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기독일보에서 매주 몇몇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최근 설교문을 요약 정리해서 소개하는 <주일강단>을 시작합니다.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눈물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목회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이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은혜와 소망을 전해줄 것을 믿습니다

늘푸른장로교회 담임 김기주 목사
본문 : 막 7:23-27 “하나님을 감동케 한 믿음”


사람에게는 누구나가 각자가 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성취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대대수 사람들의 소원은 단순히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맞춰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좋은 대학에 가야 할까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얻고 존중을 받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좋은 대학 가기를 원합니다. 이것 자체가 바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어떤 이는 '내가 원하는 사업이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합니다. 좋은 환경에서 내 자녀를 교육하고 싶어서 '내 사업이 잘 되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런 소원과 이런 욕망이 세상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런 소원 속에 빠져있습니다. 이런 욕심 속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꿈에 부풀어 있는 뜬 구름에 불과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합니다. 기도가 뜬 구름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꿈을 꾸고 비전을 세웠을 때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뤄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으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꾸는 꿈이 실제적으로 역사하기 위해서는 어떤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가 꾼 꿈이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이방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 나라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감동케 했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이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케함으로 그가 원하는 소원이 이뤄지는 사건이 이 여인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갑자기 가버나움의 북서쪽에 있는 지역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시돈과 두로 지방은 이방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주 선교 사역지는 갈릴리였습니다. 왜 갑자기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까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그 곳에 있는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가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두로와 시돈 땅으로 가셔서 한 집에 들어갔다고 하셨습니다. 가버나움과 5마일의 거리였지만 일찍이 이곳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주변에서 어떤 사역을 펼치고 있는지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었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으러 나섰던 것입니다. 그 중에 이 여인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단순히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본문에 말씀을 통해서 살펴 볼 때 왜 예수님을 찾기를 그렇게 간절히 원했을까요?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자신의 딸이 귀신 들렸기 때문입니다. 흉악한 귀신이란 헬라어 원어로 보면 ‘죽을 수 있을 만큼의 상태’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귀신 들린 아이가 나옵니다. 이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불 속에 달려듭니다. 물 속에 죽으러 뛰어 듭니다. 자실 귀신인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귀신이 이 아이에게 들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는 이 여자를 소개할 때 가나안 여인이라고 소개합니다. 왜 가나안 여자라고 소개할까요? 가나안은 어떤 땅입니까? 가나안의 지명의 뜻은 무엇일까요? 가나안은 노아 시대 때 노아로 부터 저주 받은 함의 후손이 거주 하던 곳이 가나안이었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 볼 때는 저주 받은 부정한 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감히 이스라엘 백성과 상종할 수 없는 그런 여인을 지칭할 때 ‘가나안 여인’이라고 합니다. 본문과 병행구절인 마가 복음 7장을 보면 이 여인을 소개할 때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마가는 ‘헬라인이요’ 라고 소개합니다. 그 당시 ‘헬라인’ 이라고 지칭할 때는 그 사람이 헬라적 문화와 철학과 사고가 풍성하다는 의미를 지닐 때 ‘헬라인’이라고 지칭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 헬라 철학이 풍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헬라인이라고 지칭합니다. 나름대로 뛰어난 가문 속에서 헬라 철학의 학문을 가지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 당시 헬라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상당히 유력한 가문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상당한 재력과 상당한 지식을 겸비한 여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여자에게 그 어떤 신도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딸이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집안이 상당한 가문이었기에 이 귀신을 쫓아 내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것입니다. 소문난 사람을 부르고 많은 신을 초청했을 것입니다. 한국적으로 보면 얼마나 굿을 많이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역을 섬기는 신을 초청해서 자신의 딸을 낫게 하고자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많은 재력을 쏟아 내고 열정을 쏟아 냈지만 귀신을 쫓아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자신의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문제를 만났을 때 자신이 믿는 신이 더 이상 신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실망과 낙심 가운데 있을 때 그에게 들려오는 기쁜 소식이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온 예수 라는 자는 모든 질병을 고치고 사람의 질병을 고칠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도 구원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만사를 제쳐 놓고 예수를 만나러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 중에 그 예수가 자신의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듣고 예수님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내 사랑하는 딸이 귀신에 들렸나니 내 딸 아이를 고쳐 주옵소서’ 절규하는 심정일 것입니다. 그 여인의 외침에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본문 23절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외침에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무시했습니다.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 아이를 보면서 최고의 존칭으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여겨 주옵소서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쳐 주옵소서 외면 하지 마옵소서’ 그런데 이 절규하는 여인의 외침을 예수님은 무시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면 가슴에 처절한 고통이 쌓여 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완벽한 무시를 당했습니다. 포기할만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계속적으로 따라가면서 ‘도와 주옵소서’ 얼마나 이 여인이 외치는 소리가 컸는지… 예수님의 주변의 제자들이 ‘저 여인의 외치는 소리에 한번만 반응해주시고 돌려 보내소서’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대답은 그녀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만날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호한 거절입니다. 그 여인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25절입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간청합니다. 지금 이곳은 시돈과 두로 땅입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자기 고향입니다. 이 여인은 이 지역에서 상당히 유력한 가문의 여인일 것입니다. 그런 여인이 갈릴리에서 온 초라하기 그지 없는 예수님에게 와서 엎드려 간청을 합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유지부인이 얼마나 화려한 옷을 입고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가난한 자들과 함께 거주하기 때문에 옷은 남루합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앞에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이 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끈질긴 간청에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2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개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여인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절규하고 간청하고 있는데 이 여인에게 개 취급을 합니다. 이 정도 되면 포기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무시를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더 예수님께 다가서려고 노력합니다. 이 믿음의 간절함을 가지고 나아가니 주님이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동을 받고 이 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본문의 사건입니다. 이토록 무시당하고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여인이 왜 끈질기게 간구하였을까요? 오직 예수님만이 딸을 치료할 분이라고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사는 집안의 여인으로서 나름대로 지식을 겸비한 여인으로서 예수님을 붙드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게 될 때 우리 안의 에너지가 솟아 나게 됩니다. 26절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무시, 외면에도 포기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스러기라도 주신다면 나는 그 은혜를 받겠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부스러기 은혜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의 믿음을 보면서 어떤 도전을 받습니까?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예 맞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그렇지만 개들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아갑니다. ‘주여 당신은 세상을 구원할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남은 여력만 있다면 이방인인 저희도 구원해 주옵소서’ 이것이 이 여인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극치입니다. 얼마든지 세상에서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권세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 앞에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남은 부스러기라도 받겠다는 그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 아뢸 때가 있습니다. 아뢸 때 마다 하나님 앞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처럼 빚쟁이처럼, 맡겨 놓은 것 있는 것처럼 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당신이 하나님 이시라면 당연히 나의 소원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가 과연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기도가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까? 철저히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간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케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는 모습을 보세요.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부르는 모습이 있습니다. ‘선지자여 랍비여’라고 합니다. 이 본문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27절입니다. ‘주여’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질병을 고쳐 주시는 분으로 인식한 것뿐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외침입니다.

22절 그녀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릅니다. 대단히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녀에게는 예수님이 ‘메시야’ 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땅을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 주실 때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이방여인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로 믿고 있었습니다.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반대하고 핍박하고 있습니다. 이 이방여인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믿음이자 자신이 당면한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마8장에도 이방인이면서도 하나님을 감동케 해서 자신의 소원을 성취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로마의 백부장이라는 우월감을 버립니다. 또한 그는 한 마을을 통치하는 지배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는 그는 권리를 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다가가서 예수님의 말씀만 의지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백부장의 말에 감동 받았던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 집에 찾아가겠다’고 합니다. 이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의 병이 고침 받겠나이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방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대답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동하셨습니다. 마8장 10절 보겠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차례입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주님으로부터 감동을 받기 원하면서 살았습니까? 이제부터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님을 감동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철저하게 주님 앞에 낮아지는 겸손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 죄를 위해서 당신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다는 그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는 낮아지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감동케 하고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의 크신 역사로 이루는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8절입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주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에 감동받으시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은 수도 파이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가득 차 있는 수원지에 어떤 파이프을 연결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누리는 축복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수원지에 가느다란 파이프를 꽂습니다. 그런 삶에는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파이프를 꽂습니다. 큰 파이프를 꽂은 사람들은 매일 매일 풍성한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큰 믿음을 소유한다는 것은 큰 믿음의 파이프를 꽂는 다는 것입니다. 큰 믿음의 파이프를 꽂아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약장로교회 담임 황일하 목사님
본문 : 고린도후서 5:11-21 “화목케하는 직분”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복음의 푹 빠진 ‘매니아’ 였습니다.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사람들이 볼 때 너무 광적이고 ‘복음에 미쳐있는 사람이다’라고 듣게 되었어요 본문 13절입니다.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것입니다. 바울이 가진 복음의 열정은 어느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는 ‘열정’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야기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 복음을 위해 살기로 작정된 사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복음을 위해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지역을 방문하면서 이 복음을 시간 별로 전했던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시간 별로 전했습니다. 복음이 전해진 곳에 항상 교회가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개척을 많이 했습니다. 한 여인을 통해서, 부자를 통해서, 가난한 사람을 통해서 소아시아에 중동 지역에 복음을 심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열정을 복음에 미친 모습에 대해 ‘나는 관제와 같이 나를 쏟아 부었다’ 라고 말합니다. ‘관제가 무엇인가’하면 우리가 번제단에 제물을 드립니다. 맨 마지막에 포도주를 뿌립니다. 마지막 내가 가진 포도주를 번제 위에 뿌렸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더 헌신하겠습니다. 희생하겠습니다. 내 열정을 다해서 복음을 심겠습니다.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포도주를 붓는 것은 희생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복음의 ‘매니아’가 되었던 이유는 첫번째는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롬1장 1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 Calling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자청하여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불렀다는 그 입장에서 주의 일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내려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까지 골을 가지고 열정을 다했던 것입니다. 열정을 가지고 사역한 이유가 ‘빚진 자’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빚을 졌어요.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은혜의 ‘빚’ 때문에 내가 지금 쉴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가서 복음을 전달해야 하는 사명이 마음 속에서 계속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가 은혜의 빚을 졌는데 그것을 어떻게 갚을까 그것이 바로 바울을 열정 있는 복음 전파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직분이 어떤 직분이 주어졌나요? 내 직분이 무엇인가요? 여기에 적용하세요. 이 주신 직분은 하나님이 택하셔서 여러분을 택하여 불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택하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 ‘소명의식’이 있어야 끝까지 달려갈 수 있습니다.

신학교 갈 때 제일 처음 묻는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왔습니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 중에 확실한 소명을 갖고 신학교를 온 사람들은 돈이 없어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갚기 위해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을 열정이 있는 목회자로 세운 것입니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들의 삶은 목표를 향하여 달성하려고 나아갑니다. 하나님도 열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온천하 우주는 하나님의 열정의 산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입니다. 성령은 열정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 가운데 위대한 일을 계획하셨다는 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열정의 사명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 이만큼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열정이 나옵니다. 이 열정을 가질 때 복음은 계속해서 전파 됩니다. 바울이 열정이 있었습니다. 무엇에 대한 열정입니까? 본문은 확실히 말씀 하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19절 바울 자신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포함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에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왜 죽게 하셨을까요?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귀하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자기 사역에 열정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 원수된 관계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어긋난 관계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멀어졌고 어긋났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19절입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우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일을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하는 것은 화목입니다. 20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고린도 교우 안의 성도들입니다. 이 말씀은 교우들 가운데 아직 하나님과 화목 된 관계에 이르지 못한 관계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온다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 잘 드린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일을 위해 ‘화목한 일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믿음이 없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화목케 하는 일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도들을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중보적인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과 화목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이 땅에서 사역했던 예수님을 보시고 기뻐했던 하나님이십니다. ‘너희’라는 단어 속에는 성도 가운데 하나님과 막힌 담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신앙 생활 하다 보면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막힌 담,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이 있습니다. 그 막힌 담을 깊이 추적해 보고 발견해 보면 그것은 ‘죄’입니다. 결국 ‘죄의 문제’에 걸려서 우리가 담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은 하나님과 담이 쌓이고 있는데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서 ‘양심의 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십니다. 나와 함께 거룩함으로 동행하자라고 말씀 하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막습니다. 그리고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있으면 계속 멀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도망갔습니다. 우리 도 하나님과 막힌 담이 있으면 도망갑니다.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자포자기 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담이 쌓일 때 자포자기하지 않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막힌 담이 없도록 나아가길 축원합니다. 우리의 모습에도 영적인 혈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막히는 담이 없어야 영적으로 건강해집니다. 이 죄가 들어오면 다 깨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에 대해서 아주 긴장감을 갖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밧세바와 동침하고 나서 회개한 기도의 모습, 평상시에 지었던 죄에 대한 다윗의 반응을 보면 정말 간절합니다. 시편 32편 1절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은 것이 복이 있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살아갈 때 다윗은 뼈가 쇠하는 것처럼 몸이 마르는 것처럼 느꼈다는 것입니다. 죽을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무너질까봐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철저하게 기도하면서 나아갔습니다. 5절입니다.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고 다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화목하기 위해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숨은 부끄러운 일을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뼈가 마르듯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는 하나님이 보기에 거룩하고 온전함을 위해서 회개하고 몸부림 치는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임 가운데 죄가 들어오면 다 깨져 버립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왜 우리의 관계가 무너질까요? 근본적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 안의 ‘죄성’ 때문에 관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품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무시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화목한 관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 안에 이 죄성이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가 처음에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과 죄성이 들어옴으로 12제자의 관계를 다 무너뜨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교회가 화목한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화목한 관계가 되기 원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스스로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양심이 살아있는 성도들이 되기 원합니다. 불이 다 꺼져 가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양심의 고백을 듣기 원합니다. 히12장 14절입니다. ‘화평과 거룩함을 좇으라’ 말씀하십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떠나가야만 화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주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화목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한비전교회 담임 이요셉 목사
본문 : 창세기 4: 3-8 “유혹의 사슬 끊기”


우리 인생을 살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행동으로 나올 때는 드러납니다. 마음이 선하면 선한 행동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행위의 결과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 내면의 마음 속에는 욕심들로 묶여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은 시리즈 말씀 세번째 시간으로 욕심이 끊어지고 유혹으로부터 내 연약한 모습이 끊어지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쁘게 살다가 뱀이 유혹해 와서 쓰러지게 됩니다. 인류 최초의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로 말미암아 사람이 더러워지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마귀를 좇게 됩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4장에서 자식을 낳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 가인은 농업이 주업이었습니다. 아벨은 목축업자입니다. 양의 첫 새끼로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6절~8절입니다.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자 가인이 들에서 아벨을 쳐죽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 쳐죽였습니까?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섭섭했습니다. 시기가 나고 죽이고 싶어졌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발전하는 단계를 보게 됩니다. 아벨을 미워하게 되고 들에 단 둘이 있을 때 쳐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의 문제는 ‘제물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네 욕심을 다스려라.’한다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죄를 다스려야 하는 것이 교훈입니다.

오늘 사건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 욕심입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해 죄를 짓게 된 것이 경계 사항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성경 전체와 흐르는 맥락을 보기 원합니다. 가인은 왜 동생을 쳐죽였을까요? 제사를 드렸는데 동생의 제사는 받으셨고 내 제사는 안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원인는 무엇입니까? ‘제사’입니다. 질투심에서 결국은 동생을 미워하게 됐고 동생만 제거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것이 된다는 욕심으로 이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가인은 마음에 항상 욕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혹이 온 것입니다. 그 유혹이 아벨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고 싶은 욕심으로 유혹이 온 것입니다. 아벨만 쳐 죽이면 그 사랑을 독점할 수 있다는 유혹이 가인을 쓰러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였던 아담에게도 있던 문제였습니다. 유혹이 왔을 때 쓰러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몇 천년 전에 가인과 아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하냐면 우리는 유혹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가인과 같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 있었던 본질이 오늘날 나에게도 있습니다. 7절입니다. 결론은 ‘너는 죄를 다스릴지라.’입니다.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죄에 빠지고 넘어가게 하기 원하지만, 우리는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으로 적용해서 가인과 같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기 원합니다. 욕심을 다스려야 합니다. 약1장 14~15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의 욕심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욕구가 하나님 말씀과 뜻 안에서 잘 사용 되었을 때 바른 것입니다. 이것이 선을 넘어가면 욕심이 됩니다. 욕심에 끌리니까. 유혹이 왔을 때 넘어집니다. 사람마다 욕구가 강해서 선을 넘어 욕심이 되어 버린 영역이 다 다릅니다. 우리 나름대로 욕구라고 이야기 힘든 욕심이 장성해진 영역이 많이 있습니다. 마5장 28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의 간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속에 음욕을 갖고 품었다는 것은 통제 하지 않고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유혹이 오면 넘어집니다. 욕심을 품고 있으면 겉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언제가는 그 뿌리가 유혹이 오면 넘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욕심을 품는 겁니다. 내 안의 욕심을 다스리지 않고 가지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넘어지게 됩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영역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 돈, 허영, 과소비, 식탐 등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욕심이 따로 있습니다. 내 안의 욕심의 영역을 잘 보고 다스리지 않으면 유혹이 왔을 때 무조건 넘어집니다. 세상은 그런 욕심을 부추기는 곳입니다. 내 마음 속의 욕심을 다스리지 않으면 넘어지게 됩니다. 신앙의 거장들이 넘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 속을 다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장 유혹을 강하게 느끼는 부분이 사람 마다 다릅니다. 그 부분을 반드시 다스려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에서 죄를 다스려야 하는 것은 내 마음의 욕심을 발견하고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 속의 욕심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두번째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입력, ‘마음의 통제’를 잘 해야 합니다. 입력한대로 출력하게 됩니다. 무엇이 들어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7절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느니라’ 선을 행하려면 선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선한 것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것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 욕심을 다스리지 않으면 어떤 유혹의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입력’된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이 변하면 행동이 변화됩니다. 우리 생각의 바탕, 믿음이 변화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의 바탕 위에 있으면 그 말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마음을 바꾸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뀝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력이 잘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 가장 많이 정보를 입력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눈’입니다. 사람은 눈으로 정보가 들어옵니다. 문제는 인터넷, 영화, 잡지 모든 것으로 입력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들어가는지 통제해야 합니다. 사람은 입력된 대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무엇을 내 안에 입력하는가에 따라서 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22절 ~ 23절 보겠습니다. 눈이 밝은 것, 선한 것을 입력하면 네 마음이 밝고 선해지고, 네 눈으로 욕심을 따라 세속적인 것이 들어오면 얼마나 어두워지겠는가라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들어가는 대로 출력되게 되어있습니다. 결국 내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잘 봐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입력해야 할까요? 하나님 말씀을 입력해야 합니다. 시편119편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 시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깨끗하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눈으로 말씀 보고 귀로 말씀 듣고 말씀으로 내 안에 가득 채운 사람은 선한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장악하게 됩니다. 내가 선한 마음이 되기 때문에 욕심이 다스려 집니다. 나쁜 것이 들어오면 싸움터는 내 마음 속입니다. 입력을 통제하면 싸움터는 내 몸 밖이 됩니다. 입력을 하나님 말씀에 몰입하고 예배에 집중하고 생각에 몰입하고 계속 귀로 듣고 마음으로 묵상하면 하나님 말씀으로 꽉 차 있으면 욕심을 통제할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살면서 주시는 복에만 관심이 있다면 가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열납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을 눈으로 귀로 입력 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입력하는 것을 항상 통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배우는 유혹을 이기고 사슬을 끊고 이기는 방법은 유혹의 때와 장소를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는 방법은 내면을 통제하고 마음을 지켜야 하고 외적인 것을 통제해야 합니다. 피하면 됩니다. 유혹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8절 봅시다. 가인이 아벨에게 들판에 가서 이야기 하자고 합니다. 환경으로 말미암아 유혹이 오니까 동생을 쳐 죽인 것입니다. 환경입니다. 성경을 보면 유혹을 피한 대표적인 인물은 요셉입니다. 요셉이 이야기 합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득죄하리요’ 요셉은 피합니다. 유혹의 장소에서 도망가시기 바랍니다. 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의 욕심이 하나님 말씀으로 다스려져야 합니다. 유혹이 있거든 교만하게 나설 것이 아니라 피하면 됩니다. 상황과 자리를 피하시기 바랍니다. 유혹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