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교회(담임 고훈 목사)가 5월 들어 ‘하은교회 특수를 노린다’를 주제로 매주 진행하고 있는 수요예배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수요예배를 통해 다양한 은혜를 체험하고 영적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시작된 특수 일정에 많은 성도들이 찾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일에는 한인 홈리스 구제를 위한 클래식 찬양예배를 드렸으며, 9일에는 예수전도단에서 30년간 강사로 활동한 김순호 선교사를 초청해 예배를 드렸다. 또 23일은 드라마 공연, 30일은 김재학 다문화선교사 초청 간증집회가 예정돼 있다.
특히 9일 열린 김순호 선교사 초청 집회에서 김순호 선교사가 전한 메시지는 하은교회를 찾은 많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쳤다. 이날 하은교회 예배당은 남는 자리 없이 성도들로 가득 차는 등 큰 성황을 이뤘다.
김순호 선교사는 이날 벧전 2:1~2을 본문으로 ‘영적 성장’을 주제로 강의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우리가 아는 말씀이 오히려 남을 정죄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으며, 특히 헌신적인 선교생활 중에 본인의 자녀가 마약을 하게 됐을 때의 충격과, 아들을 변화시킨 과정에서 깨달은 ‘완전한 용납’에 대해서 강조했다.
“저는 자녀에게 지금도 담배를 사주는 슬픈 선교사”라고 고백하는 김순호 선교사의 간증과 김순호 선교사가 전한 ‘완전한 용납’과 ‘완전한 사랑’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아픔에 하은교회를 찾은 많은 성도들은 눈물을 흘렸다.
고훈 목사는 “우리가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정죄하는 일이 없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 감사하다”며 “진정한 변화는 완전한 용납과 사랑 가운데서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순호 선교사 강의 주요 내용.
‘영적 성장’ 벧전 2:1~2
성숙한 신앙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도전이요 뜻이다. 성장과 성숙이라는 말씀을 정리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 즉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속한 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룬 사람인가 혹은 분량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성품이 얼마나 내 안에서 드러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본문 중 벧전 2:1에 기록된 5가지 어둠의 영역은 교만의 실체를 말한다. 이 5가지 어둠의 영역을 너희 안에서 버리라고 말한다. 이 명령은 나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내 의지의 선택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버린다는 단어는 상당히 약한 단어인데 성경에 더 강한 표현이 돼 있는 버전이 있다. 너희 안에서 몰아내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강한 표현 죽이라, 또 더 강한 표현은 진멸하라다. 교만을 우리 인생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교만이 우리 삶을 파괴시킨다. 이것이 평생 너희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될 것이라는 성경의 경고이기에 이렇게 강한 표현을 하는 것이다.
교만을 버리고 나면 2장 2절 취하여야 할 것이 나온다. 갓난아이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라하고 나온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1절에 교만은 아주 거친 마음을 이야기한다면 2절은 아주 부드러운 마음이다. 여러분 안에 이 부드러운 심령 겸손의 심령이 자리 잡기 원한다면 먼저 교만의 옷을 벗어야 한다.
우리 안에 경건의 모양이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봐야 한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빛이 흘러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의로운 옷을 덧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만의 악독한 옷을 벗어야 한다. 1절에 나오는 상당히 악독한 단어 때문에 이것을 내 자신에게 적용시키는데 있어서 불편함을 느껴서 피해서 가고자 할지 모른다. 그렇다하더라도 우리가 이 버려야 할 악한 모습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경건주의 외식과 지식주의 외식
악독이란 것은 악하고 독한 것이다. 가장 안 좋은 단어들이 합쳐진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우리 안에 생명이 들어와 있는데 이 거짓이라는 어둠이 있으면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자아가 된다.
외식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보고자 한다. 성경에는 외식을 이야기할 때 두 가지 외식을 말한다. 경건주의 외식과 지식주의 외식이다. 둘 다 무서운 것이다. 오늘 여러분에게 나누려는 것은 경건주의 외식이 아니라 지식주의 외식이다. 경건주의 외식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에 대해 비유하셨다. 겉은 잘 관리돼 있지만 안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안에서 무화과 나무 안에서 열매를 찾으셨지만 잎사귀만 무성했다.
마태복음 7장에 있는 지식주의 외식에 대해서 보기 원한다. 7장 1~5절을 볼 때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보는 자를 말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대방의 연약함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 안에 있는 티를 뽑으려고 한다. 먼저 내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빼고 나서 형제의 티끌을 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신앙의 지식이 있을 것이다. 살아온 분량만큼 쌓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가슴에 쌓이지 않고 지식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란 명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가서 적용을 한다. 쉽게 말해 이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나를 위한 말씀이다. 내 눈의 들보를 빼기 위한 것인데 다른 사람의 티끌을 빼려는데 적용하는 것을 지식주의 외식을 말한다. 가슴으로 듣는 사람들이 아니다. 마음으로 듣는 사람이 아니라 머리로 듣는 사람이다.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든다. 그러나 지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지혜가 있는 사람을 찾고 쓰시기를 원한다.
이 지식주의 외식에 대해서 성경적인 근거를 찾아야 하는데 요한복음 3장8절에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혀서 끌려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서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다. 이 빛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들어왔을 때 바리새인들은 찔려했다. 그런데 그 때 바리새인들이 그 자리를 떠나서는 안됐다. 어찌할지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떠났다.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젊은 사람까지 있었다고 하지만 모두 그 자리에서 떠났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범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용서 속에는 무조건적인 수용이 담겨 있다.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용납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가 또 깊이 살펴보기 원한다.
이 여인은 죄인이다. 바리새인도 죄인이다. 예수님은 의인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 바리새인을 정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신 것은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것이다. 이 비슷한 모습은 장발장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장발장이 은그릇과 은촛대를 훔치다 경찰에 잡혔을 때 이 주교가 장발장에게 했던 말은 예수님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것이었다. 무조건적인 수용과 용납을 통해서 장발장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너무도 잘 알 것이다. 19년이라는 감옥이 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한 마디 무조건적인 용납을 받았을 때 이 죄를 거절하고 이 늙은 주교가 원하는 그런 사람과 같이 살아야겠다는 지진이 장발장의 마음 속에 일어난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라고 하지만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원칙을 들이대지만 하나님 말씀이 그 사람을 죽이는 돌이 된다. 바리새인이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든 것 처럼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에 사랑에 담기지 않고 삶과 함께 흘러가지 않는다면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죽게 하는 돌이 될 것이다.
저의 마지막 말씀이 여러분 자신과 삶 가운데 또 관계 속에 충분한 이해를 줄 것이라 믿는다. 저에게 자녀들이 있는데 YM이라는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공동생활을 했다. YM 초기에는 공동체 생활에 아이가 없었다. 그 공동체에는 우리 아이가 유일했다. 아이는 아이의 정서가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과 같은 정서와 만났을 때 안정감을 갖는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그럴 수 없었고 늘 마음 안에는 외로움이 있었다. 그 때 우리가 이 외로움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고서 아이가 6살이 되어서 부모를 따라서 해외에 순례자처럼 생활을 했다. 정착된 생활이 아닌 굉장히 어려운 전도여행을 했다. 아이는 새로운 삶에 대해 적용하는 능력이 약간씩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7살, 8살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 아이의 정서 안에는 긴장과 불안이 많던 상황이다. 그 때도 아이의 마음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또 우리 가족이 캐나다로 옮기게 됐다. 교육이 잘 발달돼 있는 나라여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격려가 됐고 기대도 가졌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학교를 다녔는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뭔가 약간씩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 잘 대처해야 했는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먼저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아이가 담배를 피고 있었다. 저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자기 안에 불안감이 있다고 했다. 그 시그널을 받아들였어야 하는데 그 때 저는 성경의 말씀으로 아이에게 돌을 던졌다. 다시는 담배를 피지 않기로 약속을 하라고 무릎을 꿇게 하고 강요했다. 아이가 이미 잘못된 것을 알았던 상태였다. 그 어둠을 끊고자 했던 의지도 있었다. 다시 담배를 피지 않겠다고 했다. 저는 사실 중학교 2학년 때 담배를 폈던 사람이다. 그런데 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담배를 폈다고 아이를 성경말씀으로 쳤다. 그 사건 이후 좀 더 시간이 지났을 때 아이는 담배를 넘어 마약을 했다. 이 모습을 보고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사역이 모두 실패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충격이 분노가 되고 아이에게 더 엄하게 따졌다. 그 때 그 아이는 울면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자기 안에 긴장감과 두려움이 많다고 했다. 저는 또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누르면 나오는 것이 말씀이니 이 아이의 영혼을 황폐하도록 말씀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몰려오는 슬픔과 절망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이 됐다.
그러던 중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때 하나님은 진정 아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당연히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싸구려 사랑이라고 하셨다. 싸구려 사랑이란 조건적인 사랑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다. 우리가 죄인됐을 때 그 아들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 그런데 조건적 사랑은 행위에 근거를 둔다. 끝을 알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다. 제 마음 안에 아들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보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에게도 노출된 메시지가 아니다. 그 메시지는 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었다면 좋았을텐데... 이런 것이다. 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노출됐다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숨겨져 있는 제 마음을 보신 것이다. 그리고 제 아들에 대해 하나님은 한 번도 포기하거나 버린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 번째 하신 말씀은 너의 세대보다 너의 아들의 세대를 더 크게 쓰시겠다고 하시는 비전을 심어주셨다. 제 아들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면 또 행위를 보면 절망할 수 있다. 이 언약을 보는 눈을 그 때 가지게 됐다.
우리 아들이 마약을 끊었던 결정적인 어떤 사건을 말씀드리고 마치고자 한다. 우리 아들은 사실 지금도 담배를 피고 있다. 이것은 매우 슬픈 이야기인데 저는 지금도 아들에게 담배를 사주는 선교사다. 아들이 마약에서 손을 뗀 이야기를 하면, 캐나다는 담배 값이 굉장히 비싸다. 어느 날 한국의 면세점에 가서 담배 한 보루를 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들 손에 담배 한 보루를 쥐어줬다. 저는 그 때 아들이 흘리는 눈물을 처음 봤다. 그 눈물 안에 있는 메시지를 봤는데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용납됐다는 것이다. 이 담배 한 보루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이 각인된 것이다. 그것이 이 끔찍한 마약을 저항하게 하는 힘을 생기게 했다. 마음과 마음으로서의 만남이었다.
저는 지금도 담배를 피지 말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담배를 많이 피지 말라고 한다. 저는 이 과정을 통해서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어떤 모습을 보더라도 수용하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참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진리라면 우리는 순종을 해야 한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격려가 되기 원한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데 왜 주님은 그런 사람을 우리 가운데 붙여주셨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더욱 깊이 생각해보기 원한다. 진리가 마음 속에 담겨져 평생 거하면서 삶 속에 온전히 적용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 2일에는 한인 홈리스 구제를 위한 클래식 찬양예배를 드렸으며, 9일에는 예수전도단에서 30년간 강사로 활동한 김순호 선교사를 초청해 예배를 드렸다. 또 23일은 드라마 공연, 30일은 김재학 다문화선교사 초청 간증집회가 예정돼 있다.
특히 9일 열린 김순호 선교사 초청 집회에서 김순호 선교사가 전한 메시지는 하은교회를 찾은 많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쳤다. 이날 하은교회 예배당은 남는 자리 없이 성도들로 가득 차는 등 큰 성황을 이뤘다.
김순호 선교사는 이날 벧전 2:1~2을 본문으로 ‘영적 성장’을 주제로 강의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우리가 아는 말씀이 오히려 남을 정죄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으며, 특히 헌신적인 선교생활 중에 본인의 자녀가 마약을 하게 됐을 때의 충격과, 아들을 변화시킨 과정에서 깨달은 ‘완전한 용납’에 대해서 강조했다.
“저는 자녀에게 지금도 담배를 사주는 슬픈 선교사”라고 고백하는 김순호 선교사의 간증과 김순호 선교사가 전한 ‘완전한 용납’과 ‘완전한 사랑’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아픔에 하은교회를 찾은 많은 성도들은 눈물을 흘렸다.
고훈 목사는 “우리가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정죄하는 일이 없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 감사하다”며 “진정한 변화는 완전한 용납과 사랑 가운데서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순호 선교사 강의 주요 내용.
‘영적 성장’ 벧전 2:1~2
성숙한 신앙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도전이요 뜻이다. 성장과 성숙이라는 말씀을 정리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 즉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속한 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룬 사람인가 혹은 분량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성품이 얼마나 내 안에서 드러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본문 중 벧전 2:1에 기록된 5가지 어둠의 영역은 교만의 실체를 말한다. 이 5가지 어둠의 영역을 너희 안에서 버리라고 말한다. 이 명령은 나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내 의지의 선택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버린다는 단어는 상당히 약한 단어인데 성경에 더 강한 표현이 돼 있는 버전이 있다. 너희 안에서 몰아내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강한 표현 죽이라, 또 더 강한 표현은 진멸하라다. 교만을 우리 인생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교만이 우리 삶을 파괴시킨다. 이것이 평생 너희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될 것이라는 성경의 경고이기에 이렇게 강한 표현을 하는 것이다.
교만을 버리고 나면 2장 2절 취하여야 할 것이 나온다. 갓난아이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라하고 나온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1절에 교만은 아주 거친 마음을 이야기한다면 2절은 아주 부드러운 마음이다. 여러분 안에 이 부드러운 심령 겸손의 심령이 자리 잡기 원한다면 먼저 교만의 옷을 벗어야 한다.
우리 안에 경건의 모양이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봐야 한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빛이 흘러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의로운 옷을 덧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만의 악독한 옷을 벗어야 한다. 1절에 나오는 상당히 악독한 단어 때문에 이것을 내 자신에게 적용시키는데 있어서 불편함을 느껴서 피해서 가고자 할지 모른다. 그렇다하더라도 우리가 이 버려야 할 악한 모습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경건주의 외식과 지식주의 외식
악독이란 것은 악하고 독한 것이다. 가장 안 좋은 단어들이 합쳐진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우리 안에 생명이 들어와 있는데 이 거짓이라는 어둠이 있으면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자아가 된다.
외식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보고자 한다. 성경에는 외식을 이야기할 때 두 가지 외식을 말한다. 경건주의 외식과 지식주의 외식이다. 둘 다 무서운 것이다. 오늘 여러분에게 나누려는 것은 경건주의 외식이 아니라 지식주의 외식이다. 경건주의 외식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에 대해 비유하셨다. 겉은 잘 관리돼 있지만 안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안에서 무화과 나무 안에서 열매를 찾으셨지만 잎사귀만 무성했다.
마태복음 7장에 있는 지식주의 외식에 대해서 보기 원한다. 7장 1~5절을 볼 때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보는 자를 말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대방의 연약함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 안에 있는 티를 뽑으려고 한다. 먼저 내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빼고 나서 형제의 티끌을 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신앙의 지식이 있을 것이다. 살아온 분량만큼 쌓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가슴에 쌓이지 않고 지식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란 명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가서 적용을 한다. 쉽게 말해 이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나를 위한 말씀이다. 내 눈의 들보를 빼기 위한 것인데 다른 사람의 티끌을 빼려는데 적용하는 것을 지식주의 외식을 말한다. 가슴으로 듣는 사람들이 아니다. 마음으로 듣는 사람이 아니라 머리로 듣는 사람이다.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든다. 그러나 지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지혜가 있는 사람을 찾고 쓰시기를 원한다.
이 지식주의 외식에 대해서 성경적인 근거를 찾아야 하는데 요한복음 3장8절에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혀서 끌려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서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다. 이 빛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들어왔을 때 바리새인들은 찔려했다. 그런데 그 때 바리새인들이 그 자리를 떠나서는 안됐다. 어찌할지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떠났다.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젊은 사람까지 있었다고 하지만 모두 그 자리에서 떠났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범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용서 속에는 무조건적인 수용이 담겨 있다.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용납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가 또 깊이 살펴보기 원한다.
이 여인은 죄인이다. 바리새인도 죄인이다. 예수님은 의인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 바리새인을 정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신 것은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것이다. 이 비슷한 모습은 장발장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장발장이 은그릇과 은촛대를 훔치다 경찰에 잡혔을 때 이 주교가 장발장에게 했던 말은 예수님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것이었다. 무조건적인 수용과 용납을 통해서 장발장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너무도 잘 알 것이다. 19년이라는 감옥이 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한 마디 무조건적인 용납을 받았을 때 이 죄를 거절하고 이 늙은 주교가 원하는 그런 사람과 같이 살아야겠다는 지진이 장발장의 마음 속에 일어난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라고 하지만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원칙을 들이대지만 하나님 말씀이 그 사람을 죽이는 돌이 된다. 바리새인이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든 것 처럼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에 사랑에 담기지 않고 삶과 함께 흘러가지 않는다면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죽게 하는 돌이 될 것이다.
저의 마지막 말씀이 여러분 자신과 삶 가운데 또 관계 속에 충분한 이해를 줄 것이라 믿는다. 저에게 자녀들이 있는데 YM이라는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공동생활을 했다. YM 초기에는 공동체 생활에 아이가 없었다. 그 공동체에는 우리 아이가 유일했다. 아이는 아이의 정서가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과 같은 정서와 만났을 때 안정감을 갖는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그럴 수 없었고 늘 마음 안에는 외로움이 있었다. 그 때 우리가 이 외로움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고서 아이가 6살이 되어서 부모를 따라서 해외에 순례자처럼 생활을 했다. 정착된 생활이 아닌 굉장히 어려운 전도여행을 했다. 아이는 새로운 삶에 대해 적용하는 능력이 약간씩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7살, 8살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 아이의 정서 안에는 긴장과 불안이 많던 상황이다. 그 때도 아이의 마음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또 우리 가족이 캐나다로 옮기게 됐다. 교육이 잘 발달돼 있는 나라여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격려가 됐고 기대도 가졌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학교를 다녔는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뭔가 약간씩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 잘 대처해야 했는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먼저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아이가 담배를 피고 있었다. 저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자기 안에 불안감이 있다고 했다. 그 시그널을 받아들였어야 하는데 그 때 저는 성경의 말씀으로 아이에게 돌을 던졌다. 다시는 담배를 피지 않기로 약속을 하라고 무릎을 꿇게 하고 강요했다. 아이가 이미 잘못된 것을 알았던 상태였다. 그 어둠을 끊고자 했던 의지도 있었다. 다시 담배를 피지 않겠다고 했다. 저는 사실 중학교 2학년 때 담배를 폈던 사람이다. 그런데 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담배를 폈다고 아이를 성경말씀으로 쳤다. 그 사건 이후 좀 더 시간이 지났을 때 아이는 담배를 넘어 마약을 했다. 이 모습을 보고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사역이 모두 실패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충격이 분노가 되고 아이에게 더 엄하게 따졌다. 그 때 그 아이는 울면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자기 안에 긴장감과 두려움이 많다고 했다. 저는 또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누르면 나오는 것이 말씀이니 이 아이의 영혼을 황폐하도록 말씀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몰려오는 슬픔과 절망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이 됐다.
그러던 중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때 하나님은 진정 아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당연히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싸구려 사랑이라고 하셨다. 싸구려 사랑이란 조건적인 사랑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다. 우리가 죄인됐을 때 그 아들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 그런데 조건적 사랑은 행위에 근거를 둔다. 끝을 알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다. 제 마음 안에 아들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보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에게도 노출된 메시지가 아니다. 그 메시지는 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었다면 좋았을텐데... 이런 것이다. 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노출됐다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숨겨져 있는 제 마음을 보신 것이다. 그리고 제 아들에 대해 하나님은 한 번도 포기하거나 버린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 번째 하신 말씀은 너의 세대보다 너의 아들의 세대를 더 크게 쓰시겠다고 하시는 비전을 심어주셨다. 제 아들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면 또 행위를 보면 절망할 수 있다. 이 언약을 보는 눈을 그 때 가지게 됐다.
우리 아들이 마약을 끊었던 결정적인 어떤 사건을 말씀드리고 마치고자 한다. 우리 아들은 사실 지금도 담배를 피고 있다. 이것은 매우 슬픈 이야기인데 저는 지금도 아들에게 담배를 사주는 선교사다. 아들이 마약에서 손을 뗀 이야기를 하면, 캐나다는 담배 값이 굉장히 비싸다. 어느 날 한국의 면세점에 가서 담배 한 보루를 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들 손에 담배 한 보루를 쥐어줬다. 저는 그 때 아들이 흘리는 눈물을 처음 봤다. 그 눈물 안에 있는 메시지를 봤는데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용납됐다는 것이다. 이 담배 한 보루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이 각인된 것이다. 그것이 이 끔찍한 마약을 저항하게 하는 힘을 생기게 했다. 마음과 마음으로서의 만남이었다.
저는 지금도 담배를 피지 말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담배를 많이 피지 말라고 한다. 저는 이 과정을 통해서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어떤 모습을 보더라도 수용하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참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진리라면 우리는 순종을 해야 한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격려가 되기 원한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데 왜 주님은 그런 사람을 우리 가운데 붙여주셨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더욱 깊이 생각해보기 원한다. 진리가 마음 속에 담겨져 평생 거하면서 삶 속에 온전히 적용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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