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제대로 된 기독교 신앙을 가지신 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천국,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과학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기독교를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6살 때였다. 1955년도쯤이었으니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다. 6.25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때는 학용품도, 먹을 것도 귀했는데, 동네 교회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바이블 클래스를 열면서 그 클래스에 참석하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학용품을 선물로 줬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다 거길 나갔다. 나는 호기심은 있었지만, 그 곳에 가지 않고 있었는데, 그 바이블 클래스가 끝나는 날, 친구가 “오늘 교회를 가면 좋은 선물을 준다. 꼭 가자”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회라는 곳에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다.
교회에 이르자 친구들은 먼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좀 뒤쳐져서 맨 골찌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주일학교 선생님 한 명이 “넌 이제까지 한번도 안 나왔다가 오늘만 상타러 온거냐? 못 들어간다.”하면서 나를 밀쳐 교회에서 쫓아냈다. 선물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매일 참석한 사람만 선물을 주고 싶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교회에서 쫓겨나 집으로 걸어오면서 많이 울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아.. 하나님은 이렇게 가혹하신 분이시구나. 인정사정을 안 보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것이었다. 2대 독자로 태어나 부모한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나로서는 당연히 기독교에 대한 인상이 좋게 박힐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성장하면서 학교에서 배우는 진화론에 의거하여 기독교를 보니 더더욱 기독교가 우스꽝스러워보였다.
그런데, 내 서울사대부고 시절에 만난 서울대 교생선생님 한 명이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 교생선생님은 우리 학교로 실습을 나오자마자 학생들 몇 명을 놓고 전도를 했다.
“얘들아. 너희들 살다가 근심, 걱정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어린아이가 부모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도와주신단다. 그 분은 아버지되시고 우린 다 그의 자녀인 거야.”
그는 이어 죽을 병에 걸렸다가 하나님께 기도해 살아난 어떤 사람 이야기까지 쭉 끌고 나갔다. 그의 그런 모습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비이성적인 사람들만 믿는다고 생각했던 기독교를, 우리 나라 최고 학부인 서울대를 다니는 지성인이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에서 꼴찌하는 애들이나 가는, 항상 정원미달인 신학교, 과학도 몰라서 천둥, 번개치면 무서워서 신신령께 비는 마음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께 비는 종교가 기독교라고만 생각했던 내게 교생 선생님의 확신은 정말 큰 충격이었다.
그즈음에 내게 일어났던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우리 학교는 3학년 학생들이 하는 규율뷰가 참 무서웠는데, 학생들의 규율을 잡기 위해 그들은 수시로 아이들을 때렸다. 1,2학년 학생들의 정신이 해이해졌다고 느끼면 여학생들을 집에 보내고 나서 모두에게 몽둥이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지각한 이들은 물론 예외없이 맞았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지각을 하게된 것이다. 학교로 오는 길에 내가 탄 버스가 고장난 덕분이었다.
너무나 걱정이 된 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갑자기 ‘근심,걱정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교생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 하늘을 쳐다보면서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항상 2층 창문가에 앉아 아침마다 애들이 매맞는 것을 보아오던 나로서는 그 매가 너무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그 매를 피할 길이 없었다. 마음이 간절해졌다.
입술이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가운데, 드디어 학교에 도착했다.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규율뷰 학생들이 매일마다 서있는 수위실 앞이 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첫번째 기도응답이었다. 그 때부터 내겐 언제나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어떤 교회나 목사님으로부터 전도를 받아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었다. 너무도 여러번, 어떤 기도라도 꾸짖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는 하나님, 그 좋으신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 다음호에 계속
정리: 김아현 기자 ahkim@ch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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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기]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2)
맨하탄기독실업인회 최영태 회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내 초기 신앙의 단계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수히 많은 내 기도를 일일이 다 들어주셨다. 독일어 시험을 위해 기도했더니 시험 전날 공부한 독일어 단어만 출제된 일이라든지, 짝사랑한 여학생을 위해 기도했더니 기적적으로 만나게 해 주신 일이라든지, 서울대학교에, 그것도 커트라인으로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했더니 그대로 이뤄주신 일이라든지…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나의 소원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시고 이뤄주셨기 때문에 나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진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과연 누구시란 말인가.
나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가지 철학, 종교 서적들을 뒤적이기 시작했고, 불교, 유교, 샤머니즘을 거친 오랜 방황 끝에, 집 서가 구석에 먼지가 하?方?쌓인 채 꽂혀있는 성경책을 집어들었다. 창세기 첫 장이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일체의 앞뒤 설명도 없는 하나님의 권능의 선언. 나는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항거도, 반박도 할 수 없는 이 실존이요, 실재 앞에 인간적인 내 세상지식들은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기분이었다. 이 때 나는 내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참 하나님을 발견한 이후 나는 이 좋으신 하나님을 알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기회가 닿는 대로 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동네 아이들에게 전도하며 빵과 과자를 나눠주다 간첩으로 오인받은 적도 있었다. 어느날 밤, 좌석 버스에 시체들만 가득 앉아있는 꿈을 꾼 이후로는 버스에서도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으나 일단 버스 전도를 시작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지하게 간증을 들어주어 점점 자신감있게 전하게 되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나를 다시 살리시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얼마 전부터 원인 모르게 배가 슬슬 아프기 시작하더니 점차 통증이 심해지고, 빈도가 늘었다. 진단해보니 장결핵으로, 며칠 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해서도 하루 한번 통원 치료를 받아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일 스트렙토 마이신 주사를 맞고, ‘아이나’와 ‘파스’라는 약을 식사 후 한주먹 분량으로 먹어도 결핵균은 잘 퇴치 되지 않았고, 결국, 혈관 군데군데 침입해 피부에 붉은 반점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던 그 분이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실까. 마음의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내 내적 갈등에 대해 그 분께서는 창세기 5장 45절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니라.”라고 대답해오셨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시기 때문에, 질병이나 재난이나 홍수라고 해서 선인은 피하게 하시고, 악인과 불의한 자에게만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는 대답같았다. 결국은 태도의 차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질병으로 인해 더욱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짜증과 신세타령, 한탄과 비통으로 더욱 더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있은 이후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결핵균은 뇌에까지 침입해 천장을 쳐다보고 누워 스스로 몸을 돌리지도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감사기도를 올렸다. “자비의 하나님! 온전히 주의 손에 이 한 몸 맡깁니다. 이제까지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도가 끝나자 졸음이 밀려오더니 혼수상태가 되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목에 무엇이 걸렸는지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 질식할 것만 같았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순간, 어디서 그렇게 힘이 솟았는지 갑자기 덮은 이불을 박차고 마당으로 뛰쳐나간 나는 마당 한구석 수챗구멍에 대고 목에 걸려있는 덩어리를 토해냈다. 피와 고름, 새카만 실 같은 것이 섞여있는 구슬만한 덩어리였다. 그것을 토해낸 이후 숨이 편안해지고 온 몸이 가뿐해졌다. 하나님께서 기어코 나를 다시 살리신 것이었다.
기적이었다. 3개월 후 나는 의사로부터 축하메세지와 함께 완치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 다음호에 계속
정리: 김아현 기자 ahkim@ch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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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기]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3)
맨하탄 기독실업인회 최영태 회장
미국으로
1973년 7월, 아버지와 나는 청교도 정신과 개척 정신이 이룩한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누님 한 분은 결혼으로, 여동생 둘은 학업차, 어머니는 그 여동생들을 돌보러 이미 미국으로 건너가신 후였다. 한국에 남아있던 아버지와 나는 미국과 한국 두 살림을 꾸리는 것을 버거워하다가 심사숙고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 식구들과 살림을 합치기로 결정하고 미국 영주권을 얻었다.
비즈니스와 신앙, 내게는 하나
광활한 대륙, 기회의 나라에 도착한 나는 남다른 감회를 갖고 이 세계 최고의 나라에서 나의 이상과 야심의 날개를 활짝 펼쳐보리라고 다짐했으나, 미국의 현실은 내가 그리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뉴욕 맨해턴 뒷골목은 지저분했고,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각종 범죄가 우글거렸다. 나는 일단 뉴욕의 하층 노동판에라도 끼어들어 밥벌이라도 해내야 했기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느 한국 사람의 소개로 택시 운전을 하게 됐다.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이었는지 뉴욕의 길을 익히는 기간동안 만난 손님들은 다들 길을 모르는 나를 이해주었고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간증했다. 그들이 유명인이든, 소시민이든 가리지 않았다. 택시 운전 중 만난 어떤 유대인은 “너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겨우 택시 운전사가 됐느냐?”며 “우리 하나님을 당신 같은 이방인들이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고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8개월간의 택시 운전수 생활을 통해 나는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다음으로 얻게 된 직업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던 이시즈카 마쓰모토 공인 회계사 사무소의 보조 회계사였다. 미숙한 영어에 회계, 경리 업무에는 전혀 경험이 없었지만, 야간에 대학에서 회계학 공부를 한다는 조건부로 취직이 된 것이다. 나는 회계사 사무실을 출입하는 많은 고객들에게 성실하게 업무를 처리해주면서 한편으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간증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나의 이런 간증 전도에 대부분 긍정적으로 반응해주었다. 그러나, 이시즈카씨의 동업자로 들어온 포머란츠라는 유대인 공인 회계사는 “비즈니스와 신앙을 구별해달라”며 내게 전도 금지 명령을 내렸다.
You are now street Preacher!
마음이 답답해진 나는 퇴근 후 상가가 줄지어 있는 42번가 그랜드 센트럴 역 근처를 배회했다. 크리스마스를 얼마남지 않은 탓인지 사람들은 매우 바빠보였다. 무심히 사람들을 쳐다보다 그 가운데 실의에 빠진 채 앉아있는 한 흑인 거지를 발견했다. 동냥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는 훗날 나와 절친한 친구사이가 된 어네스트라는 이름의 거지였다. 원래는 작가지망생이었던 그는 과로로 병이 들어 일을 못하는 사이 렌트비를 못내 집에서 쫓겨난 후 거지가 된 것이었다. 그에게 동정심이 인 나는 매일 매일 그를 만나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다. 그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매일 그를 만날 때마다 1불씩, 2불씩 주는 것을 알고 내게 다가오는 거지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나는 것이었다. 회계사 사무실로부터 받는 월급을 몽땅 내놓고, 그동안 모아 은행에 저축해뒀던 3천불까지 다 쓴 후에도 구제사업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사무실 복도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이에게 간증전도를 했다가 회사에 그 사실이 알려져 파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던 그가 부사장 포머란츠씨의 고객이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파면되고 착잡한 심정으로 귀가한 나는 밤새 뒤척이다 밤늦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You are now street Preacher(너는 이제부터 거리의 전도사다!)” 하나님의 목소리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후 맨해턴 14가부터 72번까지 매일 사람들을 만나 간증 전도를 시작했다. 전도하다가 거리에서 거지들을 만나면, 그들은 내가 파면된 것을 알고 한결같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을 전해왔다. 그들에게 건네주는 돈도 일제히 안 받겠다고 말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같이 시작된 거리의 전도사 생활은 3개월간 이어졌다. 어떤 날은 하루에 70명을 만나기도 했다. 전도에는 많은 성과가 있었으나 재정은 바닥나 조금씩 빚이 늘어나고 있었다. 미래가 암담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나를 위한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실 줄이야.. - 다음호에 계속
그리고, 또 하나 내가 기독교를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6살 때였다. 1955년도쯤이었으니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다. 6.25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때는 학용품도, 먹을 것도 귀했는데, 동네 교회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바이블 클래스를 열면서 그 클래스에 참석하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학용품을 선물로 줬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다 거길 나갔다. 나는 호기심은 있었지만, 그 곳에 가지 않고 있었는데, 그 바이블 클래스가 끝나는 날, 친구가 “오늘 교회를 가면 좋은 선물을 준다. 꼭 가자”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회라는 곳에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다.
교회에 이르자 친구들은 먼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좀 뒤쳐져서 맨 골찌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주일학교 선생님 한 명이 “넌 이제까지 한번도 안 나왔다가 오늘만 상타러 온거냐? 못 들어간다.”하면서 나를 밀쳐 교회에서 쫓아냈다. 선물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매일 참석한 사람만 선물을 주고 싶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교회에서 쫓겨나 집으로 걸어오면서 많이 울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아.. 하나님은 이렇게 가혹하신 분이시구나. 인정사정을 안 보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것이었다. 2대 독자로 태어나 부모한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나로서는 당연히 기독교에 대한 인상이 좋게 박힐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성장하면서 학교에서 배우는 진화론에 의거하여 기독교를 보니 더더욱 기독교가 우스꽝스러워보였다.
그런데, 내 서울사대부고 시절에 만난 서울대 교생선생님 한 명이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 교생선생님은 우리 학교로 실습을 나오자마자 학생들 몇 명을 놓고 전도를 했다.
“얘들아. 너희들 살다가 근심, 걱정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어린아이가 부모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도와주신단다. 그 분은 아버지되시고 우린 다 그의 자녀인 거야.”
그는 이어 죽을 병에 걸렸다가 하나님께 기도해 살아난 어떤 사람 이야기까지 쭉 끌고 나갔다. 그의 그런 모습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비이성적인 사람들만 믿는다고 생각했던 기독교를, 우리 나라 최고 학부인 서울대를 다니는 지성인이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에서 꼴찌하는 애들이나 가는, 항상 정원미달인 신학교, 과학도 몰라서 천둥, 번개치면 무서워서 신신령께 비는 마음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께 비는 종교가 기독교라고만 생각했던 내게 교생 선생님의 확신은 정말 큰 충격이었다.
그즈음에 내게 일어났던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우리 학교는 3학년 학생들이 하는 규율뷰가 참 무서웠는데, 학생들의 규율을 잡기 위해 그들은 수시로 아이들을 때렸다. 1,2학년 학생들의 정신이 해이해졌다고 느끼면 여학생들을 집에 보내고 나서 모두에게 몽둥이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지각한 이들은 물론 예외없이 맞았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지각을 하게된 것이다. 학교로 오는 길에 내가 탄 버스가 고장난 덕분이었다.
너무나 걱정이 된 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갑자기 ‘근심,걱정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교생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 하늘을 쳐다보면서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항상 2층 창문가에 앉아 아침마다 애들이 매맞는 것을 보아오던 나로서는 그 매가 너무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그 매를 피할 길이 없었다. 마음이 간절해졌다.
입술이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가운데, 드디어 학교에 도착했다.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규율뷰 학생들이 매일마다 서있는 수위실 앞이 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첫번째 기도응답이었다. 그 때부터 내겐 언제나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어떤 교회나 목사님으로부터 전도를 받아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었다. 너무도 여러번, 어떤 기도라도 꾸짖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는 하나님, 그 좋으신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 다음호에 계속
정리: 김아현 기자 ahkim@ch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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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기]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2)
맨하탄기독실업인회 최영태 회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내 초기 신앙의 단계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수히 많은 내 기도를 일일이 다 들어주셨다. 독일어 시험을 위해 기도했더니 시험 전날 공부한 독일어 단어만 출제된 일이라든지, 짝사랑한 여학생을 위해 기도했더니 기적적으로 만나게 해 주신 일이라든지, 서울대학교에, 그것도 커트라인으로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했더니 그대로 이뤄주신 일이라든지…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나의 소원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시고 이뤄주셨기 때문에 나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진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과연 누구시란 말인가.
나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가지 철학, 종교 서적들을 뒤적이기 시작했고, 불교, 유교, 샤머니즘을 거친 오랜 방황 끝에, 집 서가 구석에 먼지가 하?方?쌓인 채 꽂혀있는 성경책을 집어들었다. 창세기 첫 장이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일체의 앞뒤 설명도 없는 하나님의 권능의 선언. 나는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항거도, 반박도 할 수 없는 이 실존이요, 실재 앞에 인간적인 내 세상지식들은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기분이었다. 이 때 나는 내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참 하나님을 발견한 이후 나는 이 좋으신 하나님을 알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기회가 닿는 대로 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동네 아이들에게 전도하며 빵과 과자를 나눠주다 간첩으로 오인받은 적도 있었다. 어느날 밤, 좌석 버스에 시체들만 가득 앉아있는 꿈을 꾼 이후로는 버스에서도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으나 일단 버스 전도를 시작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지하게 간증을 들어주어 점점 자신감있게 전하게 되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나를 다시 살리시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얼마 전부터 원인 모르게 배가 슬슬 아프기 시작하더니 점차 통증이 심해지고, 빈도가 늘었다. 진단해보니 장결핵으로, 며칠 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해서도 하루 한번 통원 치료를 받아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일 스트렙토 마이신 주사를 맞고, ‘아이나’와 ‘파스’라는 약을 식사 후 한주먹 분량으로 먹어도 결핵균은 잘 퇴치 되지 않았고, 결국, 혈관 군데군데 침입해 피부에 붉은 반점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던 그 분이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실까. 마음의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내 내적 갈등에 대해 그 분께서는 창세기 5장 45절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니라.”라고 대답해오셨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시기 때문에, 질병이나 재난이나 홍수라고 해서 선인은 피하게 하시고, 악인과 불의한 자에게만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는 대답같았다. 결국은 태도의 차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질병으로 인해 더욱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짜증과 신세타령, 한탄과 비통으로 더욱 더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있은 이후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결핵균은 뇌에까지 침입해 천장을 쳐다보고 누워 스스로 몸을 돌리지도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감사기도를 올렸다. “자비의 하나님! 온전히 주의 손에 이 한 몸 맡깁니다. 이제까지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도가 끝나자 졸음이 밀려오더니 혼수상태가 되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목에 무엇이 걸렸는지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 질식할 것만 같았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순간, 어디서 그렇게 힘이 솟았는지 갑자기 덮은 이불을 박차고 마당으로 뛰쳐나간 나는 마당 한구석 수챗구멍에 대고 목에 걸려있는 덩어리를 토해냈다. 피와 고름, 새카만 실 같은 것이 섞여있는 구슬만한 덩어리였다. 그것을 토해낸 이후 숨이 편안해지고 온 몸이 가뿐해졌다. 하나님께서 기어코 나를 다시 살리신 것이었다.
기적이었다. 3개월 후 나는 의사로부터 축하메세지와 함께 완치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 다음호에 계속
정리: 김아현 기자 ahkim@ch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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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기]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3)
맨하탄 기독실업인회 최영태 회장
미국으로
1973년 7월, 아버지와 나는 청교도 정신과 개척 정신이 이룩한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누님 한 분은 결혼으로, 여동생 둘은 학업차, 어머니는 그 여동생들을 돌보러 이미 미국으로 건너가신 후였다. 한국에 남아있던 아버지와 나는 미국과 한국 두 살림을 꾸리는 것을 버거워하다가 심사숙고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 식구들과 살림을 합치기로 결정하고 미국 영주권을 얻었다.
비즈니스와 신앙, 내게는 하나
광활한 대륙, 기회의 나라에 도착한 나는 남다른 감회를 갖고 이 세계 최고의 나라에서 나의 이상과 야심의 날개를 활짝 펼쳐보리라고 다짐했으나, 미국의 현실은 내가 그리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뉴욕 맨해턴 뒷골목은 지저분했고,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각종 범죄가 우글거렸다. 나는 일단 뉴욕의 하층 노동판에라도 끼어들어 밥벌이라도 해내야 했기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느 한국 사람의 소개로 택시 운전을 하게 됐다.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이었는지 뉴욕의 길을 익히는 기간동안 만난 손님들은 다들 길을 모르는 나를 이해주었고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간증했다. 그들이 유명인이든, 소시민이든 가리지 않았다. 택시 운전 중 만난 어떤 유대인은 “너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겨우 택시 운전사가 됐느냐?”며 “우리 하나님을 당신 같은 이방인들이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고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8개월간의 택시 운전수 생활을 통해 나는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다음으로 얻게 된 직업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던 이시즈카 마쓰모토 공인 회계사 사무소의 보조 회계사였다. 미숙한 영어에 회계, 경리 업무에는 전혀 경험이 없었지만, 야간에 대학에서 회계학 공부를 한다는 조건부로 취직이 된 것이다. 나는 회계사 사무실을 출입하는 많은 고객들에게 성실하게 업무를 처리해주면서 한편으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간증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나의 이런 간증 전도에 대부분 긍정적으로 반응해주었다. 그러나, 이시즈카씨의 동업자로 들어온 포머란츠라는 유대인 공인 회계사는 “비즈니스와 신앙을 구별해달라”며 내게 전도 금지 명령을 내렸다.
You are now street Preacher!
마음이 답답해진 나는 퇴근 후 상가가 줄지어 있는 42번가 그랜드 센트럴 역 근처를 배회했다. 크리스마스를 얼마남지 않은 탓인지 사람들은 매우 바빠보였다. 무심히 사람들을 쳐다보다 그 가운데 실의에 빠진 채 앉아있는 한 흑인 거지를 발견했다. 동냥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는 훗날 나와 절친한 친구사이가 된 어네스트라는 이름의 거지였다. 원래는 작가지망생이었던 그는 과로로 병이 들어 일을 못하는 사이 렌트비를 못내 집에서 쫓겨난 후 거지가 된 것이었다. 그에게 동정심이 인 나는 매일 매일 그를 만나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다. 그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매일 그를 만날 때마다 1불씩, 2불씩 주는 것을 알고 내게 다가오는 거지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나는 것이었다. 회계사 사무실로부터 받는 월급을 몽땅 내놓고, 그동안 모아 은행에 저축해뒀던 3천불까지 다 쓴 후에도 구제사업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사무실 복도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이에게 간증전도를 했다가 회사에 그 사실이 알려져 파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던 그가 부사장 포머란츠씨의 고객이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파면되고 착잡한 심정으로 귀가한 나는 밤새 뒤척이다 밤늦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You are now street Preacher(너는 이제부터 거리의 전도사다!)” 하나님의 목소리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후 맨해턴 14가부터 72번까지 매일 사람들을 만나 간증 전도를 시작했다. 전도하다가 거리에서 거지들을 만나면, 그들은 내가 파면된 것을 알고 한결같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을 전해왔다. 그들에게 건네주는 돈도 일제히 안 받겠다고 말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같이 시작된 거리의 전도사 생활은 3개월간 이어졌다. 어떤 날은 하루에 70명을 만나기도 했다. 전도에는 많은 성과가 있었으나 재정은 바닥나 조금씩 빚이 늘어나고 있었다. 미래가 암담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나를 위한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실 줄이야..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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