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얼마 전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러웠습니다. 특히 크리스천 연예인의 자살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쟁이 있었습니다. 자살은 죄인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가는가? 그러므로 자살한 사람의 교회예식에 따른 장례식은 허용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가 그것이었습니다.

자살은 정신병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살자는 환자로 봐야지 신앙적인 문제로만 보면 안된다, 자살에 이른 사람들의 정신적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은 산자와 죽은 자의 하느님이시고 그 분의 자비는 한이 없기 때문에 자살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동료 종교사회학 교수가 수많은 댓글로 시달렸다고 합니다. 어떻게 신학자가 자살을 인정하느냐, 아니 자살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냐 하는 등의 비난이 그것이었습니다.
정말 자살은 죄일까요,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가고, 그러므로 자살한 사람은 교회예식에 의한 장례식을 허락받을 수 없을까요? 이런 전통과 신학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요?

2. 스스로 숙고하고 결단한 자기 생명의 자발적인 제거라는 의미의 자살은 종교사에서 매우 다양하게 평가를 받습니다. 대부분의 유신론적 종교는 자살은 신에 대한 죄이며, 벌 받을 행동으로 판단합니다. 까닭은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생명을 거둘 권리 역시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법에 따르면 자살을 기도한 것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었으며, 자살자의 교회 예식에 따른 장례식은 거부되었습니다. 이슬람교 역시 자살을 경전인 꾸란을 근거로 비난합니다. 인도의 윤회론자들도 자살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봅니다. 까닭은 인간의 업보가 육체의 소멸과 함께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의 선행과 악행에 따라 상이나 벌을 받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부처도 지상에서의 삶의 곤궁을 과장되게 묘사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낳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이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도덕철학자들, 특히 소크라테스(Sokrates)는 ‘신이 어떤 필연성을 부여하기까지 인간은 자살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살금지를 종교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도 자살을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 타인에 대한 불의한 행동이며,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비겁한 행동이라고 말했습니다. 칸트(I. Kant) 역시 자살을 범죄로 여기면서 그의 ‘도덕형이상학’에서 ‘인간이 인격 속에 있는 도덕성의 주체를 파괴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와 함께 도덕성 자체를 이 세상으로부터 말살시키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습니다. 실존주의 작가인 까뮈(A. Camus)도 자살을 진정한 철학적 문제로 삼으면서, 자살을 실존적으로 거부했습니다. 까닭은 ‘의미 없는 세계에서 삶이란 유일한 인간적 가치이며 삶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부조리의 승리를 의미하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항적 인간은 현존재의 부조리에 대항하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자살을 죄라고 보지 않는 예외적인 종교적 전통도 있습니다. 스토익 철학자들은 치유 불가능한 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자살을 할 경우, 정당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살은 용기 있고 지혜로운 인간의 자기규정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조국을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혹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경우, 사람들은 그것을 영웅적 행동이나 순교로 받아드립니다.

윤리적 차원에서 자살을 더 적극적으로 평가하려는 입장도 있습니다. 예컨대 공리주의자들은 한 사람의 생명의 연장이 그 사람의 주변에 기쁨보다 오히려 더 부담을 준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흄(D. Hume)은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감사드려야 한다. 까닭은 신이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삶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신이 우리에게 모든 생명을 다스릴 권리를 주셨다면, 자살을 자비로운 은혜로 받아드리는 것을 무신론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살을 인간의 자유의 시각에서 긍정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은 자살을 인간의 권리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오직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허락될 수 있는 자유로운 행동의 특수한 경우라고 말합니다. 칼 야스퍼스(K. Jaspers)는 억압과 파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되는 자살의 존엄성을 인정합니다. 인간은 존엄하게 살 권리도 있지만 존엄하게 죽을 자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4.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살이-정신분열을 제외하고는-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까닭은 자살이 회개와 용서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인간적 판단에 따라 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위해서 교회식으로 장례예식을 거행하는 것을 거부했고, 자살자가 교회묘지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안에는 자살이 죄라는 판단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성서의 전통 자체가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살한 삼손(삿 16,28-30)이 신앙의 영웅으로 찬양(히 11,32 이하)을 받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교 박해의 시기에 순결을 잃기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많은 여성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의 일부(크리소스토무스, 오이세비우스,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등)는 이런 여인들의 자살을 찬양하였으며, 그 여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성인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거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까닭은 순결이 육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여인들이 특별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도덕신학적 교리전통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 Aquin)에 근거하여, 인간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생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주님이시며,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대여 받았을 뿐, 자신의 생명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아퀴나스는 중세 후기, 세 가지 이유에서 자살을 반대했습니다: 첫째, 인간의 자기 사랑과 자기 보전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의무이다. 둘째, 인간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 셋째, 생명의 처리 권한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에게만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살의 동기가 자살에 대한 신학적 판단의 기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곧 어떤 동기에 의해서 자살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디트리히 본회퍼(D. Bonhoeffer)는 ‘자살의 동기의 저급성이 자살을 비난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저급한 동기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고, 고상한 동기에서 삶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살의 동기 그 자체가 자살에 대한 신학적 판단의 기초가 못 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5.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어디에 근거해서 자살을 거부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교가 자살을 거부하는 이유는 복음 때문입니다. 자살에 대한 비난은 어떤 율법이나, 혹은 어떤 창조주에 대한 신앙에서부터 제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기쁜 소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운명의 힘의 지배를 받는 예속으로부터 이미 해방되었고, 우리 자신의 죄의 짐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우리를 구원하신 분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때부터 육을 따라 살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6 이하)입니다. 삶이란 하느님의 은총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존재의 연속성에 대한 의미를 꼭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다.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런 괴로운 질문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자살 직전에 서있는 사람은 자살금지법이나, 금지명령을 듣지 않는다. 그는 회개와 구원, 신앙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은혜로운 부름만을 듣는다. 절망에 빠진 이를 구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능력에 호소하는 율법이 아니다. 율법은 희망 없는 절망에로 인도할 뿐이다. 오직 다른 사람의 구원행동, 곧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삶의 제시가 삶에 절망한 이를 만날 수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입니다. 젊은 나이에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을 기다리던 신학자의 고백입니다. 그가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전쟁이 곧 끝나 수용소에서 풀려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절망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삶을 그가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6.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은 자살을 통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모든 관계가 단절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과 역사와의 관계가 자살을 통해 모두 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자살은 영웅적 행동으로 추앙을 받으며 역사 속에 살아있고, 또 어떤 자살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 혹은 비겁한 도피로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또 어떤 자살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수단이나 자기주장의 관철수단으로 인정되기도 합니다.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지만(생활고, 병고, 비관, 염세, 가정불화, 양심의 가책, 결백의 주장, 배신감, 실연 혹은 자발적 안락사 등), 자살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살한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한 사람은 이미 자살을 통하여 윤리적으로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거운 상처를 주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구원의 은총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적 인간, 특히 신앙인이 취할 마지막 선택이 아닙니다.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생명이해는 인간이 살 권리만이 아니라 죽을 권리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게 합니다. 삶은 권리만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만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삶은 권리만이 아니라 의무인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의도대로 끝맺을 자유와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더 이상 육체적으로 존속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선택되는 자살은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일 자살의 동기가 빚, 외로움과 고독에 있다면 자살한 사람의 자살에 대한 책임은 우리 사회와 신앙공동체가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자살을 강요한 필연적인 개인적,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무관심에 대해서도 책임을 공유해야 합니다. 자살이 죄냐 아니냐, 자살한 사람은 천국에 가느냐 아니면 지옥에 가느냐는 질문은 교리적, 신학적 질문은 되지만, 윤리적 질문은 될 수 없습니다.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자살자의 결단은 타인이 너무 쉽게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한 것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살을 강요하는 사회적 조건을 극복할 책임과 노력을 나누어 가집니다. 이것이 자살자의 심리적 상황을 분석하고 책임을 자살자 자신에게 돌리거나, 자살은 죄라는 단순한 종교적 신념을 설교하는 것보다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가 취할 태도입니다.

자살에 대한 종교사회학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살을 생각한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목회자를 찾아 상담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신뢰를 얻지 못한데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지금까지 교회가 추구해온 가치, ‘성공지상주의’, ‘능력복음’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성공한 삶, 행복하고 그늘 없는 삶만이 신앙의 결과인 것처럼 가르친 잘못된 신앙관 때문에 실패한 사람, 삶이 주는 무거운 그늘 아래 신음하는 사람은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받기 때문에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우리 앞에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등 뒤에서 길을 비추십니다. 앞에서 비추는 빛은 우리 눈을 오히려 뜨지 못하게 합니다. 빛은 오직 등 뒤에서 비출 때 길을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은 언제나 그림자를 만들어 냅니다. 하느님의 빛에 비추인 길 위에도 그림자는 있는 법이고, 그리고 그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그림자입니다. 빛 없는 그림자 없고, 그림자 없는 빛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삶, 빛으로 밝히시는 길 위에도 어둠과 그림자는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신앙인에게 자살은 있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