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프론티어교회 류인현 목사가 지난 10일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천국과 지옥에 관한 설교가 화제다. 절대적인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포스트모던시대에 젊은 목회자가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옥의 존재를 분명히 각인시켜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인 만큼 설교제목도 파격적인 “예수님의 꺽기도-당신은 부자입니까불이”다. 이는 KBS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인 ‘꺽기도’에서 말끝을 장난식으로 붙이는 것을 본 딴 것으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깊은 역설의 진리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 같은 제목을 붙였다.
류인현 목사는 이 설교를 통해 천국과 지옥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천국과 지옥 중 어느 한 곳만을 믿거나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은 불순종이자 우상숭배임을 경고했다.
류인현 목사는 “기독교에서 지옥교리를 빼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심해지고 특히 복음주의권 안에서도 심해지는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다”며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나이스 가이로 만들려고 한다. 지옥을 없애고 천국만 있는 아주 쿨한, 나이스한 하나님으로 만드려고 한다. 우리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류인현 목사는 지옥이 없다고 믿는 것은 곧 천국을 믿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분명한 천국와 지옥의 실존을 믿고 온전한 천국백성으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인현 목사는 예수님 시대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한 심판의 말씀에 대해 그들의 생각과 사고를 완전히 뒤엎는 ‘꺽기도가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앞으로 ‘예수님의 꺽기도’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설교 주요 내용.
‘예수님의 꺽기도(1) 당신은 부자입니까불이’(눅 16:19-31)
오늘 설교 제목으로 보시고 오타가 아닌가 생각할 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코너 이름이다. 그 꺽기도라는 코너는 꺽기도에 대해서 어떤 상황이든 뜬금없이 꺽어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는 무술의 하나이라고 소개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코너다. ~까로 끝나면 까뚜리, ~다로 끝나면 다람쥐라고 말끝을 붙인다.
이것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인 것 같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이 꺽기도 무술을 하신 것 같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천국복음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당황하게 하셨던 장면을 보게 된다.
오늘 본문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다.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이해한다면 더욱 잘 이 말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누가복음 9장~19장까지 유대 사역을 하시는 내용 중 메인세션에 해당된다.
누가는 의사였다. 사도바울의 주치의였고 선교여행도 함께 다녔던 사람이었다. 의사였던 누가의 관심은 사회적 약자에 가 있었고 성경 본문에도 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비유가 많이 나온다. 오늘 본문도 거지에 대해 비유를 하신다.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세 가지 유명한 비유가 나온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가 나온다.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대상으로 하신 것이다.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하셨던 설교인데 공통점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한 기쁨이다.
자기 자신의 이기심으로 가득했던 당시 사회적 강자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 청중들 특히 바리새인이 했던 반응이 비웃었다고 했다. 이 비웃음을 사게 했던 비유는 돈에 관한, 세상의 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재물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말씀이다. 돈으로 영혼을 구하라고 했으니 돈을 취하고 재물을 취했던 그들은 비웃는 것이다. 이런 냉담하고 싸늘한 반응 가운데서 굴하지 않고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간단하다. 등장인물 2명과 장소 2군데가 나온다. 천국의 나사로와 지옥의 부자다. 그리고 죽으면 삶에 따라서 엇갈린 두 곳으로 간다고 돼 있다. 이 비유의 극적인 반전은 이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로 볼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지옥에 가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세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첫 번째 천국과 지옥이 과연 있는가. 두 번째 왜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을 만드셨는가. 세 번째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오늘 이 말씀이 제 설교 중에 가장 중요한 설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여러분 졸지 말고 들어야 한다. 정신차리고 들어야 한다. 설교 준비하면서 제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설교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천국과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수많은 비유를 여러분이 진지하게 집중한다면 첫 번째 천국과 지옥이 과연 있는가에 대해 분명히 대답할 수 있다. 이 수 많은 비유의 초점은 천국과 지옥에 가 있다. 사람들은 지옥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내일도 아닌 오늘 바로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천국이란 곳을 암시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장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영생으로 끝난다. 천국과 지옥은 성경이 초지일관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천국을 많이 믿는다 좋은 것이니까. 그런데 지옥에 대해서 물음표를 붙인다. 저는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에 믿는다. 모든 것은 끝이 있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선의 선의 자리로 악은 악의 자리로 돌아갈 타이밍이 온다. 그것이 파이널이다. 하나님이 공의가 없고 전혀 화를 내는 분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면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나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죽은 심판이나 앗수르, 바벨론, 로마제국의 심판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나님이 과연 화를 내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이 과연 화를 내지 않기를 바라는가.
예수님의 말씀 중에 계속 나오는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는 것은 그냥 한번 겁을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의 일점 일획도 빼거나 더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는다면 과연 지옥을 성경에서 뺄 수 있겠는가. CS루이스도 말한다. 지옥만큼 빼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지옥의 존재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옥을 제대로 믿지 않고서 천국을 제대로 믿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목회자들이 지옥에 대해서도 잘 이야기하지 않지만 실제로 지옥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갖지 않는 부류가 생겼다. 최근의 한 미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는 지옥이 없다고 책을 써서 난리가 났다. 그런 세상이다. 내가 보기 싫다고 해서 그 실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마치 태양을 손으로 가리고 없어졌다고 하는 것과 같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해서 지옥의 존재를 없애고 싶어할 수도 있다. 박애주의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만큼 박애주의자인지 사랑이 더 많은지 묻고 싶다. 왜 착한척하는가. 예수님이 지옥이 있다는데 왜 여러분이 지옥이 없다고 하는가. 예수님이 그러면 더 나쁜 분인가? 천국과 지옥이 단순히 비유로만 치부하고 지옥의 존재를 모호하게 취한다.
왜 하나님은 지옥을 만드셨나
우리는 죽으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된다. 그 때 이야기를 할 것이다. 왜 하나님이 그럼 지옥을 만드셨냐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 굉장히 고전적인 질문이다. 지옥이 너무도 끔찍하니까 도무지 하나님과 지옥이 함께 연결할 수 없어서 그렇다. 그런데 지옥은 절대로 무고한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관한 오해를 한다. 마치 천국을 오해하듯이, 천국에 다녀왔다면서 여러 간증이 나오는데 상상의 날개를 접을 필요가 있다. 정말 지옥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을 봐야 한다. 성경을 안보고 천국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지옥의 필요성, 또 악인에 대한 심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지옥에 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잘 살았던 사람이 왜 도대체 지옥에 가는지 이해를 못하고 강한 도전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롬3:10~12의 말씀을 볼 때 기록된 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했다. 전적인 부패와 타락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착한 줄 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마음 안에 깊이 있는 드러나 있지 않은 죄에 대해 자각하지 못한다. 인간 모두에게 드러나지 않은 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러난 죄에 대해서도 감추려고 한다. 하와가 자기가 선악과를 따 먹고 핑계를 댔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책망받는 종이 주인을 악하게 말한다.
사람들은 죄와 악에 대해서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은 악을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시는 것이다. 분명히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지옥을 미워하지 않는 것은 천국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을 왜 그렇다면 사모하지 않는가? 천국과 지옥은 젊은이들에게 분명히 재미없는 토픽일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 서기관에게도 재미가 없는 토픽이었다. CS루이스처럼 이것만큼 기독교 교리에서 빼고 싶은 것이 없다. 그런데 분명히 있다. 분명히 있음에도 왜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 증오하지 않고 믿고 싶어 하지 않는가. 그것은 천국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믿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천국을 사랑해야 한다. 왜 천국을 믿지 않는 것인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그렇게 귀결이 된다. 복음을,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죽었던 부자가 나사로가 전도하면 가족들이 믿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하지만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는 것이다. 뚱딴지같은 소리일 수 있다. 모세와 선지자는 예수님 당시에 구약성경을 일컫는 것이다. 전체 구약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경을 믿지 않으면 죽은 사람을 보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다 봤던 자들이다. 특히 죽은 나사로의 부활도 봤던 자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믿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마음을 먹는다. 죽은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않는다. 예수보다 자기를, 천국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예수보다 자기를 천국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자들에게는 아무리 전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지옥교리를 빼려는 움직임 갈수록 심해져
이 맨하탄 잘 사는 도시에 백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인가? 잘 살기 때문이다. 자기가 예수보다 더 잘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경에 보면 죄라는 것이다. 인간이 선하면 얼마나 선하고 잘나면 얼마나 잘났는가. 교육이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않는다. 뉴욕과 전 세계에 그 많은 학교와 과목이 있지만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한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기독교에서 지옥교리를 빼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심해지고 특히 복음주의권 안에서도 심해지는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나이스 가이로 만들려고 한다. 지옥을 없애고 천국만 있는 아주 쿨한, 나이스한 하나님으로 만드려고 한다. 우리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신앙이고 우상숭배다. 금송아지를 광야에서 만들어서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우상숭배의 죄다. 자신의 아들마저도 지옥 맛을 보게 하시는 그런 공의로운 하나님은 분명히 마지막 날에 분명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사도들로부터 지금의 교회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통이다. 구원과 심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여러분은 이 천국이 존재한다는 즐거운 진실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될 때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안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여러분이 오늘날 죽게 될 때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하나를 가게 된다고 알게 됐을 때 여러분의 삶이 과연 어떻게 바뀔 것인가?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중요한 것인가. 오늘 본문의 부자를 예수님이 어리석다고 하신 이유는 그 부자는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다였기 때문이다. 천국도 지옥도 큰 관심거리도 아니고 이 세상이 전부였던 자였다. 자기의 호화로운 삶이 중요하지 개에게 뜯겼던 나사로는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오늘 비유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요약하자면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다.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다. 천국을 대표하는 사랑이 없는 곳에는 지옥을 대표하는 무관심만 남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은 정말 악한 것이다. 관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러분이 쇼핑몰에 쇼핑하러 가면 좋아하고 관심있는 브랜드만 보인다. 사람의 시각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신기한 것이다. 관심이 있으면 보이고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예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고 질색하시고 독사의 자식이라고까지 하신 것은 세리와 창기가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인 강자들이고 부자들이었고 소위 잘나가는 자들이었다. 살인도, 도적질도 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서 지옥이 너희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과연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까지 강한 어조로 말씀하시는가. 그들의 죄는 무관심이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다. 그것이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갈라놓는 기준이다.
결국 죄의 본질이라는 것은 자기 중심성이다. 다른 사람의 삶은 관심밖이었다. 자기가 모든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했지만 최고 율법인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개들이 와서 물어 뜯으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나사로를 향해 관심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짓고 있는 죄가 이와 같다. 매일 스치는 사람을 보면서도 영혼에 대한 갈급함이 없는 것이다. 의사가 암이라고 동맥경화라고 경고를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는 것이다. 몸이 고장 났는데 살기 바쁘다고 핑계를 대는 것이다. 장가 가야하고 소도 사야한다고 한다. 누가복음 14장의 비유에 나오듯 결국 그 잔치는 소경과 절뚝발이다. 역전이 일어난다. 꺽기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왜 나사로는 이름이 있고 부자는 이름도 없는 것인가. 부활했던 나사로같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천국에 있다는 그런 역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무관심의 죄는 미움의 죄보다 더욱 악한 지옥행의 죄고 불순종의 죄다. 마음과 몸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긴 것이다. 요즘 말로는 저는 모태신앙이고 4대째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 무조건 천국간다고 자기 확신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나는 천국간다고 확신에 확신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야만 들어간다. 영생은 거듭나지 않으면 누릴수도 맛볼수도 없다. 니고데모는 그렇게 박식한 율법학자이고 모든 지식을 다 갖췄음에도 영생이 없다고 느끼고 영생에 대해 목말라하면서 예수님을 찾았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하신다.
어릴 때 불렀던 복음성가에 핵심이 다 들어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이 노래다. 몇 절이 있는데 여기에 핵심이 다 들어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천국 티켓을 살 수 없다. 천국은 무료기 때문이다. 무료이고 공짜인데 과연 그것을 손에 들고 있는가 중요한 문제다.
기차를 타느냐. 그리고 종착역까지 가느냐 중간에 내리느냐 중요한 문제다. 값비 싼 구원인지 값싼 구원인가. 우리는 은혜의 값어치가 너무도 비싸서 돈 주고도 살 수 없기에 공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흘러주신 보혈의 피로 해방을 얻게 됐다. 성경의 기록이다. 이것은 어떤 은혜인가. 여러분이 일평생 찬양해야할 은총이다. 그런데 여러분의 모습은 어떤가. 불안과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우리는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이 엄청난 구원의 열차를 탔는데 이 거저 받은 사랑 거저 주어야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랑하는 척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 산 것만이 믿음이 되고 산 것 만이 사랑이 된다. 이땅에서 살았던 것이 살았던 것만이 삶이 된다. 아주 중요한 진리다. 오늘날의 젊은이들 특히 한국의 젊은이들을 만나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여기서 셀 봉사하고 온갖 활동을 했던 자들이 한국에서 교회를 안 간다. 한국이 이래도 되는가 걱정이 된다. 어느 시대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데 예수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너진다. 은혜를 값싼 은혜로 믿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냥 악세사리 정도인 것 같다. 정말 에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이 정말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복음이 완전하지 않는 것인가? 보화 하나 때문에 샀는데 밭을 산 것인데 이것을 후회한다면? 여기는 광야다. 영원한 거주지가 아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광야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비전은 가나안이다. 가나안을 가슴에 품고 갈망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천국의 주인이 됐다.
하나님의 본심이 궁금할 것이다.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신 것도 세상을 심판함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예수를 믿고 그물을 버리고 처 자식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을 사람은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느라 이 세상에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천국에서 보상이 있고 면류관이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영원토록 누리게 된다. 예수 플러스를 요즘 너무 좋아한다. 저는 그런데 예수님 한 분이면 된다. 유일한 보화이고 진주다. 천국의 보화다. 예수로 가득차고 천국으로 가득 찬 이에게는 지옥은 한치도 발디딜 틈이 없다. 예수로 가득찬 인생은 무관심의 삶에서 사랑의 삶으로 삶의 좌표가 움직여질 수밖에 없다. 그런 자는 이땅에서도 부요한 자로, 천국에서도 더욱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된다. 한국에 광고 카피처럼 부자되시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풍성한 부자가 되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지옥이 아닌 영원한 안식과 기쁨, 행복을 맛보는 천국 시민답게 천국 부자답게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한다.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인 만큼 설교제목도 파격적인 “예수님의 꺽기도-당신은 부자입니까불이”다. 이는 KBS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인 ‘꺽기도’에서 말끝을 장난식으로 붙이는 것을 본 딴 것으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깊은 역설의 진리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 같은 제목을 붙였다.
류인현 목사는 이 설교를 통해 천국과 지옥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천국과 지옥 중 어느 한 곳만을 믿거나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은 불순종이자 우상숭배임을 경고했다.
류인현 목사는 “기독교에서 지옥교리를 빼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심해지고 특히 복음주의권 안에서도 심해지는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다”며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나이스 가이로 만들려고 한다. 지옥을 없애고 천국만 있는 아주 쿨한, 나이스한 하나님으로 만드려고 한다. 우리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류인현 목사는 지옥이 없다고 믿는 것은 곧 천국을 믿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분명한 천국와 지옥의 실존을 믿고 온전한 천국백성으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인현 목사는 예수님 시대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한 심판의 말씀에 대해 그들의 생각과 사고를 완전히 뒤엎는 ‘꺽기도가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앞으로 ‘예수님의 꺽기도’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설교 주요 내용.
‘예수님의 꺽기도(1) 당신은 부자입니까불이’(눅 16:19-31)
오늘 설교 제목으로 보시고 오타가 아닌가 생각할 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코너 이름이다. 그 꺽기도라는 코너는 꺽기도에 대해서 어떤 상황이든 뜬금없이 꺽어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는 무술의 하나이라고 소개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코너다. ~까로 끝나면 까뚜리, ~다로 끝나면 다람쥐라고 말끝을 붙인다.
이것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인 것 같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이 꺽기도 무술을 하신 것 같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천국복음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당황하게 하셨던 장면을 보게 된다.
오늘 본문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다.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이해한다면 더욱 잘 이 말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누가복음 9장~19장까지 유대 사역을 하시는 내용 중 메인세션에 해당된다.
누가는 의사였다. 사도바울의 주치의였고 선교여행도 함께 다녔던 사람이었다. 의사였던 누가의 관심은 사회적 약자에 가 있었고 성경 본문에도 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비유가 많이 나온다. 오늘 본문도 거지에 대해 비유를 하신다.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세 가지 유명한 비유가 나온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가 나온다.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대상으로 하신 것이다.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하셨던 설교인데 공통점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한 기쁨이다.
자기 자신의 이기심으로 가득했던 당시 사회적 강자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 청중들 특히 바리새인이 했던 반응이 비웃었다고 했다. 이 비웃음을 사게 했던 비유는 돈에 관한, 세상의 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재물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말씀이다. 돈으로 영혼을 구하라고 했으니 돈을 취하고 재물을 취했던 그들은 비웃는 것이다. 이런 냉담하고 싸늘한 반응 가운데서 굴하지 않고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간단하다. 등장인물 2명과 장소 2군데가 나온다. 천국의 나사로와 지옥의 부자다. 그리고 죽으면 삶에 따라서 엇갈린 두 곳으로 간다고 돼 있다. 이 비유의 극적인 반전은 이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로 볼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지옥에 가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세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첫 번째 천국과 지옥이 과연 있는가. 두 번째 왜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을 만드셨는가. 세 번째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오늘 이 말씀이 제 설교 중에 가장 중요한 설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여러분 졸지 말고 들어야 한다. 정신차리고 들어야 한다. 설교 준비하면서 제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설교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천국과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수많은 비유를 여러분이 진지하게 집중한다면 첫 번째 천국과 지옥이 과연 있는가에 대해 분명히 대답할 수 있다. 이 수 많은 비유의 초점은 천국과 지옥에 가 있다. 사람들은 지옥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내일도 아닌 오늘 바로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천국이란 곳을 암시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장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영생으로 끝난다. 천국과 지옥은 성경이 초지일관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천국을 많이 믿는다 좋은 것이니까. 그런데 지옥에 대해서 물음표를 붙인다. 저는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에 믿는다. 모든 것은 끝이 있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선의 선의 자리로 악은 악의 자리로 돌아갈 타이밍이 온다. 그것이 파이널이다. 하나님이 공의가 없고 전혀 화를 내는 분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면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나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죽은 심판이나 앗수르, 바벨론, 로마제국의 심판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나님이 과연 화를 내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이 과연 화를 내지 않기를 바라는가.
예수님의 말씀 중에 계속 나오는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는 것은 그냥 한번 겁을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의 일점 일획도 빼거나 더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는다면 과연 지옥을 성경에서 뺄 수 있겠는가. CS루이스도 말한다. 지옥만큼 빼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지옥의 존재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옥을 제대로 믿지 않고서 천국을 제대로 믿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목회자들이 지옥에 대해서도 잘 이야기하지 않지만 실제로 지옥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갖지 않는 부류가 생겼다. 최근의 한 미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는 지옥이 없다고 책을 써서 난리가 났다. 그런 세상이다. 내가 보기 싫다고 해서 그 실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마치 태양을 손으로 가리고 없어졌다고 하는 것과 같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해서 지옥의 존재를 없애고 싶어할 수도 있다. 박애주의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만큼 박애주의자인지 사랑이 더 많은지 묻고 싶다. 왜 착한척하는가. 예수님이 지옥이 있다는데 왜 여러분이 지옥이 없다고 하는가. 예수님이 그러면 더 나쁜 분인가? 천국과 지옥이 단순히 비유로만 치부하고 지옥의 존재를 모호하게 취한다.
왜 하나님은 지옥을 만드셨나
우리는 죽으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된다. 그 때 이야기를 할 것이다. 왜 하나님이 그럼 지옥을 만드셨냐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 굉장히 고전적인 질문이다. 지옥이 너무도 끔찍하니까 도무지 하나님과 지옥이 함께 연결할 수 없어서 그렇다. 그런데 지옥은 절대로 무고한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관한 오해를 한다. 마치 천국을 오해하듯이, 천국에 다녀왔다면서 여러 간증이 나오는데 상상의 날개를 접을 필요가 있다. 정말 지옥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을 봐야 한다. 성경을 안보고 천국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지옥의 필요성, 또 악인에 대한 심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지옥에 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잘 살았던 사람이 왜 도대체 지옥에 가는지 이해를 못하고 강한 도전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롬3:10~12의 말씀을 볼 때 기록된 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했다. 전적인 부패와 타락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착한 줄 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마음 안에 깊이 있는 드러나 있지 않은 죄에 대해 자각하지 못한다. 인간 모두에게 드러나지 않은 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러난 죄에 대해서도 감추려고 한다. 하와가 자기가 선악과를 따 먹고 핑계를 댔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책망받는 종이 주인을 악하게 말한다.
사람들은 죄와 악에 대해서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은 악을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시는 것이다. 분명히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지옥을 미워하지 않는 것은 천국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을 왜 그렇다면 사모하지 않는가? 천국과 지옥은 젊은이들에게 분명히 재미없는 토픽일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 서기관에게도 재미가 없는 토픽이었다. CS루이스처럼 이것만큼 기독교 교리에서 빼고 싶은 것이 없다. 그런데 분명히 있다. 분명히 있음에도 왜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 증오하지 않고 믿고 싶어 하지 않는가. 그것은 천국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믿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천국을 사랑해야 한다. 왜 천국을 믿지 않는 것인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그렇게 귀결이 된다. 복음을,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죽었던 부자가 나사로가 전도하면 가족들이 믿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하지만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는 것이다. 뚱딴지같은 소리일 수 있다. 모세와 선지자는 예수님 당시에 구약성경을 일컫는 것이다. 전체 구약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경을 믿지 않으면 죽은 사람을 보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다 봤던 자들이다. 특히 죽은 나사로의 부활도 봤던 자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믿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마음을 먹는다. 죽은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않는다. 예수보다 자기를, 천국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예수보다 자기를 천국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자들에게는 아무리 전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지옥교리를 빼려는 움직임 갈수록 심해져
이 맨하탄 잘 사는 도시에 백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인가? 잘 살기 때문이다. 자기가 예수보다 더 잘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경에 보면 죄라는 것이다. 인간이 선하면 얼마나 선하고 잘나면 얼마나 잘났는가. 교육이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않는다. 뉴욕과 전 세계에 그 많은 학교와 과목이 있지만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한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기독교에서 지옥교리를 빼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심해지고 특히 복음주의권 안에서도 심해지는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나이스 가이로 만들려고 한다. 지옥을 없애고 천국만 있는 아주 쿨한, 나이스한 하나님으로 만드려고 한다. 우리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신앙이고 우상숭배다. 금송아지를 광야에서 만들어서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우상숭배의 죄다. 자신의 아들마저도 지옥 맛을 보게 하시는 그런 공의로운 하나님은 분명히 마지막 날에 분명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사도들로부터 지금의 교회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통이다. 구원과 심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여러분은 이 천국이 존재한다는 즐거운 진실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될 때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안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여러분이 오늘날 죽게 될 때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하나를 가게 된다고 알게 됐을 때 여러분의 삶이 과연 어떻게 바뀔 것인가?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중요한 것인가. 오늘 본문의 부자를 예수님이 어리석다고 하신 이유는 그 부자는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다였기 때문이다. 천국도 지옥도 큰 관심거리도 아니고 이 세상이 전부였던 자였다. 자기의 호화로운 삶이 중요하지 개에게 뜯겼던 나사로는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오늘 비유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요약하자면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다.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다. 천국을 대표하는 사랑이 없는 곳에는 지옥을 대표하는 무관심만 남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은 정말 악한 것이다. 관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러분이 쇼핑몰에 쇼핑하러 가면 좋아하고 관심있는 브랜드만 보인다. 사람의 시각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신기한 것이다. 관심이 있으면 보이고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예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고 질색하시고 독사의 자식이라고까지 하신 것은 세리와 창기가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인 강자들이고 부자들이었고 소위 잘나가는 자들이었다. 살인도, 도적질도 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서 지옥이 너희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과연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까지 강한 어조로 말씀하시는가. 그들의 죄는 무관심이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다. 그것이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갈라놓는 기준이다.
결국 죄의 본질이라는 것은 자기 중심성이다. 다른 사람의 삶은 관심밖이었다. 자기가 모든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했지만 최고 율법인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개들이 와서 물어 뜯으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나사로를 향해 관심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짓고 있는 죄가 이와 같다. 매일 스치는 사람을 보면서도 영혼에 대한 갈급함이 없는 것이다. 의사가 암이라고 동맥경화라고 경고를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는 것이다. 몸이 고장 났는데 살기 바쁘다고 핑계를 대는 것이다. 장가 가야하고 소도 사야한다고 한다. 누가복음 14장의 비유에 나오듯 결국 그 잔치는 소경과 절뚝발이다. 역전이 일어난다. 꺽기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왜 나사로는 이름이 있고 부자는 이름도 없는 것인가. 부활했던 나사로같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천국에 있다는 그런 역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무관심의 죄는 미움의 죄보다 더욱 악한 지옥행의 죄고 불순종의 죄다. 마음과 몸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긴 것이다. 요즘 말로는 저는 모태신앙이고 4대째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 무조건 천국간다고 자기 확신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나는 천국간다고 확신에 확신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야만 들어간다. 영생은 거듭나지 않으면 누릴수도 맛볼수도 없다. 니고데모는 그렇게 박식한 율법학자이고 모든 지식을 다 갖췄음에도 영생이 없다고 느끼고 영생에 대해 목말라하면서 예수님을 찾았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하신다.
어릴 때 불렀던 복음성가에 핵심이 다 들어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이 노래다. 몇 절이 있는데 여기에 핵심이 다 들어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천국 티켓을 살 수 없다. 천국은 무료기 때문이다. 무료이고 공짜인데 과연 그것을 손에 들고 있는가 중요한 문제다.
기차를 타느냐. 그리고 종착역까지 가느냐 중간에 내리느냐 중요한 문제다. 값비 싼 구원인지 값싼 구원인가. 우리는 은혜의 값어치가 너무도 비싸서 돈 주고도 살 수 없기에 공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흘러주신 보혈의 피로 해방을 얻게 됐다. 성경의 기록이다. 이것은 어떤 은혜인가. 여러분이 일평생 찬양해야할 은총이다. 그런데 여러분의 모습은 어떤가. 불안과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우리는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이 엄청난 구원의 열차를 탔는데 이 거저 받은 사랑 거저 주어야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랑하는 척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 산 것만이 믿음이 되고 산 것 만이 사랑이 된다. 이땅에서 살았던 것이 살았던 것만이 삶이 된다. 아주 중요한 진리다. 오늘날의 젊은이들 특히 한국의 젊은이들을 만나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여기서 셀 봉사하고 온갖 활동을 했던 자들이 한국에서 교회를 안 간다. 한국이 이래도 되는가 걱정이 된다. 어느 시대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데 예수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너진다. 은혜를 값싼 은혜로 믿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냥 악세사리 정도인 것 같다. 정말 에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이 정말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복음이 완전하지 않는 것인가? 보화 하나 때문에 샀는데 밭을 산 것인데 이것을 후회한다면? 여기는 광야다. 영원한 거주지가 아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광야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비전은 가나안이다. 가나안을 가슴에 품고 갈망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천국의 주인이 됐다.
하나님의 본심이 궁금할 것이다.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신 것도 세상을 심판함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예수를 믿고 그물을 버리고 처 자식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을 사람은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느라 이 세상에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천국에서 보상이 있고 면류관이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영원토록 누리게 된다. 예수 플러스를 요즘 너무 좋아한다. 저는 그런데 예수님 한 분이면 된다. 유일한 보화이고 진주다. 천국의 보화다. 예수로 가득차고 천국으로 가득 찬 이에게는 지옥은 한치도 발디딜 틈이 없다. 예수로 가득찬 인생은 무관심의 삶에서 사랑의 삶으로 삶의 좌표가 움직여질 수밖에 없다. 그런 자는 이땅에서도 부요한 자로, 천국에서도 더욱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된다. 한국에 광고 카피처럼 부자되시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풍성한 부자가 되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지옥이 아닌 영원한 안식과 기쁨, 행복을 맛보는 천국 시민답게 천국 부자답게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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