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21-22절,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여기의 ‘더 가시다가’라는 이 말도 참 중요한 말이다. 주님이 더 가시다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부르셨다. 그리고 더 가시다가 저희들까지 부르신 것이다. 만일 베드로와 요한만 부르시고 더 가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까지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 귀한 직분을 한 집에 둘 씩이나 주시는지. 그러나 그분은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요한 웨슬레, 찰스 웨슬레도 형제인데 주님은 그 둘을 함께 불러서 크게 사용하셨다. 어쨌든 원하기만 하면 한 집안에서 둘 아니라 셋도 사용하신다.

여기서 주님이 부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 음성은 너무나 귀하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가는 건 소용이 없다. 공허한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따라오라는 이 한 마디 음성, 나는 이 세상에 이 음성보다 더 귀한 음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따라오너라!’ 주님을 따를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따라야 한다. 주님은 다만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는데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주 예수님을 좇았다. 여기에서 주님은 “베드로야, 나를 따라오너라. 그 대신에 네 아비를 버리거라” 하지 않으셨다. 다만 따라오라고 하니까 이들은 응당 버리고 따를 줄을 알았다.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겨 가지고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따른 것이다.

그 뒤에 베드로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요한의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다 버려두었다. 주 예수님을 따르려면 버리지 않으면 못 따른다. 후에 주님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모든 것을 버리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다 버려야 제자가 된다. 요한과 야고보, 특히 요한은 그물을 깁다가 부르심을 받았지 않았는가? 결국 요한복음, 요한일,이,삼서, 요한계시록, 이 모두는 각각 그 분야에서 보충하고 마무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요한복음은 네 복음서의 마지막에서, 요한서신은 모든 서신서의 마지막에서, 요한계시록은 모든 성경의 마지막에서 보충하고 보완하고 마무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요한은 찬찬한 사람이다. 그물을 깁는 것은 찬찬하지 않으면 못한다. 아마 베드로는 그렇게 차분한 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성급한 편이다. 그러나 요한은 섬세하다. 또 아주 온유한 것 같다. 예수님의 품에 기댄 그 사람이 요한이다. 그리고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기록한 사람이 요한이다.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붉은 피만 보이지 물은 안 보인다.

그는 매우 섬세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한 병사가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니까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십자가 가장 가까이에 요한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주님이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손이 못박히셔서 손가락으로 모친을 가리키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