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 루케이도의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865년 4월, 존 윌크스 부스는 워싱턴 극장의 관람석 뒤쪽에 칸막이 쳐진 곳으로 숨어 들어가 에이브러햄 링컨의 머리에 총을 쏘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형 에드윈 토마스 부스는 동생의 범행이 부끄러워 직장을 내려놓고 도망가듯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옷을 잘 차려입은 한 젊은이가 무리에 떠밀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승강장과 움직이는 기차 사이로 떨어졌습니다. 에드윈은 즉각 선로에 한 발을 내려놓고 그 사람을 붙잡아 끌어 살려 냈습니다. 몇 주 후 에드윈은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는 이 편지를 죽는 날까지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 편지는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의 수석 비서인 애덤스 부도 장군에게서 온 것으로 미국의 영웅 에이브러햄 링컨의 아들의 목숨을 구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편지였습니다. 두 형제 중 하나는 대통령을 죽이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의 아들을 살린 것입니다. 에드윈 부스와 존 부스. 아버지도 같고 어머니도 같고 열정도 같지만 한 사람은 삶을 택하고, 한 사람은 죽음을 택했습니다.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양과 염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삶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개정)
우리는 왜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왜 치욕을 지고 나아가야 합니까? 그것은 주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고난과 치욕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존재했던 영광이나 화려함이 영문 밖에는 없습니다. 도리어 고난과 십자가와 치욕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영문 밖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거기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은혜와 은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는 아무리 화려하고, 보기에 좋아도 생명이 없습니다.
지금도 열악하고 힘든 곳에서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나, 그곳을 향해서 떠나는 분들은 우리에게 영문 밖으로 나아감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선교지로 떠나는 선교사님들도 낯선 언어와 문화와 음식 속에서 복음을 위해서 치욕을 두려워 하지 않고 떠납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동일하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나의 삶의 자리 가운데에서, 무수한 선택 속에서 예루살렘이 아닌 영문 밖으로 나아가기를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동일하고 영원합니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신실합니다. 성실하십니다. 성실하신 주님은 십자가를, 골고다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친히 제물이 되셨고,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구원을 선물로 받은 은혜, 은혜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치욕을 지고 주님이 계시는 영문 밖으로 나아갑시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고,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과 치욕을 두려워 하지 말고, 도리어 주님과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나아갑시다. 화려함과 인기와 쾌락의 예루살렘을 떠나 주님의 보혈의 피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합시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고난 받기를 기뻐하며, 우리의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골고다로, 나의 영광에서 십자가로 전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