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죽은 1분 후>, <다빈치 코드 깨기>, <히틀러의 십자가> 등의 저자 어윈 루처 박사(Erwin W. Lutzer)가 <동성애에 대해 교회가 입을 열다(두란노·The Truth About Same-sex Marriage)>는 신간을 내놓았다.
루처 박사는 동성애 이슈에 대해 크리스천이 취해야 될 입장을 성경적 해석과 문화적 통계를 바탕으로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특히 아직 사회에서도 ‘시기상조’라는 느낌이 강한 한국교회와 달리, 일부 교회에서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등 동성애 이슈가 교회를 점령한 미국에서 그는 큰 위기의식을 갖고 이 글을 썼다.
저자는 “우리는 성경이 동성애를 정죄한다는 것을 알지만”, 사회가 재조정되며 일부 교인들이 “동성애자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까지 말하는 현 상황에 대처하는 법과 함께 이 상황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책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있다.
현재 미국은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지만 그 반대가 적극적이지 않으며, 동성애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동성애자들은 복음주의 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인권’이라는 가면 때문에 그저 가만히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다. 그는 “교회가 교회가 되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미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사회적 실험이 시작되는 지금”이라고 호소한다.
무엇보다 자녀들을 기억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동성애 커플이 아이들을 양육한다고 생각해 보라. 굳이 성경말씀이 아니더라도 이는 우리의 생물학적 구조에 깊이 뿌리내린 뭔가를 어기는 일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모든 아이에게 헌신과 보살핌, 사랑의 본보기가 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기를 원하신다. 그런 아이는 안정감을 갖고, 보완적인 관계 속에 나타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본보기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되고, 상대를 존중하며 품위있게 말해야 한다. 동성애를 정죄하는 메시지를 듣고 동성애자 생활을 그만두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이해와 지도, 소망의 말을 들은 많은 동성애자들이 그 생활방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사실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본성과 맞서 싸우느라 힘겹다. 그러한 이유로 자살률도 이성애자들보다 현격히 높을 것이다.
이와 함께 교회는 동성애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놀라운 의로움이라고 말해야 한다.
저자의 주장은 “동성애자를 사랑하는 일과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일”이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악행을 정당화하는 면허증이 아니라, 더 나은 길이 존재함을 보도록 도와주는 존재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때문에 동성결합을 반대하지만, 그 이유를 조목조목 분명하게 말할 수 없어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썼다.
이러한 크리스천들을 위해 먼저 가장 대표적인 동성애자들의 주장인 “나는 그렇게 (동성애자로) 태어났다”를 살펴보자. 물론 동성애가 유전적이라 주장하는 거의 모든 연구에 명백한 결함이 있지만, 저자는 보다 본질적인 ‘유전적이라면…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파고든다. 유전적이라 해도 어떤 행동을 했다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병적 도벽 유전자나 아동이상성욕 유전자, 알콜중독 유전자의 상황과 같다. 우리는 ‘조두순’이나 ‘김길태’를 유전적 이유가 있다고 감싸주지는 않았다. 마치 ‘마귀’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주장 같아 보인다.
누군가 자신은 동성애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성적 친밀함은 권리가 아니라고 대응해야 한다. 이는 ‘의무’의 문제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성적 순결을 지켜야 하고, 결혼한 사람은 성적 정절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성욕에 대해 유전적이든 후천적이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저자는 ‘결혼’이라는 단어가 재정의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교회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안팎에서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 안에서는 복음주의권의 이혼율을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의 가족을 든든히 세우고, 부적절한 성교육 커리큘럼에 맞서 싸워야 한다. 또 교회 내에서 독신인 사람들을 비정상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축하해야 한다. 교회 밖으로는 기독교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면서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누구라도 손을 잡아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염려하는 사안에 호의적인 정치가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 이슈에 대해 포기할 만큼 거대한 흐름이 조성되고 있으므로, ‘그분’의 개입하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므로, 다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오로지 자신을 낮추고 나라를 위해 울어야 한다고 저자는 결론내린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개입해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품위를 회복하도록 도우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심을 다해 울 수 없다면,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싸울 자격이 없다. 지금은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루처 박사는 동성애 이슈에 대해 크리스천이 취해야 될 입장을 성경적 해석과 문화적 통계를 바탕으로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특히 아직 사회에서도 ‘시기상조’라는 느낌이 강한 한국교회와 달리, 일부 교회에서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등 동성애 이슈가 교회를 점령한 미국에서 그는 큰 위기의식을 갖고 이 글을 썼다.
저자는 “우리는 성경이 동성애를 정죄한다는 것을 알지만”, 사회가 재조정되며 일부 교인들이 “동성애자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까지 말하는 현 상황에 대처하는 법과 함께 이 상황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책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있다.
현재 미국은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지만 그 반대가 적극적이지 않으며, 동성애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동성애자들은 복음주의 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인권’이라는 가면 때문에 그저 가만히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다. 그는 “교회가 교회가 되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미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사회적 실험이 시작되는 지금”이라고 호소한다.
무엇보다 자녀들을 기억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동성애 커플이 아이들을 양육한다고 생각해 보라. 굳이 성경말씀이 아니더라도 이는 우리의 생물학적 구조에 깊이 뿌리내린 뭔가를 어기는 일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모든 아이에게 헌신과 보살핌, 사랑의 본보기가 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기를 원하신다. 그런 아이는 안정감을 갖고, 보완적인 관계 속에 나타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본보기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되고, 상대를 존중하며 품위있게 말해야 한다. 동성애를 정죄하는 메시지를 듣고 동성애자 생활을 그만두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이해와 지도, 소망의 말을 들은 많은 동성애자들이 그 생활방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사실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본성과 맞서 싸우느라 힘겹다. 그러한 이유로 자살률도 이성애자들보다 현격히 높을 것이다.
이와 함께 교회는 동성애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놀라운 의로움이라고 말해야 한다.
저자의 주장은 “동성애자를 사랑하는 일과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일”이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악행을 정당화하는 면허증이 아니라, 더 나은 길이 존재함을 보도록 도와주는 존재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때문에 동성결합을 반대하지만, 그 이유를 조목조목 분명하게 말할 수 없어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썼다.
이러한 크리스천들을 위해 먼저 가장 대표적인 동성애자들의 주장인 “나는 그렇게 (동성애자로) 태어났다”를 살펴보자. 물론 동성애가 유전적이라 주장하는 거의 모든 연구에 명백한 결함이 있지만, 저자는 보다 본질적인 ‘유전적이라면…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파고든다. 유전적이라 해도 어떤 행동을 했다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병적 도벽 유전자나 아동이상성욕 유전자, 알콜중독 유전자의 상황과 같다. 우리는 ‘조두순’이나 ‘김길태’를 유전적 이유가 있다고 감싸주지는 않았다. 마치 ‘마귀’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주장 같아 보인다.
누군가 자신은 동성애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성적 친밀함은 권리가 아니라고 대응해야 한다. 이는 ‘의무’의 문제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성적 순결을 지켜야 하고, 결혼한 사람은 성적 정절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성욕에 대해 유전적이든 후천적이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저자는 ‘결혼’이라는 단어가 재정의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교회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안팎에서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 안에서는 복음주의권의 이혼율을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의 가족을 든든히 세우고, 부적절한 성교육 커리큘럼에 맞서 싸워야 한다. 또 교회 내에서 독신인 사람들을 비정상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축하해야 한다. 교회 밖으로는 기독교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면서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누구라도 손을 잡아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염려하는 사안에 호의적인 정치가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 이슈에 대해 포기할 만큼 거대한 흐름이 조성되고 있으므로, ‘그분’의 개입하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므로, 다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오로지 자신을 낮추고 나라를 위해 울어야 한다고 저자는 결론내린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개입해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품위를 회복하도록 도우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심을 다해 울 수 없다면,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싸울 자격이 없다. 지금은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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