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번의 연재를 통해 평신도들은 ‘어려운’ 신학에 거부감을 가질 뿐, 결코 신학 자체를 멀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금도 많은 평신도들이 하나님을 찾아 신학의 세계를 홀로 탐험하고 있다. 이들이 신학이라는 ‘쉽지’ 않은 길에 뛰어든 이유를 평신도인 김광남(51·부천 신광교회) 씨를 통해 들었다. 그는 늦은 나이에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에 입학, 여전히 식지 않은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다음은 김 씨와의 일문 일답.

신학에 관심 갖는 평신도 많지만 교회 프로그램 부족

-평신도로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대학시절 신학 관련 강좌들을 몇 개 들은 적이 있다. 별 생각 없이 신청한 것이었는데, 듣다 보니 흥미롭더라. 오히려 전공보다 더 재밌기도 했다. 그러면서 졸업 후에도 계속 신학 서적들을 탐독하게 됐다. 50이 다 된 나이에 고학을 결정한 건, 보다 더 깊은 공부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학교에서 공부해 보니 어떤가.

“가끔 ‘내가 이걸 왜 배워야 하지?’ 하는 강의들도 더러 있다. 어떤 수업에선 지나치게 학문적이거나 너무 협소한 것만을 다룬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물론 아주 유익한 강의들도 많다. 성서학 관련 과목들이 특히 그렇다. 지난 학기, 이사야서와 바울서신을 공부했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됐다. 평생 읽어야 할 성서를 체계적으로 알아가는 것은 내게 큰 기쁨이다.”

-주변에 신학에 관심을 가지는 평신도들이 많나.

“물론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금의 평신도들은 예전과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다. 이들은 목회자 못지 않은 지적 능력을 갖고 있고, 실제로도 여러 분야에서 지식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지적 호기심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신학에 접근할 수 있기에, 예전보다 많은 이들이 신학을 알아가고 있다. 인터넷 검색창에 ‘삼위일체’라는 말만 쳐도 수백, 수천 가지의 신학 자료들이 쏟아지는 시대가 바로 지금 아닌가.”

-일반 교회에서도 신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도 재적 교인수가 1천명에 이르지만 신학 공부를 위한 프로그램은 단 하나도 없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하고 있는 것이 소위 제자훈련인데, 개인적으론 제자훈련보다 더 절실한 것이 신학 공부가 아닐까 한다. 교회가 여러 여건상 신학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면, 신학교의 성서학 수업 방식을 기존 성경 공부 프로그램에 적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성경 공부 프로그램은 실상 제자훈련의 이론 코스에 불과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목회자들, 교인에게 신학 가르치려 하지 않아
신학자들, 작문 실력 높이고 독선 벗어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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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학회는 지난 2010년 신학과 목회의 괴리를 인정하면서 신학자와 목회자간 대화의 자리를 마련한 바 있다. 당시 목회자들은 목회현장에 기반한 신학을 주문했고 신학자들 역시 신학을 바탕으로 한 목회를 당부했다. 사진은 한 목회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신학자들의 모습

-지금 한국의 신학이 얼마나 교회, 혹은 목회와 가깝다고 보나.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우선 신학교들은 지나치게 학문적이다. 신학자들 스스로 ‘한국신학은 이제 세계 어디에 내놔도 밀리지 않는다’고 할 만큼 한국신학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각종 신학회들이 매년 쏟아내는 논문의 양도 굉장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신학적으로 문맹이나 다름없다. 평생 교회를 다닌 장로들의 신학 지식이 고작 신학교 1학년 교양과목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인상을 자주 받는다.

문제는 목회자에게도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평신도들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목회자도 있다. 내가 신학교에 다닌 후부터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담임목사님이 싫어하지 않느냐’다. 결국 신학이 교회로부터 멀어진 데는 신학교와 교회 모두에게 그 원인이 있다.”

-한국 신학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신학교에 다니면서 느낀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신학자들의 작문실력이 일반인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점이다. 글로 다른 이들과 소통하지 못하는데, 제아무리 대단한 업적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신학자들이 영어, 독일어, 헬라어, 히브리어 실력만 자랑하지 말고 일반 평신도들과 소통하기 위해 국어 실력도 좀 갖췄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신학인데, 그것을 전달하는 말까지 어렵다면 대체 누가 그 신학에 귀를 기울인단 말인가.

그리고 신학자들이 독선에 빠지지 않았으면 한다. 학문적 자긍심과 독선은 다르다. 간혹 스스로 지식에 도취된 나머지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보면, 한국 신학의 미래가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절대 진리를 다루는 학문적 특성상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같은 신학계에서조차 ‘저건 아니다’는 말을 들을 정도라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김 씨는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신문에 얼굴까지 비추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오히려 잘 된 것 같다. 어차피 ‘평신도’는 얼굴이 없다. 한국교회 대부분을 차지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이 기사가 ‘얼굴 없는’ 평신도들 중 누군가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라면, 한국 신학계는 그리고 교회는 이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