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 인생에서 예수님 영접 후 굳게 닫힌 공산권에 도전

공산권이 열리던 1980년대 후반 헝가리를 시작으로 20여년간 루마니아와 러시아 등 동유럽 선교에 힘써 온 조봉순 선교사(김천석 목사)가 선교보고를 보내왔다. 조 선교사 부부는 현재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현지인 1백여명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동구권 복음화를 위해 사역하고 있다. 신병 치료차 잠시 한국을 찾은 조 선교사로부터 들은 선교보고를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열등감으로 병든 인생에서

저는 가난한 가정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6·25 전쟁 때 월남하셔서 먹고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셨습니다. 저희 남매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른 아이들처럼 놀기보다는 일을 해야 하였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학교가 마치면 오빠들과 함께 젓가락을 만들어 중국 음식점에 팔았습니다. 새 옷을 입은 기억도 별로 없으며, 체육복도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늘 헐렁하였습니다.

한 번은 6학년 체육시간에 물구나무서기를 하였는데 상대방 아이가 제 발목을 잡지 않고 바지를 살짝 잡아당겼는데 헐렁한 바지가 속옷과 함께 벗겨지고 말았습니다. 내 엉덩이가 다 드러났고 반 아이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저는 너무도 부끄러웠고 창피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저의 성격은 더 소심하고 내성적으로 변했고,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과 비교 의식에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중·고등학교 사춘기 시절에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았습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더 많아지는 주근깨로 낮보다는 어둠을 좋아하고 스스로 못생겼다는 생각에 마음은 열등감으로 더욱 병들어 갔습니다.

그러던 1980년, 경기간호전문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시절 열등감과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 보고자 다섯 개의 서클에 가입하고 여기저기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긴 머리에 빨간 구두, 이상한 옷을 입고 술과 미팅, 그리고 주말에는 디스코장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더욱 공허하였고, 이런 저의 삶은 정욕과 세상 쾌락을 좇는 ‘날나리 인생’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또 사주팔자를 용하게 본다는 점치는 사람 말에 의하면, 제 가슴 중앙에 난 점이 자살점이라 내 운명이 짧게 살다 자살로 끝날 것이라 하였습니다. 저는 자살로 인생이 끝날지 모른다는 운명적인 생각에 슬퍼졌습니다.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 외모와 전문대 학생이라는 열등감 등으로 저는 슬프고 한많은 삶 속에 요절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저의 인생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대학 3학년 때 크리스천 친구를 통해 인천 CMI의 우남식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대전에서 인하대를 개척하기 위해 인천으로 막 올라오셨습니다. 1982년 당시는 개척 초기라 양들이 없었습니다. 숭의동 어둡고 조그마한 센터에서 저는 ‘양 없는 목자님’이 너무 불쌍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 한 사람이라도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선한 심정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렇게 안은경 사모님과 일대일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지만 워낙 영적인 소원이 없고, 영적으로 너무 무지해 1년이 넘도록 좀처럼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 저의 냉랭한 마음을 조금씩 열어주었습니다.

1983년 장수기도원 수양회에서 주님은 말씀으로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 말씀은 제게 강하게 부딪혀 왔고,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주님 앞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나의 모든 죄가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이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을 그리스도로 깊이 영접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때 내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샘처럼 솟아났습니다. 열등감으로 병든 저의 마음도 치유되면서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완전히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가치관도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만난 기쁨과 구원의 은혜로 매일 성경을 들고 병원과 캠퍼스를 누비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전도사라는 별명을 주었고, 그룹 성경공부를 통해 4명의 간호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또 교회에서는 일대일 성경공부와 전도에 힘썼을 때 많은 양들이 변화되고 제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는 삶이 제게는 큰 기쁨이요 행복이며,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물질, 시간, 월급봉투, 내게 주신 은사, 젊음, 가정, 모든 것을 바치고 헌신하여도 저는 늘 기쁘고 행복하기만 하였습니다.

1988년 5월 5일. 하나님은 믿음 있고 사랑 많은 김천석 선교사를 인생의 반려자로 주시고 행복한 가정도 이루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선교사의 인생으로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비천하고 쓸모없는 저라도 이방인 선교사로 쓰시고자 부르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세계선교 비전을 영접하고 선교사로 살고자 결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기도와 결단을 받으시고 헝가리와 루마니아, 러시아 개척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헝가리 개척

1985년부터 저희는 공산권 선교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었고, 저희는 ‘쏘련 선수단’이 숙박하던 인천 앞바다에 가서 오고 가는 소련 선수들을 만나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해 10월 인하대학교 강당에서 우남식 목사님이 ‘모스크바도 보아야 하리라’ 는 메시지를 전하셨고, 러시아(당시 소련)과 공산권 선교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저희는 이 기도제목을 두고 간절히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이 보이지 않던 차에, 동구권 국가 중 첫번째로 헝가리와 한국의 수교가 이루어 졌습니다.

저와 동역자들은 구체적으로 매일 기도하며 헝가리로 어떤 방법으로든 나아갈 선교의 길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 신문에 6·25 때 헝가리 의사를 만나 결혼하고 헝가리에 살고 있던 이영숙 씨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이영숙 씨에게 편지를 보내 헝가리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자 했고 서울의 호텔로 찾아가 만나보기도 했습니다.

이때 헝가리 젬멜바이스 의과대학에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신문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눈이 번쩍 뜨이고 선교 비전이 구체화되어 이 길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길이구나 생각하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영어 실력이 없는 제가 테스트에 통과한 것이 이상했지만, 참가비와 학교 등록금을 미리 내고 입학허가서를 받았습니다. 그때 모집된 유학생은 13명이었습니다.

저는 1989년 9월 우남식 목사님과 형제 자매들, 가족들의 뜨거운 환송과 기도를 받으며 김포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는데, 제 자리가 비행기 날개 바로 옆 창가쪽이라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저를 업으시고 선교지를 향해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볼때 연약하고 여러 모로 부족한 자 였지만 하나님은 저를 헝가리 첫 선교사요, 동구권 첫 선교사로 부르시고 헝가리 땅을 밟게 하셨습니다.

헝가리 공항에는 박모 씨가 나왔고 저희를 숙소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젬멜바이스 의과대학 건물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다음날 저희 유학생 일행은 의과대학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박 씨가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 연락도 안돼 저희 일행은 느낌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래서 대학 안에 들어가 담당 직원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기 당한 것을 알았습니다. 유학생들 중에는 직장도 사표를 내고 온 사람, 학교를 중단하고 온 학생들, 외국의 의과대학생이 되었다고 좋아하던 재수생들, 또 공부하면서 어떤 사업의 길을 뚫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선발된 유학생들 대부분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유학이 첫번째 목적이 아니고, 선교가 첫번째 목적이므로 어찌하든지 헝가리 땅에 남는 길을 찾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기 당한 아픔과 속상함이 있었지만 저는 박씨를 통해 선교의 길을 뚫으신 하나님의 기이하신 방법과 계획과 뜻을 깨닫고 감사하였습니다. 외국인들을 위한 헝가리 언어교육원에 등록하고 헝가리어를 4개월간 공부하였습니다. 어학과정을 마친 후 비자를 연기하기 위해 한국 교민 이영숙 씨를 통해 병원에 간호사로 일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일하면서 캠퍼스와 기숙사로 가 대학생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처음 만난 학생이 라슬로 형제였습니다. 키는 2미터에 몸무게는 90kg 되는 큰 체구를 가졌지만 얼굴은 순수해 보이고 마음 밭이 좋아 보였습니다. 저는 빨리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짧은 헝가리어와 영어, 손짓 발짓, 그림을 그려가며 라슬로 형제와 요한복음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이 형제는 4살 때 자기 아버지가 자신의 눈앞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 충격으로 형제는 어둡고 슬픈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은 잠자는 흑곰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잠자는 흑곰과 같은 이 아들이 생명과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계속>

선교후원: 우리은행 1005-801-625058(C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