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관희 목사님이 쓴 수필 “다시 연애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를 읽었다. 목사님의 글 치고는 제목이 좀 파격적이다 싶어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보았는데 퍽 감동적이었다. 이 목사님은 자신이 배운 한국말 중 가장 황홀한 말이 “연애”라는 단어였고 나이든 지금까지 그 말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고 서두를 열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평생을 연애감정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한 사람이요. 인생을 살면서 단 한번도 누군가를 가슴이 저리도록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 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보지 않고는 결코 시를, 문학을, 철학을, 정치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자의 과학은 결국은 파괴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썼다.

이 목사님은 공산주의 같은 이념에 빠지거나 수백만의 사람들을 냉혹하게 죽이는 사람들은 필경 누군가 한 사람의 영혼을 가슴 깊이 사랑해 본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러기에 온 인류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것은 젊은 날 이름도 모르는 이웃 동네의 처녀를 생각하며 밤을 세는 그 사랑의 가슴이라고 말하며 컴퓨터의 시대를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대로 다시 돌려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본래 문학을 전공하신 목사님의 글이기에 다소 문학적이고 낭만적인 감상이 있기는 하지만 강조하고자 하는 그 주제만큼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주님이 교회들을 향하여 첫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의 요지와 일맥상통하는 글이 아닌가 싶다. 왜 문득 이 글이 다시 생각났는가 하면 며칠 전 아침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마음이 붕 뜬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이 묘하게도 꼭 연애하는 기분같이 느껴졌다. 이 나이에 새삼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이것이 ‘웬 기분인가’ 하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님을 향한 사모와 기쁨의 마음이었다.

몇 년 전 내 기도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이전에는 기도의 가장 큰 줄거리가 언제나 간구였다. 교회를 위해, 가족들을 위해, 하루의 사역을 위해 간구하는 내용이 전체 기도의 70-8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전 갑자기 매일 이렇게 주님에게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만 하다가 평생을 보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의 필요나 연약함이 많기 때문에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제부터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조금 더 많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의 고백을 조금씩 늘려갔다. 주님을 향해 “I Love You Lord! I Love you Jesus!”라는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고백을 하고 나면 내 마음에 기쁨이 가득했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이 마음속에서 샘솟듯 솟아 올랐다. 한편으로는 주님이 “나도 너를 사랑한다. 이만큼!” 하면서 못 박힌 손을 펼쳐 보여주시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기도 속에 조금씩 사랑의 고백과 느낌이 깊어져 가면서 가끔씩은 이 아침처럼 새롭게 연애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마치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모습이 하루 온종일 마음 속을 떠나지 않듯이 주님의 모습과 음성이 마음 속을 꽉 채우는 느낌을 받는다.

정말 그렇다. 이것은 뜨겁고 설레는 연애의 감정이다. 그러나 마누라 눈치 볼 이유 없고 양심에 단 한 점 거리낌 없는 연애이다. 그리고 이 연애의 감정이 있는 하루는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다. 그래서 난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을 향해서도 외치고 싶다. “다시 연애하는 세상, 다시 연애하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