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이용규 선교사가 지난 주일(27일)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주일 예배에 초청돼 설교를 전했다.
‘서운함의 이면에서(신명기 3:22~28)’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전한 이 선교사는 “여러분의 아픔 뒤에 사명이 숨겨져 있다”며 현상을 바라보지 말고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길 권면했다.
이 선교사는 “예수님 믿으면 편안한 상황이 지속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뒤통수를 치시는 것 같은 상황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며 “(우리에게 닥치는 힘든 상황을 잘 해석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을 넘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며 말씀을 이어갔다.
“평생 소원으로 여기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모세가 구했을 때 하나님은 ‘여기서 멈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이 선교사는 “모세에게 왜 못들어간다고 하셨을까? 이것을 알려면 신약으로 들어가야 한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와 맞물려 있다. 모세가 여호수아한테 안수한 것처럼,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의 사역이 천국 확장이었듯이 여호수아의 사역도 약속받은 땅을 확장하는 사역이었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에게 목잘림을 당해 죽음을 당하는 순간 질문했을 것입니다. ‘왜?’라고. 이 세례요한의 질문이 어떻게 답이 주어지는 지 아세요? 세례요한과 모세가 갖고 있었을 똑같은 질문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을 인용한 그 기도를 철저히 외면하십니다. 하나님은 외면하십니다. 왜? 거기에 세례요한의 사명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예수님의 사명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모세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사명과 세례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예표가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멈추는 것이 복이었습니다.”
그는 “사명 뒤에 아픔이 있다”며 “예수님의 아픔이 그 분의 사명과 연결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치유하는 자로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선교사는 “모세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을 밟게 된다. 예수님과 변화산상에서 말이다”라며 “예수님의 아픔과 상처가 우리의 소망이 될 것이다. 그 소망을 붙드신다면 여러분은 무너짐 속에서, 서운함 가운데, 아픔 가운데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놀라운 사명을 붙들수 있게 된다”라고 말씀을 맺었다.
한편, 이용규 선교사는 오는 29일, 30일 오후 8시 베데스다 소재 워싱턴한인연합장로교회(담임 김해길 목사, 7009 Wilson Lane, Bethesda, MD 20817)에서 부흥성회를 인도한다.
“서운함의 이면에서”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5월 27일, 이용규 선교사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모세한테 아주 서운한 말씀을 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어떤 종인데, 하나님을 그렇게 열심히 섬기고 순종하고 충성되게 40년 간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증거했던 종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매우 서운하게 만드십니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가?
모세가 소원이 있었습니다. 40년 동안 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 약속의 땅. 그 땅을 밟아만 보게 해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만해도 족하니 더 이상 구하지도 말아라. 너는 못들어간다. 대신 너의 종 여호수아를 축복하고 안수해서 그 사람이 이 백성들을 데리고 들어가게 하라. 너는 혼자 여기 남겨진다." 하십니다. 굉장히 서운한 말씀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서운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선한 분이라면 왜 모세에게 특별히 이렇게 하셨을까?
2007년도에 이 부분으로 씨름을 많이 했습니다. 1907년의 부흥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한국교회가 기도하고 통성으로 외쳤습니다. 그런데 부흥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기간에 아프간에서 단기선교 사역을 하던 사람들이 인질로 붙잡히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몽골 단기선교 온 청년들이 생각 났습니다. "하나님 왠만하면 들어주십시오. 이 일로 인해서 선교의 문이 닫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 같은데, 이들을 긍휼히 불쌍히 여겨 달라"며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다가 제 마음에 평안함보다, 어쩌면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겁니까? 그때 저에게 던지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는 죽음에 대해서 준비됐니?" 엉뚱해 보이는 답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너는 죽음에 대해 준비됐니?' 의외로 큰 뿌리를 갖고 있는 질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부흥을 위해 기도했는데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부흥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원했던 부흥은 교회가 꽉꽉 가득차고 예배가 힘이 넘치고, 기도하는 대로 탁탁 응답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흥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편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죄 된 마음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임할 때 괴롭고 불편합니다.
제게는 그 질문이 죽음이라는 단어로 다가왔습니다. 너는 이것이 준비되어있니? 우리가 죽지 않고서는 부흥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뒤통수를 치시는 것 같은 상황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믿으면 편안한 상황이 지속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몽골에서 지체들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는 가운데, 제가 신뢰하는 한 청년이 교회 온 지 얼마 안된 자매와 만나 결혼했는데, 결혼 한지 얼마 안돼 신부 어머니가 강도를 만나 백여곳 칼에 찔려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몽골사람들은 샤머니즘 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뭔가 종교를 바꾸면 부정한 일이 생기는 일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당황하면서 두 사람이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그 신랑이 각혈을 하기 시작합니다. 피 투성이. 나중에 보니 폐결핵입니다. 이 친구는 상례에 참석하지 못하고 병원으로 격리됐습니다. 이후에 장인이 찾아와서 '나는 내 아내를 잃었고, 이 딸 밖에 없는데, 너같은 예수쟁이 약골에서 딸을 맡길 생각이 없다. 빨리 떠나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합니다.
너무 낙담이 되어 그날 울면서 시름이 달래기 위해 성경을 보고 있었는데, 성경을 보는 도중에,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당신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나요? 그 청년이 대답합니다. '성경이란 책입니다’ '재미있습니까'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 책 저 좀 빌려주실래요?' 청년이 빌려줬는데 하루가 지나고 보름이 되도록 성경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아다니며 찾다가 그룹으로 모여 성경을 두고 토론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빨리 책 돌려주세요.' '아 잘됐네요. 안 그래도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세 청년이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그 청년들은 ‘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당신을 만나 성경을 보게 됐고, 새로운 소망을 얻게 됐다’는 겁니다.
그 청년도 같이 기뻐하다가 갑자기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 나의 이런 힘든 상황을 통해서 일하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셔서 일하십니까? 그냥 이 사람들에게 가서 전도하라고 말씀하셨으면 제가 안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꼭 이 방법이어야 합니까?" 퀘스천이 있었어요. 병원에서 퇴원하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행사가 이해가 안돼요." 청년에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것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욥기 보니까 욥이 고난을 받는데, 사람들의 해석이 다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네가 죄를 지어서 그래.' 욥은 '나는 죄가 없는 데 억울하게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분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유가 뭐라고 얘기를 안하십니다. 욥에 대해서 사단이 와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욥이 왜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욥을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그 복을 뺏어가는 순간, 하나님을 저주하고 멀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그렇게 생각하니? I don't think so(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 나는 욥을 믿어. 내가 그를 보호해주기 때문에 나에게 붙어있는 것만은 아니라는것을 알려주고 싶어.' 그리고 결단하십니다. 그 보호막을 거두십니다. 욥은 계속해서 고난 가운데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호소합니다. 답을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욥기에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시는데. 주로 네가 버드나무 가지로 낚시해서 악어를 꿰 올릴 수 있냐. 내가 천지 창조할 때 네가 옆에 있었니? 너 내가 아는 걸 알 수 있겠니? 너 그게 어떤 것인지 감 잡을 수 있겠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나중에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귀로만 하나님을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나이다.'
'나는 이것 밖에 해줄 말이 없다'고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에게 위로가 임했습니다. 지금은 몽골의 작은 어느 시골에서 개척된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자! 왜 하나님이 이렇게 힘들게 하실까. 이유가 뭘까.
모세가 먼저 하나님께 구합니다. 하나님 다시 한번 구하겠습니다. 제가 볼 때 바른 자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겉똑똑이가 될 때가 있습니다. 맏딸 컴플렉스.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 그냥 다 내려놓을게요. 뭐가 내려놓는 건지 이해 못하시는 거 같아요. 내가 구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이 내려놓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하나님 열심히 믿어도 결국은 이런 걸로 끝나는 거야.’(라는 넋두리가 나옵니다.) 제 아내가 고등학교 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가 모토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기도 전에 미리 체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내려놓음 책을 읽고 화가 났다는 분이 있습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잘 역사해주시는 것 같은데, 나의 경우는 절박한 순간에 기도했을 때 내 뒤통수를 치시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려놓음 책에서는요. 짧은 글에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을 담다 보니까 제게 기다리며 탄식하며 한숨쉬며 고통하는 밤에 대해서는 표현이 안돼 있으니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 같아요.
모세가 구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멈춰라. 그게 우리 안에 복이 됩니다. 사실 저는 몽골에서 사역 잘 하고 있었습니다. 장관과 대통령과도 만나고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고 있었고, 몽골에서 잘 이뤄지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 하나님이 '학교가 너를 의지 못하게 하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해부터 구체적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어디로 떠나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늘 그랬습니다. 먼저 떠나라고 하신 다음에 길을 보여주십니다.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미국에 가서 연구하는 것을 좀 하면 좋겠다'하고 미국으로 왔고,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네시아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요구하신 게 있었습니다. '네 경험을 지워버려라'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제로(0) 베이스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에 넷째를 허락하시면서 제가 밤낮으로 아이를 돌보면서 일을 해야 했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서 가정만을 돌봐야 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제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가 알게 됐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구했지만 응답받지 못한 이 시기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모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너희 연고로, 너희 때문에, 내가 지금 당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데스 가데아 광야 근처에서 백성들이 또 물이 없다고 호소합니다. 이 사람들의 전세대가 그랬습니다. 광야 초기 세대. 이제 광야 생활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또 그럽니다. 막 모세가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반석을 명하라고 했는데 치는 일이 생깁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분노를 자기 방식으로 표현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준 성품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는 인자하고 노하기를 더디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영광을 가렸다. 왜? '가나안 땅에서는 피흘림이 있게 된다. 너의 그러한 분노의 모습으로 가게 되면 여호와가 오해된다.' 여호와가 오해되면 백성들은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여기서 멈춘다.' 모세는 그래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자기가 덤탱이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에 들여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40여년 전에 바로 그 자리에서, 12명의 정탐군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나왔는데 여호수아 갈렙만 의로운 보고를 하고, 다른 이들은 믿음 없는 보고를 합니다. 백성들이 동요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자녀 세대 외에 성인 세대는 모두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한다. 성인 세대는 광야를 벗어나서 가나안을 밟지 못한다. 모세, 너도 마찬가지다.' 모세가 못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것을 알려면 우리가 신약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신약에 어떤 일이 있냐하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풉니다. 모세가 여호수아한테 안수한 것 처럼. 세례요한도 광야, 모세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천국 확장이었고, 여호수아의 사역도 약속받은 땅의 확장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사명이 같습니다. 여호수아와 예수 라는 이름도 어근이 같습니다. 같은 뜻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와 맞물려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어떻게 죽었습니까? 헤롯 왕에게 목잘림을 당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현장에 끌려갈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있다가 하나님을 믿어 구원함을 받았는데 내게 그런 일이 임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악한 왕의 미움을 받아서 목이 짤리는 그 순간, 세례 요한이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두번째 질문, ‘왜 나만.’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어떤 Hurt, 서운함이 오잖아요. 그 화살 끝이 누구를 향하게 되죠? 처음에는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화살 끝이 그 사람 너머에 누구를 겨낭해 있나? '나를 이모양 이꼴로 만든 하나님' 나를 돌아보시기나 하십니까? 차마 밖으로 표현은못해요. 믿음 좋은 척. 속으로는 썩고 있어요. 해결되지 않는.
이 세례요한의 질문이 어떻게 답이 주어지는 지 아세요? 세례요한과 모세가 갖고 있었을 똑같은 질문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을 인용한 그 기도를 철저히 외면하십니다. 하나님은 외면하십니다. 왜? 거기에 세례요한의 사명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예수님의 사명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모세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사명과 세례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예표가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멈추는 것이 복이었습니다.
아프간 사태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밀리에 한국의 어느 장소에 모여서 아프간을 위한 기도회를 했습니다. 거기에는 모인 분들 중에는 오랜동안 아프간에서 선교하던 여성 선교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거기서 같이 사역하던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아들이 외진 마을에 의료 진료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탈레반의 습격을 받아 총으로 난사되게 됩니다. 그리고 뒤 늦게 내려오게 된 그 분 한 분만 살아나셨습니다. '내가 여전히 아프간 땅을 사랑합니다. 그 땅이 여전히 내 짐(기도제목)입니다’라고 그 분은 고백했습니다.
아프간에서 풀려났던 형제자매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게 뭐냐. 여자로서 남자들과 같이 묶여잇는 거였데요. 묶여있는 상태에서 대 소변을 다 해결해야 했답니다.' 소변은 그렇다 치고 대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어서 서로 보이는 앞에서 대변을 보고, 그것을 손톱으로 잘라서 그 조그만한 구멍으로 모두 집어넣었어야 했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아프간 땅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됐다라고. 그래서 평생 그 땅을 위해 기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아픔 뒤에 사명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시베리아 지역을 다니다가 거기에 어느 한 목사님이 놀랍게 사역이 일어나는 것을 봤습니다.시베리아 지역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교회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 교회 들어가서 보니까 한 분이 교도소 사역을 잘 하시는 데, 교도소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또 마약갱생원 사역을 하고 있는데 또 그 분이 마약 중독자 출신이었습니다.
이 교회에 뭔가 있구나. 기도하는 데 하나님께서 내가 이 교회에 숨겨둔 비밀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날 그 목사님이 오셨을 때 제가 그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두시간동안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한 사람을 만났을 때는 빨리 요점을 얻어야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비밀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히려 한국교회에 배울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에 비밀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해 주십시요.'
그랬더니 그 분이 자신이 벨로로시 출신인데 시베리아로 가서 선교하면서, 문화가 없고 추운 곳에서 너무 힘들었데요. 그러던 어느날 자기 큰 아들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3일 뒤에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들의 사인을 알려고 찾아헤맸을 때, 그 쪽 정보부에서 사람이 왔답니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마 그러면 너 교회가 문을 닫게 될 거다.'
'내가 갈 때가 됐구나.' 확증을 하려고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얘 내가 너에게 줄 사역이 있다. 너희 교인들로 하여금, 이 땅에 있는 모든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너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에게까지 다가가게 하라.' 그 말씀에 이 분이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사역을 받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면 이게 사역의 비밀일 겁니다.라고. 하나님이 저에게 깨달음을 주셧습니다. "너의 서운함, 너의 상처 뒤에, 너에게 줄 사명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있는 한인 2세들을 깨우라고 사용하겠다고 말씀을 주셨을 때, 또 많은 영적 리더들에게 말씀을 주셨을 때 제가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이 아이들이에요? 동남아에서 자란 아이들이 한국말도 잘하고 문화적응력도 있고 돌파력도 있고 더 잘자랐는데, 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어렵게 사는 것 같고 뭔가 해결되지 않는 것때문에 주저 주저하는 이들을 쓸려고 하십니까? 제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말씀이 있었어요.
'내가 이들이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이들이 갖고 있는 학력, 재능, 영어 능력 때문이 아니다. 주류사회에서 비주류로 산다는 것의 고통을 이들은 안다. 압박받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아버지 어머니 세대들이 이민자로 사는 아픔과 애환이 그들에게 전이돼있다. 내가 그들의 아픔을 사용할 것이다.'
사명 뒤에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픔이 그 분의 사명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치유하는 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세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을 밟게 됩니다. 예수님과 변화산상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변화산상에 섰습니다.
“예수님의 아픔과 상처가 우리의 소망이 될 겁니다. 그 소망을 붙드신다면 여러분은 무너짐 속에서 서운함 가운데 아픔 가운데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놀라운 사명을 붙들수 있게 됩니다.”
권나라 기자
‘서운함의 이면에서(신명기 3:22~28)’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전한 이 선교사는 “여러분의 아픔 뒤에 사명이 숨겨져 있다”며 현상을 바라보지 말고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길 권면했다.
이 선교사는 “예수님 믿으면 편안한 상황이 지속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뒤통수를 치시는 것 같은 상황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며 “(우리에게 닥치는 힘든 상황을 잘 해석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을 넘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며 말씀을 이어갔다.
“평생 소원으로 여기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모세가 구했을 때 하나님은 ‘여기서 멈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이 선교사는 “모세에게 왜 못들어간다고 하셨을까? 이것을 알려면 신약으로 들어가야 한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와 맞물려 있다. 모세가 여호수아한테 안수한 것처럼,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의 사역이 천국 확장이었듯이 여호수아의 사역도 약속받은 땅을 확장하는 사역이었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에게 목잘림을 당해 죽음을 당하는 순간 질문했을 것입니다. ‘왜?’라고. 이 세례요한의 질문이 어떻게 답이 주어지는 지 아세요? 세례요한과 모세가 갖고 있었을 똑같은 질문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을 인용한 그 기도를 철저히 외면하십니다. 하나님은 외면하십니다. 왜? 거기에 세례요한의 사명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예수님의 사명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모세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사명과 세례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예표가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멈추는 것이 복이었습니다.”
그는 “사명 뒤에 아픔이 있다”며 “예수님의 아픔이 그 분의 사명과 연결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치유하는 자로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선교사는 “모세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을 밟게 된다. 예수님과 변화산상에서 말이다”라며 “예수님의 아픔과 상처가 우리의 소망이 될 것이다. 그 소망을 붙드신다면 여러분은 무너짐 속에서, 서운함 가운데, 아픔 가운데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놀라운 사명을 붙들수 있게 된다”라고 말씀을 맺었다.
한편, 이용규 선교사는 오는 29일, 30일 오후 8시 베데스다 소재 워싱턴한인연합장로교회(담임 김해길 목사, 7009 Wilson Lane, Bethesda, MD 20817)에서 부흥성회를 인도한다.
“서운함의 이면에서”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5월 27일, 이용규 선교사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모세한테 아주 서운한 말씀을 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어떤 종인데, 하나님을 그렇게 열심히 섬기고 순종하고 충성되게 40년 간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증거했던 종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매우 서운하게 만드십니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가?
모세가 소원이 있었습니다. 40년 동안 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 약속의 땅. 그 땅을 밟아만 보게 해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만해도 족하니 더 이상 구하지도 말아라. 너는 못들어간다. 대신 너의 종 여호수아를 축복하고 안수해서 그 사람이 이 백성들을 데리고 들어가게 하라. 너는 혼자 여기 남겨진다." 하십니다. 굉장히 서운한 말씀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서운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선한 분이라면 왜 모세에게 특별히 이렇게 하셨을까?
2007년도에 이 부분으로 씨름을 많이 했습니다. 1907년의 부흥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한국교회가 기도하고 통성으로 외쳤습니다. 그런데 부흥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기간에 아프간에서 단기선교 사역을 하던 사람들이 인질로 붙잡히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몽골 단기선교 온 청년들이 생각 났습니다. "하나님 왠만하면 들어주십시오. 이 일로 인해서 선교의 문이 닫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 같은데, 이들을 긍휼히 불쌍히 여겨 달라"며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다가 제 마음에 평안함보다, 어쩌면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겁니까? 그때 저에게 던지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는 죽음에 대해서 준비됐니?" 엉뚱해 보이는 답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너는 죽음에 대해 준비됐니?' 의외로 큰 뿌리를 갖고 있는 질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부흥을 위해 기도했는데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부흥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원했던 부흥은 교회가 꽉꽉 가득차고 예배가 힘이 넘치고, 기도하는 대로 탁탁 응답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흥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편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죄 된 마음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임할 때 괴롭고 불편합니다.
제게는 그 질문이 죽음이라는 단어로 다가왔습니다. 너는 이것이 준비되어있니? 우리가 죽지 않고서는 부흥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뒤통수를 치시는 것 같은 상황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믿으면 편안한 상황이 지속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몽골에서 지체들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는 가운데, 제가 신뢰하는 한 청년이 교회 온 지 얼마 안된 자매와 만나 결혼했는데, 결혼 한지 얼마 안돼 신부 어머니가 강도를 만나 백여곳 칼에 찔려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몽골사람들은 샤머니즘 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뭔가 종교를 바꾸면 부정한 일이 생기는 일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당황하면서 두 사람이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그 신랑이 각혈을 하기 시작합니다. 피 투성이. 나중에 보니 폐결핵입니다. 이 친구는 상례에 참석하지 못하고 병원으로 격리됐습니다. 이후에 장인이 찾아와서 '나는 내 아내를 잃었고, 이 딸 밖에 없는데, 너같은 예수쟁이 약골에서 딸을 맡길 생각이 없다. 빨리 떠나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합니다.
너무 낙담이 되어 그날 울면서 시름이 달래기 위해 성경을 보고 있었는데, 성경을 보는 도중에,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당신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나요? 그 청년이 대답합니다. '성경이란 책입니다’ '재미있습니까'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 책 저 좀 빌려주실래요?' 청년이 빌려줬는데 하루가 지나고 보름이 되도록 성경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아다니며 찾다가 그룹으로 모여 성경을 두고 토론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빨리 책 돌려주세요.' '아 잘됐네요. 안 그래도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세 청년이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그 청년들은 ‘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당신을 만나 성경을 보게 됐고, 새로운 소망을 얻게 됐다’는 겁니다.
그 청년도 같이 기뻐하다가 갑자기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 나의 이런 힘든 상황을 통해서 일하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셔서 일하십니까? 그냥 이 사람들에게 가서 전도하라고 말씀하셨으면 제가 안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꼭 이 방법이어야 합니까?" 퀘스천이 있었어요. 병원에서 퇴원하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행사가 이해가 안돼요." 청년에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것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욥기 보니까 욥이 고난을 받는데, 사람들의 해석이 다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네가 죄를 지어서 그래.' 욥은 '나는 죄가 없는 데 억울하게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분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유가 뭐라고 얘기를 안하십니다. 욥에 대해서 사단이 와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욥이 왜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욥을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그 복을 뺏어가는 순간, 하나님을 저주하고 멀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그렇게 생각하니? I don't think so(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 나는 욥을 믿어. 내가 그를 보호해주기 때문에 나에게 붙어있는 것만은 아니라는것을 알려주고 싶어.' 그리고 결단하십니다. 그 보호막을 거두십니다. 욥은 계속해서 고난 가운데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호소합니다. 답을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욥기에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시는데. 주로 네가 버드나무 가지로 낚시해서 악어를 꿰 올릴 수 있냐. 내가 천지 창조할 때 네가 옆에 있었니? 너 내가 아는 걸 알 수 있겠니? 너 그게 어떤 것인지 감 잡을 수 있겠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나중에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귀로만 하나님을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나이다.'
'나는 이것 밖에 해줄 말이 없다'고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에게 위로가 임했습니다. 지금은 몽골의 작은 어느 시골에서 개척된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자! 왜 하나님이 이렇게 힘들게 하실까. 이유가 뭘까.
모세가 먼저 하나님께 구합니다. 하나님 다시 한번 구하겠습니다. 제가 볼 때 바른 자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겉똑똑이가 될 때가 있습니다. 맏딸 컴플렉스.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 그냥 다 내려놓을게요. 뭐가 내려놓는 건지 이해 못하시는 거 같아요. 내가 구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이 내려놓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하나님 열심히 믿어도 결국은 이런 걸로 끝나는 거야.’(라는 넋두리가 나옵니다.) 제 아내가 고등학교 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가 모토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기도 전에 미리 체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내려놓음 책을 읽고 화가 났다는 분이 있습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잘 역사해주시는 것 같은데, 나의 경우는 절박한 순간에 기도했을 때 내 뒤통수를 치시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려놓음 책에서는요. 짧은 글에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을 담다 보니까 제게 기다리며 탄식하며 한숨쉬며 고통하는 밤에 대해서는 표현이 안돼 있으니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 같아요.
모세가 구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멈춰라. 그게 우리 안에 복이 됩니다. 사실 저는 몽골에서 사역 잘 하고 있었습니다. 장관과 대통령과도 만나고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고 있었고, 몽골에서 잘 이뤄지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 하나님이 '학교가 너를 의지 못하게 하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해부터 구체적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어디로 떠나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늘 그랬습니다. 먼저 떠나라고 하신 다음에 길을 보여주십니다.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미국에 가서 연구하는 것을 좀 하면 좋겠다'하고 미국으로 왔고,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네시아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요구하신 게 있었습니다. '네 경험을 지워버려라'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제로(0) 베이스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에 넷째를 허락하시면서 제가 밤낮으로 아이를 돌보면서 일을 해야 했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서 가정만을 돌봐야 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제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가 알게 됐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구했지만 응답받지 못한 이 시기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모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너희 연고로, 너희 때문에, 내가 지금 당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데스 가데아 광야 근처에서 백성들이 또 물이 없다고 호소합니다. 이 사람들의 전세대가 그랬습니다. 광야 초기 세대. 이제 광야 생활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또 그럽니다. 막 모세가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반석을 명하라고 했는데 치는 일이 생깁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분노를 자기 방식으로 표현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준 성품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는 인자하고 노하기를 더디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영광을 가렸다. 왜? '가나안 땅에서는 피흘림이 있게 된다. 너의 그러한 분노의 모습으로 가게 되면 여호와가 오해된다.' 여호와가 오해되면 백성들은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여기서 멈춘다.' 모세는 그래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자기가 덤탱이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에 들여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40여년 전에 바로 그 자리에서, 12명의 정탐군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나왔는데 여호수아 갈렙만 의로운 보고를 하고, 다른 이들은 믿음 없는 보고를 합니다. 백성들이 동요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자녀 세대 외에 성인 세대는 모두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한다. 성인 세대는 광야를 벗어나서 가나안을 밟지 못한다. 모세, 너도 마찬가지다.' 모세가 못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것을 알려면 우리가 신약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신약에 어떤 일이 있냐하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풉니다. 모세가 여호수아한테 안수한 것 처럼. 세례요한도 광야, 모세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천국 확장이었고, 여호수아의 사역도 약속받은 땅의 확장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사명이 같습니다. 여호수아와 예수 라는 이름도 어근이 같습니다. 같은 뜻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와 맞물려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어떻게 죽었습니까? 헤롯 왕에게 목잘림을 당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현장에 끌려갈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있다가 하나님을 믿어 구원함을 받았는데 내게 그런 일이 임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악한 왕의 미움을 받아서 목이 짤리는 그 순간, 세례 요한이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두번째 질문, ‘왜 나만.’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어떤 Hurt, 서운함이 오잖아요. 그 화살 끝이 누구를 향하게 되죠? 처음에는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화살 끝이 그 사람 너머에 누구를 겨낭해 있나? '나를 이모양 이꼴로 만든 하나님' 나를 돌아보시기나 하십니까? 차마 밖으로 표현은못해요. 믿음 좋은 척. 속으로는 썩고 있어요. 해결되지 않는.
이 세례요한의 질문이 어떻게 답이 주어지는 지 아세요? 세례요한과 모세가 갖고 있었을 똑같은 질문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을 인용한 그 기도를 철저히 외면하십니다. 하나님은 외면하십니다. 왜? 거기에 세례요한의 사명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예수님의 사명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모세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사명과 세례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예표가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멈추는 것이 복이었습니다.
아프간 사태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밀리에 한국의 어느 장소에 모여서 아프간을 위한 기도회를 했습니다. 거기에는 모인 분들 중에는 오랜동안 아프간에서 선교하던 여성 선교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거기서 같이 사역하던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아들이 외진 마을에 의료 진료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탈레반의 습격을 받아 총으로 난사되게 됩니다. 그리고 뒤 늦게 내려오게 된 그 분 한 분만 살아나셨습니다. '내가 여전히 아프간 땅을 사랑합니다. 그 땅이 여전히 내 짐(기도제목)입니다’라고 그 분은 고백했습니다.
아프간에서 풀려났던 형제자매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게 뭐냐. 여자로서 남자들과 같이 묶여잇는 거였데요. 묶여있는 상태에서 대 소변을 다 해결해야 했답니다.' 소변은 그렇다 치고 대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어서 서로 보이는 앞에서 대변을 보고, 그것을 손톱으로 잘라서 그 조그만한 구멍으로 모두 집어넣었어야 했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아프간 땅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됐다라고. 그래서 평생 그 땅을 위해 기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아픔 뒤에 사명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시베리아 지역을 다니다가 거기에 어느 한 목사님이 놀랍게 사역이 일어나는 것을 봤습니다.시베리아 지역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교회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 교회 들어가서 보니까 한 분이 교도소 사역을 잘 하시는 데, 교도소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또 마약갱생원 사역을 하고 있는데 또 그 분이 마약 중독자 출신이었습니다.
이 교회에 뭔가 있구나. 기도하는 데 하나님께서 내가 이 교회에 숨겨둔 비밀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날 그 목사님이 오셨을 때 제가 그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두시간동안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한 사람을 만났을 때는 빨리 요점을 얻어야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비밀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히려 한국교회에 배울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에 비밀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해 주십시요.'
그랬더니 그 분이 자신이 벨로로시 출신인데 시베리아로 가서 선교하면서, 문화가 없고 추운 곳에서 너무 힘들었데요. 그러던 어느날 자기 큰 아들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3일 뒤에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들의 사인을 알려고 찾아헤맸을 때, 그 쪽 정보부에서 사람이 왔답니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마 그러면 너 교회가 문을 닫게 될 거다.'
'내가 갈 때가 됐구나.' 확증을 하려고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얘 내가 너에게 줄 사역이 있다. 너희 교인들로 하여금, 이 땅에 있는 모든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너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에게까지 다가가게 하라.' 그 말씀에 이 분이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사역을 받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면 이게 사역의 비밀일 겁니다.라고. 하나님이 저에게 깨달음을 주셧습니다. "너의 서운함, 너의 상처 뒤에, 너에게 줄 사명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있는 한인 2세들을 깨우라고 사용하겠다고 말씀을 주셨을 때, 또 많은 영적 리더들에게 말씀을 주셨을 때 제가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이 아이들이에요? 동남아에서 자란 아이들이 한국말도 잘하고 문화적응력도 있고 돌파력도 있고 더 잘자랐는데, 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어렵게 사는 것 같고 뭔가 해결되지 않는 것때문에 주저 주저하는 이들을 쓸려고 하십니까? 제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말씀이 있었어요.
'내가 이들이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이들이 갖고 있는 학력, 재능, 영어 능력 때문이 아니다. 주류사회에서 비주류로 산다는 것의 고통을 이들은 안다. 압박받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아버지 어머니 세대들이 이민자로 사는 아픔과 애환이 그들에게 전이돼있다. 내가 그들의 아픔을 사용할 것이다.'
사명 뒤에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픔이 그 분의 사명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치유하는 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세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을 밟게 됩니다. 예수님과 변화산상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변화산상에 섰습니다.
“예수님의 아픔과 상처가 우리의 소망이 될 겁니다. 그 소망을 붙드신다면 여러분은 무너짐 속에서 서운함 가운데 아픔 가운데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놀라운 사명을 붙들수 있게 됩니다.”
권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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