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신학에 대한 오해는 전 개신교신학자들에게 편만해 있다. 루터신학이 칭의 중심의 의인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모든 개신교 신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루터신학의 일면에 불과하다. 루터신학의 기초는 그 이상의 하나님과의 “신비적 합일”(Unio-mystica)에 있고, 그 신비적 합일을 통한 성령의 능력적인 사역에 있다. 때문에 루터주의는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그리고 웨슬리신앙과 동일한 성령주의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루터신학의 출발은 그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 그는 동방신학의 간접적인 영향아래 서방신학의 칭의론에 중요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동방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소위 성도의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신비적 합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개신교회 신학의 중요한 초점이었던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칭의”개념은 반가톨릭적 정서로부터 출발된 것이었다. 루터는 성도의 하나님과의 신비적 합일을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함”이라는 표현으로 즐겨 사용했다. 그리고 그의 칭의론은 중세의 성례전 사상에 널리 포함되어 있던 “자기 의(義)”로 구원을 이루려는 자기공로사상에 대한 반발로 제시된 하나님의 절대은총 사상이었다. 이로 인해, 그가 우리의 신학이라고 불렀던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루터는 156년부터 1518년까지 위 디오니시우스와 타울러의 영향아래 저술된 ‘독일 신학’이라고 명명된 “테오로기아 게르마니아”(Theologia Germania)를 번역하였다. 그는 본래 “테오로기아 미스티카”(Theologia Mystica)라고 쓰인, 즉 “신비신학”이라는 말을 바꾸어 독일신학이라는 말로 바꾸었다. 간접적으로 자신의 신비적 관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디오니시우스의 작품이나 크레보오의 버나드 및 타울러의 작품들을 사람을 웃기는 “난센스”의 글들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그들의 신학이 단지 사념적으로만 끝나버리는 사변신학(Speculative Theology)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행동이 없는 신학은 단지 사념적으로 끝나 버리는 신학에 불과하다. 루터의 이러한 일념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 즉 신비 없는 신학은 공허한 것이며, 신학 없는 신비는 혼돈 그 자체라고 하는 말을 만들어 낸다. 루터는 객관적인 진리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신자 각인의 하나님과의 만남이 변증법적으로 잘 아우러지는 신학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신학임을 천명한다.
루터는 성서해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를 전통적으로 언급되어 오던 신랑과 신부라고 하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의 시편 45편에 대한 해석은 바로 그런 전형을 따른 것이었다. 이 때 루터의 진정한 신학적 의도인 성령의 역할이 등장한다. 신랑이 신부를 머리로 인정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신부 역시 신랑을 머리로 인정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루터신학의 핵심인 마음의 신학 곧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마음의 진정한 작동, 바로 그것은 성령의 역할이었다. 따라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인 말씀을 성도가 가지는 일은 가슴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 없이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루터신학에 있어서 머리와 가슴인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성령의 활동하심 없이는 성도의 구원도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루터의 신학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가능한 신랑과 신부의 가슴으로의 사랑이 없다면, 루터신학을 감동 없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루터신학에게서 영적 하나님과의 체험을 인정하지 않고는 더 이상의 신학을 전개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는 그의 말년에 또 다시 자신의 중요한 신학적 테마로 “신비적 합일”(Unio-mystica)을 가르쳤던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신비적 신학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동방신학의 대가였던 시몬(Symeon)(949-1022)이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의 사상을 빌려 온다. 그에게서 빌려온 사상을 발전시켜 루터는 그리스도가 빛으로 우리 안에 오셨고, 또한 우리 역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한다고 말한다(눅17:21; 골3:3). 단지 빛이 우리에게 비친다고 하는 시몬의 주장은 루터에 의해 더욱 강력해졌다. 그리고 그 빛, 즉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가 동참하게 되었다고 하는 말은 제 3의 물결의 신학적 근간인 죠지 래드(George Ladd)의 사상과도 맥을 같이 한다.
루터의 신학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남녀의 사랑이 뜨거운 가슴의 사랑이듯이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성령 없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루터는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참다운 신학자를 만든다”(sola experiencia facit theologus)고 단오하게 말한다. 진정한 마음의 기쁨, 그리고 넘치는 “기쁨의 분출"(raptus mentis)없이는 참다운 신앙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루터는 참다운 신앙의 지식은 “오직 진정한 (주를 만남에 따르는) 황홀감”(true extasis)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개신교의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루터의 기독론 없이는 우리의 신학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론 없는 루터의 신학은 더욱 불가능하다. 루터의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기독론과 구원론이 성령론에 정초함이 없이는 루터신학은 도무지 불가능해진다. 이 말은 단지 루터신학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곧 루터신학에 오해를 가지고 있는 모든 개신교신학에 정정을 요구하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형편은 어떤가? 성령에 대한 관심이 이 땅에 불어 온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그리고 영성이라는 말을 자유롭게 사용한 것도 십 수 년이 지난 얼마 전의 일이다. 그것도 신학교나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새로운 회개를 통해 얻어진 것도 아니다. 피상적이라고 말할지는 몰라도 대부분 많은 번역서들을 읽은 평신도들의 변화로부터 온 것이다.
더 이상 이 땅의 평신도는 장로교인으로, 감리교인으로, 그리고 성결교인으로, 혹은 침례교와 어떤 특정교파에 소속된 교인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땅 속을 자유스럽게 흘러가고 있는 지하수와도 같다. 이 땅의 평신도들은 지혜로워 이미 무엇이 생명이 있는 것인지, 또한 무엇이 죽은 신앙과 바리새주의인지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소위 지도자들이라고 말하는 이들만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노 스승으로부터 필자는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충고를 들은 적 있다. “자네와 나 같은 신학자들이 이 나라를 망쳐 놓고 있어!”
이제 우리는 지난 역사를 욕하기보다 새로운 자세를 가지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지난 기독교의 율법주의와 반 성령주의는 잘못된 개신교신학의 자기 고착화 때문에 왔다고 과거로 탓을 돌려서는 안 된다. 멜란히톤과 신조중심의 신학을 외쳤던 교조주의의 획일화와 사변주의는 가슴으로의 감동을 기독교에게서 빼앗아 갔다. 그리고 18/19세기의 이성주의신학은 우리의 가슴을 더욱 차디차게 만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완전히 죽은 채로 굳어져 버렸다.
21세기의 초두에 우리는 지난 개신교 오백년을 뒤돌아본다. 과연 우리 개신교의 역사가 루터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신학은 머리는 있으나 가슴이 없는 사변신학으로 전락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우리의 교회들은 교조적이며 교리적이지 못해 진정한 경건과 회개의 감동을 잊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우리 시대에 맞는 신앙적인 틀로 우리를 치장해 왔다. 분명히 사람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새로운 신앙고백의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때문에 루터는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져야 한다.(eklessia est reformata reformanda semper)라고 말한다.
김호환 박사의 신학단상 (17) 루터신학에 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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