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광화문 광장에 보기좋게 두분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이다, 이순신 장군은 7년 왜란 중에 거북선을 만들어 적의 침략을 막고 탁월한 전략과 전술로 전승을 거둔 구국 장군이요. 세종대왕은 개혁정치로 국가발전을 도모했고 특별히 한글을 반포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글자를 탄생시킨 공로가 있다. 당연히 후세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아야한다. 두 분은 15세기의 인물이다. 이제는 한국을 세운 현대사의 인물을 뽑아 광화문 광장에 세워 후세대에 교훈을 주며 귀감으로 삼도록 해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건국 64년 만에 세계의 주목을 끄는 나라가 되였기 때문이다.

한 분은 건국대통령 이승만(국제정치학 최초의 박사)장로요, 또 한분은 경제대통령 박정희 장군이다 (무혈구테타를 일으켜 한국을 근대화, 산업화시킨 장군) 이 두분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두 분의 위업을 널리 알려 우리 국민뿐 아니라 세계 다른 지도자로 하여금 그길을 따라 모두가 잘사는 나라, 자유민주주의가 창대한 나라로 만들어 가야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많다.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으로 첫째는 출생에서부터 1945년 까지는 독립투사로 일했다.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서 미국의 신문명과 기독교를 접하게 되면서 예수를 믿고 성경을 통하여 영어를 익혔다. 5년7개월의 감옥 속에서 선교사들이 넣어준 책들을 열심히 읽으며 영어사전도 만들었다. 35세에 미국 프린스톤대학에서 얻은 정치외교학 박사학위와 유창한 영어실력이 그로 하여금 세계열강의 무대속에서 한국의 억울함을 알리며,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1943년11월 카이로에서 미.영.중, 대표들이 모여 논의한후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것을 선언하였다. 그 당시일본의 속국이 된나라는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필리핀, 버마, 싱가폴 등이었다. 왜 유독 한국만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자고 했겠는가? 이승만을 포함한 독립투사들의 끈질긴 외교 노력의 결과이다.

두번째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는 건국의 기초를 닦는 정책가로 활동했다. 그 당시 한국은 혼돈, 공허, 무질서, 문맹, 갈등, 좌파 등이 만연했던 시대였다, 앞길이 보이지 않던 시대였다.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을 통해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꽉차있었던 선각자였다. 미국에서 33년 살면서 미국정치와 세계정치 무대를 다 보았던 분이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김일성이 주도의 공산주의는 망하고 미국이 하는 자유민주주의만이 한국이 나아갈 길이다는 확고한 신념과 지식이 있었던 분이었다. 5/10 총선거를 하며 반만년 역사속에 처음으로 대한민국에 자유투표로 국민의 대표를 뽑아 민주주의를 시작한 분이다. 헌법를 만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애국정신을 함양케 했다. 기도하면서 국회를 개원했다. 무질서와 갈등, 문맹의 터위에 민주주의 나무를 심고 가꾸고 자라게 한분이 이승만 박사였다. 이승만 장로는 세계정치를 보는 눈을 가진 유일무이한 선각자였다. 그는 반공주주의자 였다. 일찍 기독교에 입문해서 영어를 배우며 익힌 성경속에서 공산주의는 용, 사탄의 세력이라는 것과 거짓집단이며 어떤 협약도 조약도 지키지 않는 집단이라는 것을 간파했었다.

셋 째는 1950년-1953년 6/25전쟁기간에는 탁월한 전략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통수권자였다. 한국군은 제대로 구성도 되지 않았고, 무기도 없었다. 6/25일 김일성은 인민군 11만병력 240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돌파하고 침략해오는데 막을 힘이 전혀없었다, 대구까지 후퇴되면서 임시정부를 부산에 두었다. 전각료들, 목사들을 초청하며, 나라살리는 구국기도를 한후 유엔이 한국파병을 결의하고 친구인 맥아더 총사령관이 이끄는 연합군이 한국에 증원군으로 와서 싸워주었기에 적화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 7월14일 이승만대통령은 전작권을 맥아더총사령관에게 넘겨 모든 전투를 유엔군 지휘아래 하도록 일임하였다. 유창한 영어 실력이 있었기에 유엔군 사령관, 미8군 사령관, 미행정부와 협의, 토의, 지시하는 데 조금도 불편이 없었다,

맥아더를 위시한 모든 장군들이 이 박사를 존경하며 따랐다. 그는 이 참에 공산주주자를 이땅에서 몰아내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싶어 북진통일을 원했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100만 중공군을 물리 칠 수 없기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공산주의를 싫어 하는 반공포로 2만7천명을 단독 결정으로 석방시킨 작전은 그어느 누구도 할수 없는 강력한 리더쉽의 발휘였다. 미국대통령, 유엔 총사령관, 미8군사령관의 허를 찌른 작전이었다. 전세계를 놀라게한 강력한 국군통수권자였다. 영국 수상 처칠이 6월19일 아침 면도하다 그소식을 듣고 놀라 면도칼에 살을 베었다.

넷 째는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재건에 힘쓴 역군이었다. 한미상호원조협약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냈다, 원조협약으로 많은 구호물자, 원조를 받아 잿더미위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1년 3개월에 걸쳐 만들어진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국무부대표들과 함께 16일간 이대통령이 직접 구절 구절을 점검하고 만든조약이다. 그당시 육군참모총장 백선엽장군은 말하길 "이는 북한방어, 소련저지, 중국봉쇄, 일본견제의 4중장치로서 대륙국가에서는 아시아에서 최초의 방위 조약이다" 라고 했다. 지난 60년 동안 북한의 많은 도발, 테러, 간첩남파, 사회불안조성, 시위, 비행기납치, 비행기폭파 등의 만행이 있었지만 주한 미군이 있는한 한반도에 전쟁이 없다는 인식으로 외국 자본이 계속 한국에 머물러 기업이 운영되여 오늘의 산업화의 한국이 된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탁월한 예지력과 판단력 덕분이다.

마지막으로, 1960년4/19 학생시위때 정권을 물려준 자유민주주의 실천자이다. 3/15선거가 부정으로됐다는 국민들의 함성에, 그렇다면 하야하겠다며 정권을 물려주었다. 이것은 역사에 없는 초유의 사건이다. 세계의 많은 지도자 중에 스스로 하야한 자는 없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3만2천 명이 죽었는데도 정권을 내놓지 않았다. 루마니아 차우세스카, 에집트, 예멘, 시리아, 이락의 후세인, 북한을 보라, 3/15부정 선거의 책임을 지고, 이대통령은 하야했고, 이기붕 국회의장 박마리아,이강국, 육군소위, 이강욱, 연세대생, 일가족은 권총 자결 했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받았다. 죄값을 받았다. 대한민국을 만들고 자유민주주의 토대를 쌓고 공산주주를 이긴 오늘의 한국이 있도록 초석을 놓은 위대한 선각자 지도자였다. 한국 국민 모두는 자랑스럽게 추앙하며, 존경해야 할것이다. 저를 낳아준 부모를 욕하고 존경치 않는 사람을 어찌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뉴욕지회 회장 손영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