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할린 한인을 대량학살했을 것이라는 러시아 정부의 보고서가 입수돼 파장이 예상된다.


그동안 밝혀진 일본의 사할린 한인 학살은 수십명 정도의 사례뿐이어서 이번 보고서 공개를 계기로 당시 일본의 만행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전망이다. 정부의 관련 위원회는 진상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대량학살의 증거와 함께 일제에 의해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1만2천여명의 명부도 공개되면서 피해자와 유족들의 보상신청이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대일 보상 소송과 유엔 진상조사 등으로 파장은 확산될 수 있다.


◇日 사할린 한인 대량학살 추정 = 국가기록원이 러시아 사할린 국립문서보존소에서 입수해 14일 공개한 1946년 러시아 정부의 인구 보고서 초안에는 사할린 에스토루 지역의 일본군에 의한 한인 대량학살 가능성이 언급돼 있다.


보고서 초안은 한 장짜리 질 나쁜 시험지로, 1945년 당시 현장을 누빈 러시아 민정국 인구조사담당자가 직접 손으로 썼다.


이 담당자는 보고서 초안에서 전쟁 전에는 사할린 에스토루 지역에 한인이 1만229명 살았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는 5천332명으로 인구가 감소한 이유로 피난이나 귀환에 따른 인구이동과 함께 '일본군국주의자의 한
인 살해'를 꼽았다.


정확히 몇 명이 언제 어떻게 살해됐는지는 문서에 나와있지 않다.


기록원 김갑섭 기록관리부장은 "사할린 지역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일본군의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을 많이 해왔는데, 그동안에는 근거가 없었다"면서 "일본군이 사할린에서 한인을 학살했다는 근거가 외국 정부의 보고서에 적시됐다는 점이 의미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나온 근거를 토대로 추가자료가 있는지 조사해야 할 것"이라며 "학살된 사람이 몇명인지는 알수 없지만, 수십명대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국외대 방일권 교수는 "그동안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나 친척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증언 등 광범위한 민간인 살해 이야기가 떠돌았는데 기록이 없었다"며 "그러나 1945년 당시 현장을 누빈 러시아 정부 민정국 담당자가 일본 군국주의자의 사할린 한인 살해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민간인 살해라는 비인도적인 처사가 광범위하게 이뤄졌다는 증거가 나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방 교수는 "일본군의 한인 대량학살에 대해 더 확정적으로 이야기하려면 재판이나 조사기록 등을 추가로 확보해야 할 것"이라며 "학살관련 기록은 남아있기가 어려운데, 정보계통이나 군계통에 관련기록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의 사할린 한인 학살은 1945년 8월 21~23일 일본 헌병과 경찰이 사할린 가미시스카에서 남성 19명을, 미즈호에서 임신부와 어린아이를 포함해 27명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사례 정도가 있다.


가미시스카 사건 당시 일본 경찰은 한인들을 경찰서에서 총살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경찰서에 벤젠을 뿌리고 불을 지른 뒤 퇴각했다가 다음날 아침 현장으로 돌아와 타지 않은 시체를 찾아 석탄더미 위에 던져 완전히 태우는 등 잔학한 면모를 보였다. 이는 소련군과 KGB 수사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이 두 사례에 대한 진상조사를 마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국가기록원과 긴밀히 협조해 새롭게 드러난 에스토루 지역과 관련한 진상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보상신청ㆍ대일소송 급물살 타나 = 일본군의 사할린 한인 대량학살 근거와 함께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한인 1만2천여명의 명부와 서신, 가족관계 관련 기록이 공개됨에 따라 관련 보상신청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확보된 사할린 강제동원 관련 명부는 1950년대 일본에서 작성한 일본 귀환자 명부 2권의 778명 , 1960~1970년대 일본 사할린귀환재일한국인회의 사할린 귀환희망자 조사명부 4권의 1만2천600여명, 1980년대 일본과 한국에서의 귀환운동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 14권 6천여명이다.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1만1천211명이다.


국가기록원은 이 밖에 러시아에서 사할린 한인들의 적립통장을 조사한 보고서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된 조선인 총수를 조사한 보고서, 해방후 사할린 한인사회 재편 관련 각종 보고서도 공개했다.


이중 1급 비밀문서로 분류된 1949년 러시아 문서에 따르면 소련 정부는 해방직후 쿠릴지역 한인들을 사할린으로 이주시켜 일괄통제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1952년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내에서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문제를 언급하지 말라는 보도지침도 만들어 시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할린 한인들은 이런 통제정책에도 좌절하지 않고 최초의 한글신문인 '조선노동자'를 발간하고, 조선인 학교를 건설하는 등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기록원은 설명했다.


방 교수는 "사할린 한인들은 잃어버린 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상신청이 급물살을 타기도 하겠지만 당시 강제징용자 개인에 대한 정보가 확보돼 사할린에서 사망한 선조를 찾는 유족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보상신청에 더해 유엔차원의 진상조사 요구와 대일 보상청구로까지 파장은 확대될 수 있다고 관련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지원위원회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을 했던 일본기업들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앞서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은 이미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발생한 일본의 사할린 학살사건 2건에 대해 유엔이 진상조사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낸 바 있다.


결의안은 사할린 한인 학살사건에 대한 일본인의 처벌과 피해보상을 위한 유엔 차원의 진상조사를 촉구하고, 유엔 인권위원회가 관련 당사국들과의 외교협상 및 조사를 통해 일본이 거부한 보상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