 장군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봉안관의 사회에 따라 조문하는 헌화와 의장대의 9발의 조포가 산곡을 울리고 군악대의 조곡이 계룡산 기슭에 울려 퍼졌습니다. 상주인 저를 비롯해 헌화와 묵렴의 시간들이 지나고 고인의 약력과 조사와 기도를 마친후, 취토의 순서를 마지막으로 하관하여 안장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천의 날씨를 그치게 하시고 봉안식을 잘 거행토록 안배하여 주셨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재차 감사드렸습니다.


<고인 약력>
저희 부친 김인철 님은 육사 2기로 1946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고, 6.25 동란때, 최전방의 연대장(대령)으로 판치폴 전투를 위시하여 수많은 격전장에서 승전고를 올리므로, 수많은 무공훈장을 국가로부터 수여 받은 바 있습니다. 그후, 장군으로 숭진하셨고 1969년에 전역하셨습니다. 고향은 함경남도로 갑산군 동인면에서 출생하셨고 갑산농림학교(농고) 1기를 졸업하셨고, 바로 갑산농고의 선생님으로 임직되어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1943년 같은 학교 선생님이셨던 저희 어머님 김순옥과 결혼하셨고, 해방후 이남으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두 분, 슬하에 3남 5녀를 두셨습니다. 그중 장남을 미국 워싱턴 지역에서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