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최대 스포츠 축제인 2012 제30회 런던하계올림픽이 지난 7월 28일 영국 런던 북동부 리밸리(Lea Valley) 지역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가 이제 마무리됐다. 전 세계 70억 인류의 눈과 귀가 런던으로 향하는 인류의 제전이다. ‘경이로운 섬(Isles of Wonder)’이라는 주제로 열린 개막식은 대니 보일 감독이 맡아 산업화의 진통에서 회복해 미래를 바라보는 농촌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는 영국 왕실 행사에서 볼 수 있는 장엄한 의식(儀式)에서부터 일요일 오후에 많은 이가 즐기는 크리켓(cricket) 게임에 이르기까지 ‘영국’ 하면 떠오르는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이 장면은 전 세계 많은 이는 현대와 전통의 영국을 정의하는 문화유산, 다양성, 에너지, 그리고 창의성을 보여 주었다. 개막식 콘셉트는 셰익스피어의 명작 ‘템페스트’에서 영감을 받았고,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써내려 간 ‘푸르고 기쁜 잉글랜드의 초원’의 목가적인 모습이었다. 여기에 나타난 화려한 복고주의와 낭만주의와 이상주의는 인류 화합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진행과정에서 지나친 메달 경쟁으로 인한 인종적 편견(偏見), 견제(牽制), 오심(誤審)과 국가적 이해(利害)관계로 런던올림픽은 그 정신이 훼손되는 얼룩을 남겼고 8월 12일 폐막했다.

우리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극동의 분단된 주변국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비로소 그 존재를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64년 전 1948년에 열린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 2개를 땄던 한국은 그동안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괄목하게 성장하였다. 한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 12개(종합 성적 4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 12개(7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 13개(7위)를 딴 데 이어,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는 금메달 13개(은 8, 금7)로 종합 성적 5위를 마크했다. 경기를 마치고 폐막에 이른, 인류의 축제인 올림픽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을 적어 본다.

1. 유사종교적 축제

첫째, 인류의 제전인 올림픽은 유사종교(類似宗敎)축제가 되어 버렸다. 유사종교 의식(儀式)이란 이러한 세계적 집단적인 의식(儀式)을 통해서 인간이 감정적으로 열광하면서 성취의 환희를 느끼는 것을 말한다. 올림픽이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게 되면서 이제 이 행사는 일종의 신화적 혹은 유사 종교적 현상으로 진화하고 있다.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 있고, 간접적으로는 미디어를 통해 전 지구촌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단적인 열광의 분위기가 연출된다. 결정의 순간(우사인 볼트의 100미터 결승 1위, 축구 동메달전에서 맞수 일본에 대한 한국의 2:0 승리 등)에는 선수나 관객들이나 시청자들이 일제히 열광 속에 빠진다. 그리하여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는 순간 선수(예: 양학선 선수가 도마에서 3바퀴, 즉 1080도를 비튼 뒤 착지하는 신기술 성공)는 우상이 되고 관객들, 특히 팬들은 열광하면서 순간적인 황홀경에 빠진다. 평범한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행위를 선보이는 선수들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영웅(미국의 수영 펠프스 등)이 되고, 관중의 환호는 마치 신앙심 넘치는 신자들의 집단 기도를 연상시킨다. 선수나 펜들이나 금메달 획득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것을 이루었을 때는 선수, 자국민 시청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열광하여 철야를 하면서 응원을 하면서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은 광신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은메달이나 동메달은 값어치만큼 취급하지 않는다.

독일계 미국의 종교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 그리고 필자의 스승이었던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칼 하인츠 라쵸(Carl Heinz Ratchow)는 이러한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인류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스포츠를 “유사종교의식”(Quasi-religiose Zeremonie)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종교 자체가 점차 약화되는 서구 사회에서는 스포츠가 일종의 종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세속적인 행사인 올림픽이 지금 유사종교적인 축제로 변모하고 있다.

2. 인류진보주의 상징

둘째, 올림픽은 인류 진보주의의 상징이 되고 있다. 쿠베르탱 남작이 근대 올림픽을 구상하던 19세기 후반에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향한 사회적 노력을 기울여서, 인류의 화합과 평화를 위하여 올림픽은 1896년에 시작되었다. 올림픽 정신은 민주주의와 엘리트주의가 결합되어 빚은 순수한 이상(理想)이었다. 특히나 올림픽의 입장식 개막행사는 고상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온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엄청난 능력과 자원을 결집한 현대 사회의 최대 이벤트로 자리잡았다.

성(性, gender)과 인종과 신분 차별이 배제된 근대 올림픽은 여성과 노예가 배제된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과 큰 차이가 있다. 인종, 나라, 남녀 성별 차별없이 모든 참가자에게 똑같은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올림픽은 규범을 지키는 자세, 공정한 경쟁, 상대방 존중, 자기 극복을 배우는 장이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은 여성과 노예를 배제하였으나 근대 올림픽은 여성 및 모든 신분의 인간을 참여시켰다. 이번 2012년 런던 올림픽은 모든 나라에서 여성들이 대표로 참가한 최초의 대회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서 런던의 취약지역이었던 동북부의 리 벨리(Lea Valley) 지역은 폐건물들을 철거하고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여 새로운 택지와 문화지역으로 탈바꿈하였다. 한국의 강원도 평창도 3차례 유치 신청하여서 1918년 동계올림픽 개최권을 얻었고, 발전이 취약한 강원도 지역이 휴양도시로서의 발전되는 활성화 계기를 마련했다.

올림픽은 인류의 화합과 평화의 장이다. 이데올로기의 논쟁이 없고, 동서, 남북의 차이, 부와 빈(貧)의 차이가 없는 인류 축제의 장이다. 핵 개발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는 북한도 참가하여 역도, 유도 등에서 금메달 4개 동메달 2개를 따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남녀의 차이, 인종의 차이를 극복하고 인류가 한 자리에 모였다. 이는 바람직한 것이다.

쿠베르탱은 “승리보다 참가에 올림픽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올림픽이 여전히 100년 전의 순진한 이상주의(理想主義)를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어느덧 돈과 국가권력, 과도한 민족주의적 경쟁으로 말미암아 기묘하게 국가의 부와 힘을 경쟁하는 상업주의적 축제로 변질되고 있다. 올림픽 정신이 이번 런던 대회에서도 상업주의와 메달 경쟁에 실종되는 모습이 있다. 유럽과 미국 등 서구인들의 주종목인 수영, 펜싱 등에 자신들이 장악한 전통 종목을 잠식해 들어오는 신흥 강국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하였다. 강대국인 중국이나 일본 선수에 대한 오심(誤審)은 없고 신흥 강국인 한국 선수에 대한 오심(誤審)이 집중되었다. 유력한 우승후보인 수영의 박태환에 대한 심판의 판정번복 해프닝, 유도의 조준호 선수, 펜싱의 아폐 종목 신아람 선수에 대한 오판 등은,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른 한국 선수들을 스포츠 외교와 국력이 뒷받침하지 못했다. 이러한 오판과 판정 번복 등으로 올림픽 정신이 훼손되는 흠이 드러났다.

중국, 한국, 태국의 배트민턴 선수들이 결선 토너먼트에 유리한 대진(對陣)에 들어가기 위해 고의(故意)로 져주는 등 메달 획득에만 매달리고 진정한 스포츠 정신과 도덕성이 실종한 추태가 연출되었다. 언론과 한국인들도 선수들의 기량과 열정을 다하는 정신보다는 금메달 딴 선수에게만 정신이 쏠려있고 은메달이나 동메달 또는 메달을 따지는 못했으나 열심히 노력한 선수들에 대한 칭찬과 관심에는 아주 인색하였다. 올림픽 위원회는 원래의 스포츠정신과 올림픽정신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3. 세계의 어두운 면 잊지 말아야

셋째, 인류는 축제 가운데서도 세계의 어두운 면과 인간의 한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란 인류가 원하는 바대로 낙관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19세기 낙관주의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어서 1939년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의 이상향주의에 대한 꿈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입증한 사건이었다. 오늘날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는 낙관주의보다는 비관주의가 더 큰 추종자를 얻고 있다. 미국의 금융가 1%의 탐욕으로 인한 99% 소시민들의 경제적인 피폐, 남유럽(그리스, 포르투칼,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국가부채로 인한 파산 위험성 등으로 지구촌은 경제적인 공황(恐慌)을 겪고 있다. 지구촌 각 지역에서 재해와 재난들이 쉴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 중북부 소위 콘벨트(cornbelt)지역에서 심한 가뭄이 진행되어 세계의 곡물 수급에 큰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태풍의 영향으로 11일째 폭우가 쏟아져 마닐라의 80%가 침수되어 도시기능이 마비되어 2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한반도의 북한에서도 2천4백만의 북한 주민들은 일인 선군독재와 그 추종자들 그룹의 강압 통치 아래서 인권을 상실하고 굶주림과 감시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장기 독재에 대하여 무장 봉기한 시민군과 정부군의 무차별적 내전이 격화되고 있다. 시리아 정부군의 전투기, 탱크, 중화기 부대를 포함한 대규모 병력이 인구 250만의 시리아 최대 도시며 상업중심지인 알레포에 집결하고 있다. “시리아 정권이 그동안 별러온 시민 학살을 자행할지 모른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하면서 인접국으로 탈출한 시리아 난민이 12만명에 이른다고 유엔난민기구(UNHCR)가 25일 밝혔다. 이란에서는 6.0 규모의 강진이 일어나 최소 250명이 사망하고 2천명의 부상자들이 발생하였다. 아프리카 신흥국가에서는 내전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류 진보의 이상주의에 심취한 나머지 역사의 갈등과 자연에서 일어나는 각종 재해에 무기력하게 내던져진 인간의 한계를 잊어서는 안된다.

4. 인류 축제의 신학적 두 모습

넷째, 제전(祭典)으로서의 인류의 축제는 신학적으로 두 가지 모습을 갖는다. 그것은 종말론적 의미로서 부정적이며 긍정적인 측면이다. 부정적 측면은 인간의 신격화 시도이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인류가 시날광야에서 거대한 탑을 쌓으면서 인간의 이름을 내고자 하였다.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그리고 하늘에까지 오르자고 하였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의 신격화 시도를 무산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언어를 혼란시켜서 인간들을 지구상으로 흩으셨다. 바벨탑 사건은 역사적으로 인간이 집단적으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시도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유사종교적인 제전이 되어버린 올림픽에는 인간 스스로 신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인간의 이상주의적 모습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하며, 인간의 흙이요 먼지와 안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겸허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아담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3: 19).

긍정적 측면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실현될 인류의 화합이다. 요한계시록의 22장에는 새로운 성 예루살렘에 지구촌 여러 나라 인종들이 그들의 영광을 지니고 입성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계 21:24)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6). 새로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열방의 사람들은 여러나라에서 온 신자들을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예루살렘에 각자 자기 민족의 영광(의상, 언어, 풍습, 관습 등)을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세계 민족에게 주어진 언어와 풍습과 관습 등은 하나님이 창조의 선물로 주신 은사다. 창조의 선물은 새 예루살렘에서도 그 연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창조는 다가오는 구속에서 완성되며 절정에 이른다.

맺음말

오늘날 인류의 축제는 항상 인간들 사이에 저질러진 지구촌의 범죄와 재난과 질병과 갈등으로 얼룩져 있다. 올림픽은 인류의 평화와 화합과 번영을 위하여 필요하다.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하며, 인종적 국가 간의 차별, 오판과 잘못된 운영은 지속적으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올림픽은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하늘의 영원한 축제를 예기하는 하나의 징표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 없는 유사종교축제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축제를 가리키는 징표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도요한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계 21:1-2).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