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닥친 지진과 쓰나미, 그에 이어 일본과 주변 국가를 위협하는 핵발전소 사고가 닥쳤습니다.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서 수 만명의 사망자가 생겼습니다. 원자력 발전소가 큰 피해를 입었고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 지면서 일본 전국을 공포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뉴질랜드 지진에 15000배 강도라는 엄청난 지진이 발생한 후에 대형 지진에 속하는 여진이 계속 되지 않을까 아직도 염려하고 있습니다. 쓰나미에 쓸려간 마을과 도시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체가 발견될 지 모르겠습니다. 핵발전소에서는 계속해서 불안한 소식만 전해 지고 있습니다.

처음 일본에 임한 재앙을 보도하면서 철없는 기사를 내 보낸 언론사들이 뭇매를 맞았습니다. 한국 언론 뿐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에서도 일본 국민이 당한 재앙을 천박하게 다루는 만평과 기사가 나왔고 즉각 여론의 지탄을 받은 후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교계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이 부적절한 표현을 하는 바람에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순식간에 일본을 돕는 태세로 전환되어 정부에서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웃이 불행을 당할 때 가장 먼저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 폐부에 느껴져야 합니다. 이성과 생각은 어떤 판단을 내릴 지 몰라도 먼저 우리의 심장부에 고통을 함께 느끼는 체감 (성경에서는 이를 체휼이라고 부릅니다)이 없으면 안됩니다. 가장 먼저 느껴야 할 것은 고통에 대한 공감이고 가장 먼저 보여 줄 것은 긍휼의 눈물이고 가장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위로입니다.

왜 이런 재난이 닥쳤습니까? 거대한 재난의 현장에 서서 거대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일입니다. 이런 재난이 닥칠 때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혜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자각입니다.

일본은 특히 지진에 취약한 곳입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중남미의 태평양 연안, 일본의 동해안이 가장 지진에 취약할 뿐 아니라 인구도 많아 피해 가능성도 높은 곳입니다. 문자 그대로 수 천만명의 인명이 달려 있기 때문에 지진에 대한 연구과 조사에 많은 돈을 쓰고 많은 전문 인력이 투여됩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룬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다 동원하여 지진의 원인을 이해하고 지진의 가능성을 측정해서 예측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대한의 지진 예측이라고 해도 "앞으로 50년 내에 진도 8.0의 지진이 일어날 확율이 70%입니다" 정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일본의 핵발전소의 붕괴와 파괴가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높은 수준의 방사능 때문에 사고가 난 원자로에 접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18km 상공을 날아가는 무인 정찰기에서 정밀한 사진 촬영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두려움의 대부분은 알지 못함에서 발생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한계를 접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가 닥칠 때 우리는 과연 평안을 누릴 수 있는가?" 죽음 후의 미지의 세계로 인해서 두려워 하는가 아니면 평안할 수 있는가? 보장되지 않은 장래를 생각하면서 염려할 것인가 아니면 평안을 누릴 것인가? 그것이 바로 신앙을 얻기 위한 구도자의 첫 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