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17일 사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권을 세운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이후 수 십 년간 봉건시대를 능가하는 절대 군주로 군림했다. 김정일 정권이 공식 출범한 것은 1998년 그가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된 이후부터지만 실질적으로 북한을 통치한 것은 그가 1974년 후계자로 공식 내정된 이후부터다.
이때 부터 아버지를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고 자신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는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갔으며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임을 내외에 선포한 후부터 사망하기까지 37년간 북한을 통치해왔다.
◇불우했던 최고통치자의 아들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김정일은 1942년 2월16일 량강도 백두산의 항일빨치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출생연도와 출생지는 북한의 공식발표와 다르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정일의 실제 출생연도는 1941년. 북한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1974년부터 주민들에게 그의 출생연도를 1941년으로 홍보하다가 후계자로 공식 추대된 2년 뒤인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 때부터 1942년으로 선전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규정하고 특히 매 5주년, 10주년 등 이른바 '꺾어지는 해'에 대규모 경축행사를 여는데 두 지도자의 꺾어지는 해를 맞추려고 김 위원장의 출생 연도를 김일성의 12년에 맞춰 42년으로 늦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의 출생지 왜곡은 우상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1980년 김정일이 공식 후계자로 지명되기 이전에는 그의 출생지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김정일의 출생시점에 김일성이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경력은 주민들 사이에서 혁명역사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출생지도 러시아 지역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은 1980년 이후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이라고 선전하며 정일봉과 '백두산 밀영'이라는 고향집을 만드는 등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에 나섰다.
사실 김 위원장의 아명도 러시아식으로 '유라'로 불렸으며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명을 사용했고 그 후에도 친지들에게 사진이나 편지, 기념품을 선물하면서 아명을 자주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일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그는 김일성이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생모와 그의 항일빨치산 동료와 함께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조국 땅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최고 통치자의 장남으로 지위가 바뀌면서 행복할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그러나 남동생 슈라가 익사한 데 이어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그 슬픔을 가시기도 전에 이듬해 6·25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난살이를 가야만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한 유년시절은 '모성 결핍'을 낳았고 계모와 이복형제에 대한 반감에 이어 후계자를 둘러싸고 계모 및 이복형제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는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었다.
김 위원장이 5살 연상의 성혜림과 동거한 것도 모성 결핍이 한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 이후 고영희·김옥과 동거하면서도 이들의 모성애에 상당히 기댔던 것으로 알려졌다.
휴전 후 김 위원장은 평양으로 돌아와 삼석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 등을 거쳐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이듬해 7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김 위원장은 소련 방문 때 소련 공산당 관계자가 모스크바 종합대학 입박을 권유했지만 "평양에도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훌륭한 대학이 있어요. 나는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할 겁니다"라고 답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김일성종합대학을 선택한 것이 후계자를 염두에 둔 계산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졸업 후 후계자로 경력을 쌓는데는 유리한 선택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 위원장은 1964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가족과 권력투쟁 불사하고 권력장악
김 위원장은 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이후 1974년 후계자로 내정될 때까지 10년의 시간은 권력승계를 위한 경험축적과 자질향상, 김일성의 인증 확보를 위한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조직지도부 지도원에 이어 1967년부터 선전선동부 과장, 부부장을 지내면서 김일성의 장남이라는 유리한 신분을 이용해 김일성의 정책에 불만을 느끼거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활동을 적발해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숙청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등 예술부문을 전담하면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부각하고 유일지배체제를 강화하는 영화와 가극, 소설 등을 대거 창작함으로써 충성심을 과시하고 후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을 기회로 활용했다.
이를 통해 김일성의 신뢰를 확보한 김정일은 김정숙의 항일빨치산 동료인 원로간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권력 2인자인 삼촌 김영주 당시 당 조직지도부장, 정치적 힘을 과시하던 계모인 김성애, 김일성의 남다른 사랑을 받던 이복동생 김평일을 물리치고 나서 1973년 후계자 자리인 당 조직 및 선전비서에 올랐다. 이어 이듬해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김 주석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후계자 내정을 앞둔 1972년 12월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에서 주석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과 국가기구 개편을 단행, 김일성이 주석으로서 국정에 전념하도록 하는 대신 김정일은 조직 및 선전비서로서 당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김 위원장은 후계자로 공식 내정된 시점을 전후로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수준을 극대화하는 수령절대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이것이 자신에 대한 우상화로 이어지도록 해 권력을 장악해 갔다.
그는 후계자 내정 직후인 1974년 2월19일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한데 이어 4월14일에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발표해 김일성과 자신의 독재시스템 구축과 우상화를 선언했다.
이어 주체사상탑과 김일성 동상, 혁명사적지 등 북한 각지에 김 부자와 그 가계를 선전하는 시설물 건설과 외국에서 주체사상 홍보 등에 막대한 재원을 쏟아부었다.
한편으로는 당 조직지도부를 확대 개편해 모든 인사권과 통제 및 감시권을 가진 핵심부서로 만들고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가 사전에 반드시 자신을 거치도록 하는 시스템 구축해 국가권력 전반을 장악했다.
군에 대해서는 직접 장악보다는 '군에 대한 당의 영도력 강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군 인사권을 당 조직지도부로 이관해 통제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김정일이 권력장악을 위해 가장 몰두한 것은 최대 정적이었던 친인척 제거였다. 김정일의 정적 중 삼촌 김영주는 반종파투쟁 과정에 그의 측근들이 제거됐으며 1970년대 후반 자강도 강계로 쫓겨나 외부와 격리된 사실상의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김정일은 1990년대 초에야 김영주를 부주석으로 복원시키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라는 유명무실한 직책을 주기는 했지만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진 후였다.
또 계모와 이복동생들은 '곁가지'로 규정하고 1975년부터 이들과 조금이라도 연결된 사람들을 전부 조사해 추방했으며, 본인들은 모두 해외에 내보내 국내에서 새로운 추종세력이 형성되거나 결집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이 시기 김정일은 경제분야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당권 장악 차원에서 전국의 알짜 공장과 농장을 국가경제 시스템에서 떼어내 당 산하로 소속시키는 '당 경제'를 조성했으며, 이러한 체제는 국가경제를 훨씬 추월하고 김정일만을 위한 독립적인 경제분야로 급속히 성장했다.
한편으론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던 당시의 경제침체 상황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권력장악의 기회로 삼고자 '70일전투', '속도전' 등 다양한 증산 캠페인과 무리한 대중동원 방식을 발기했다.
김일성 우상화와 후계체제 강화, 남북간 체제 경쟁 등을 의식해 그가 주도한 이런 식의 경제운용 시스템은 경제논리를 철저히 무시하고 정치논리만을 내세운 것으로 오늘날 북한 경제와 주민생활을 본격적인 하강국면으로 몰아넣은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됐다.
김정일은 후계체제 구축과정을 통해 국가권력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를 통해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임을 대외에 공식 알렸다. 특히 이 대회에서 김정일은 군인이 아닌 인물로는 유일하게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임명되면서 군권을 본격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제도적 길을 열었다.
이때부터 그는 서열상으로 김일성 아래의 2인자였지만 실질적인 지위는 김일성과 동격의 수준으로 절대화됐고 오히려 김일성을 상징적인 '수령'으로 밀어내고 김일성을 훨씬 능가하는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김정일은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함으로써 권력 승계에 따른 절차까지 마무리했다.
◇'고난의 통치' 시대…미완의 변화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지만 북한의 모든 상황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는 완전히 붕괴해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통제기능은 마비되는 등 사실상 무정부 상태와 같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핵문제로 대립하고 있었고 전통적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와는 한국과 수교 이후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으면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미 1980년 공식 후계자로 낙점돼 권력자로 자리 잡은 김정일 위원장이었지만 이 같은 대내외적 상황은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선뜻 오르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김 위원장은 김일성에 대한 3년상을 빌미로 '유훈통치' 기간을 설정하고 얼굴 없는 통치를 이어갔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표어로 당시 상황에 대한 책임을 김일성과 나눠 가지려고 했다.
특히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김 위원장은 상명하달의 수직적 조직체계를 갖추고 '물리적 강제력'을 보유한 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내부의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려는 의도로 그는 군을 우대하고 군에 의존하는 군부통치로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
그리고 김일성 3주기를 마친 뒤 1997년 9월 추대 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10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추대되면서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됐다. 이를 통해 김정일 시대가 공식 출범했다.
김정일 시대의 출범과 더불어 군부통치는 '선군정치'로 명명됐고 김정일 시대의 강력한 통치구호로 자리했다. 김 위원장은 또 경제적, 외교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변화를 추구했다.
1998년 제10기 최고인민회의는 '사회주의 헌법'의 개정을 통해 경제난 속에서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했으며 세대교체를 통해 젊은 기술관료를 내각에 등용했다. 2002년에는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 과정에서 '강성대국론', '신사고론', '실리주의' 등 미래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조치는 체제 고수를 위해 늘 '변화와 후퇴'를 반복하면서 실질적인 발전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반면 김 위원장의 외교적 행보는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1994년 미국과 담판을 통해 북미 기본합의를 이끌어낸 그는 남쪽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금강산 관광사업 등 파격적인 남북교류를 추진했으며 2000년에는 반세기만의 정상회담을 하고 6·15공동선언에 직접 서명하기도 했다.
동시에 미국과도 적극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2000년 10월에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과 만났고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추진했다. 2002년에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를 시인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고백외교'를 통해 북일수교에 이어지는 일본의 경제적 지원을 겨냥하기도 했다.
무풍지대나 다름없는 한미일 3개국과 직접 외교를 벌이면서도 김 위원장은 한동안 소원했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방문외교를 재개하고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룬 이들 국가의 노하우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이어가기도 했다.
사실 통일과 외교문제는 김일성의 고유업무영역으로 김 위원장이 이 문제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이후부터였다. 그는 비동맹국과 우방과의 외교에 중점은 둔 김일성과 달리 동유럽의 붕괴와 사회주의 국가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른 국제적 환경의 변화를 뒤늦게나마 인정하고 적극적인 서방 외교를 통해 자신의 색깔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대서방 관계개선 노력은 '자위적 억제력을 보유해야만 체제를 보위할 수 있다'는, 이른바 선군정치 논리에 파묻히면서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문제를 풀지 못한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6년 10월에는 핵실험을 통해 군사적 위력을 과시했지만 국제적으로는 고립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나서는 국정운영에 초조감을 그대로 노출했다. 내부적으로 2009년 1월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2010년 9월에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임하면서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냈으며 경제적으로 2009년 11월에는 화폐개혁이라는 무리수를 강행하며 부작용에 시달리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김 위원장은 2010년 5월, 2010년 8월, 2011년 5월 등 1년여의 기간 세 차례 중국을 방문해 황금평과 나진 특구 건설에 의견을 모았으며 2011년 8월에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해 남북러 3국을 관통하는 가스관 연결사업 등에 합의했다.
이때 부터 아버지를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고 자신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는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갔으며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임을 내외에 선포한 후부터 사망하기까지 37년간 북한을 통치해왔다.
◇불우했던 최고통치자의 아들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김정일은 1942년 2월16일 량강도 백두산의 항일빨치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출생연도와 출생지는 북한의 공식발표와 다르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정일의 실제 출생연도는 1941년. 북한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1974년부터 주민들에게 그의 출생연도를 1941년으로 홍보하다가 후계자로 공식 추대된 2년 뒤인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 때부터 1942년으로 선전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규정하고 특히 매 5주년, 10주년 등 이른바 '꺾어지는 해'에 대규모 경축행사를 여는데 두 지도자의 꺾어지는 해를 맞추려고 김 위원장의 출생 연도를 김일성의 12년에 맞춰 42년으로 늦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의 출생지 왜곡은 우상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1980년 김정일이 공식 후계자로 지명되기 이전에는 그의 출생지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김정일의 출생시점에 김일성이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경력은 주민들 사이에서 혁명역사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출생지도 러시아 지역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은 1980년 이후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이라고 선전하며 정일봉과 '백두산 밀영'이라는 고향집을 만드는 등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에 나섰다.
사실 김 위원장의 아명도 러시아식으로 '유라'로 불렸으며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명을 사용했고 그 후에도 친지들에게 사진이나 편지, 기념품을 선물하면서 아명을 자주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일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그는 김일성이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생모와 그의 항일빨치산 동료와 함께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조국 땅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최고 통치자의 장남으로 지위가 바뀌면서 행복할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그러나 남동생 슈라가 익사한 데 이어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그 슬픔을 가시기도 전에 이듬해 6·25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난살이를 가야만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한 유년시절은 '모성 결핍'을 낳았고 계모와 이복형제에 대한 반감에 이어 후계자를 둘러싸고 계모 및 이복형제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는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었다.
김 위원장이 5살 연상의 성혜림과 동거한 것도 모성 결핍이 한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 이후 고영희·김옥과 동거하면서도 이들의 모성애에 상당히 기댔던 것으로 알려졌다.
휴전 후 김 위원장은 평양으로 돌아와 삼석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 등을 거쳐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이듬해 7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김 위원장은 소련 방문 때 소련 공산당 관계자가 모스크바 종합대학 입박을 권유했지만 "평양에도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훌륭한 대학이 있어요. 나는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할 겁니다"라고 답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김일성종합대학을 선택한 것이 후계자를 염두에 둔 계산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졸업 후 후계자로 경력을 쌓는데는 유리한 선택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 위원장은 1964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가족과 권력투쟁 불사하고 권력장악
김 위원장은 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이후 1974년 후계자로 내정될 때까지 10년의 시간은 권력승계를 위한 경험축적과 자질향상, 김일성의 인증 확보를 위한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조직지도부 지도원에 이어 1967년부터 선전선동부 과장, 부부장을 지내면서 김일성의 장남이라는 유리한 신분을 이용해 김일성의 정책에 불만을 느끼거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활동을 적발해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숙청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등 예술부문을 전담하면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부각하고 유일지배체제를 강화하는 영화와 가극, 소설 등을 대거 창작함으로써 충성심을 과시하고 후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을 기회로 활용했다.
이를 통해 김일성의 신뢰를 확보한 김정일은 김정숙의 항일빨치산 동료인 원로간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권력 2인자인 삼촌 김영주 당시 당 조직지도부장, 정치적 힘을 과시하던 계모인 김성애, 김일성의 남다른 사랑을 받던 이복동생 김평일을 물리치고 나서 1973년 후계자 자리인 당 조직 및 선전비서에 올랐다. 이어 이듬해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김 주석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후계자 내정을 앞둔 1972년 12월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에서 주석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과 국가기구 개편을 단행, 김일성이 주석으로서 국정에 전념하도록 하는 대신 김정일은 조직 및 선전비서로서 당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김 위원장은 후계자로 공식 내정된 시점을 전후로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수준을 극대화하는 수령절대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이것이 자신에 대한 우상화로 이어지도록 해 권력을 장악해 갔다.
그는 후계자 내정 직후인 1974년 2월19일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한데 이어 4월14일에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발표해 김일성과 자신의 독재시스템 구축과 우상화를 선언했다.
이어 주체사상탑과 김일성 동상, 혁명사적지 등 북한 각지에 김 부자와 그 가계를 선전하는 시설물 건설과 외국에서 주체사상 홍보 등에 막대한 재원을 쏟아부었다.
한편으로는 당 조직지도부를 확대 개편해 모든 인사권과 통제 및 감시권을 가진 핵심부서로 만들고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가 사전에 반드시 자신을 거치도록 하는 시스템 구축해 국가권력 전반을 장악했다.
군에 대해서는 직접 장악보다는 '군에 대한 당의 영도력 강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군 인사권을 당 조직지도부로 이관해 통제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김정일이 권력장악을 위해 가장 몰두한 것은 최대 정적이었던 친인척 제거였다. 김정일의 정적 중 삼촌 김영주는 반종파투쟁 과정에 그의 측근들이 제거됐으며 1970년대 후반 자강도 강계로 쫓겨나 외부와 격리된 사실상의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김정일은 1990년대 초에야 김영주를 부주석으로 복원시키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라는 유명무실한 직책을 주기는 했지만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진 후였다.
또 계모와 이복동생들은 '곁가지'로 규정하고 1975년부터 이들과 조금이라도 연결된 사람들을 전부 조사해 추방했으며, 본인들은 모두 해외에 내보내 국내에서 새로운 추종세력이 형성되거나 결집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이 시기 김정일은 경제분야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당권 장악 차원에서 전국의 알짜 공장과 농장을 국가경제 시스템에서 떼어내 당 산하로 소속시키는 '당 경제'를 조성했으며, 이러한 체제는 국가경제를 훨씬 추월하고 김정일만을 위한 독립적인 경제분야로 급속히 성장했다.
한편으론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던 당시의 경제침체 상황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권력장악의 기회로 삼고자 '70일전투', '속도전' 등 다양한 증산 캠페인과 무리한 대중동원 방식을 발기했다.
김일성 우상화와 후계체제 강화, 남북간 체제 경쟁 등을 의식해 그가 주도한 이런 식의 경제운용 시스템은 경제논리를 철저히 무시하고 정치논리만을 내세운 것으로 오늘날 북한 경제와 주민생활을 본격적인 하강국면으로 몰아넣은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됐다.
김정일은 후계체제 구축과정을 통해 국가권력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를 통해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임을 대외에 공식 알렸다. 특히 이 대회에서 김정일은 군인이 아닌 인물로는 유일하게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임명되면서 군권을 본격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제도적 길을 열었다.
이때부터 그는 서열상으로 김일성 아래의 2인자였지만 실질적인 지위는 김일성과 동격의 수준으로 절대화됐고 오히려 김일성을 상징적인 '수령'으로 밀어내고 김일성을 훨씬 능가하는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김정일은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함으로써 권력 승계에 따른 절차까지 마무리했다.
◇'고난의 통치' 시대…미완의 변화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지만 북한의 모든 상황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는 완전히 붕괴해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통제기능은 마비되는 등 사실상 무정부 상태와 같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핵문제로 대립하고 있었고 전통적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와는 한국과 수교 이후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으면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미 1980년 공식 후계자로 낙점돼 권력자로 자리 잡은 김정일 위원장이었지만 이 같은 대내외적 상황은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선뜻 오르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김 위원장은 김일성에 대한 3년상을 빌미로 '유훈통치' 기간을 설정하고 얼굴 없는 통치를 이어갔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표어로 당시 상황에 대한 책임을 김일성과 나눠 가지려고 했다.
특히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김 위원장은 상명하달의 수직적 조직체계를 갖추고 '물리적 강제력'을 보유한 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내부의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려는 의도로 그는 군을 우대하고 군에 의존하는 군부통치로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
그리고 김일성 3주기를 마친 뒤 1997년 9월 추대 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10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추대되면서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됐다. 이를 통해 김정일 시대가 공식 출범했다.
김정일 시대의 출범과 더불어 군부통치는 '선군정치'로 명명됐고 김정일 시대의 강력한 통치구호로 자리했다. 김 위원장은 또 경제적, 외교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변화를 추구했다.
1998년 제10기 최고인민회의는 '사회주의 헌법'의 개정을 통해 경제난 속에서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했으며 세대교체를 통해 젊은 기술관료를 내각에 등용했다. 2002년에는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 과정에서 '강성대국론', '신사고론', '실리주의' 등 미래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조치는 체제 고수를 위해 늘 '변화와 후퇴'를 반복하면서 실질적인 발전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반면 김 위원장의 외교적 행보는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1994년 미국과 담판을 통해 북미 기본합의를 이끌어낸 그는 남쪽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금강산 관광사업 등 파격적인 남북교류를 추진했으며 2000년에는 반세기만의 정상회담을 하고 6·15공동선언에 직접 서명하기도 했다.
동시에 미국과도 적극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2000년 10월에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과 만났고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추진했다. 2002년에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를 시인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고백외교'를 통해 북일수교에 이어지는 일본의 경제적 지원을 겨냥하기도 했다.
무풍지대나 다름없는 한미일 3개국과 직접 외교를 벌이면서도 김 위원장은 한동안 소원했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방문외교를 재개하고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룬 이들 국가의 노하우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이어가기도 했다.
사실 통일과 외교문제는 김일성의 고유업무영역으로 김 위원장이 이 문제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이후부터였다. 그는 비동맹국과 우방과의 외교에 중점은 둔 김일성과 달리 동유럽의 붕괴와 사회주의 국가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른 국제적 환경의 변화를 뒤늦게나마 인정하고 적극적인 서방 외교를 통해 자신의 색깔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대서방 관계개선 노력은 '자위적 억제력을 보유해야만 체제를 보위할 수 있다'는, 이른바 선군정치 논리에 파묻히면서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문제를 풀지 못한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6년 10월에는 핵실험을 통해 군사적 위력을 과시했지만 국제적으로는 고립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나서는 국정운영에 초조감을 그대로 노출했다. 내부적으로 2009년 1월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2010년 9월에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임하면서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냈으며 경제적으로 2009년 11월에는 화폐개혁이라는 무리수를 강행하며 부작용에 시달리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김 위원장은 2010년 5월, 2010년 8월, 2011년 5월 등 1년여의 기간 세 차례 중국을 방문해 황금평과 나진 특구 건설에 의견을 모았으며 2011년 8월에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해 남북러 3국을 관통하는 가스관 연결사업 등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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