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강도 만난 사람을 소개한다. 옷이 찢어지고 몸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숨은 헐떡거리고 얼마나 얻어 터졌는지 죽은 자와 방불하게 되였다. 누가 보아도 처참하여 민망스러워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혀를 차며 어쩌다가 나쁜 강도를 만나 저렇게 죽도록 얻어 터졌을까. 길바닥에 버려진 애처로운 모습을 보며 한숨들을 쉬었다. 이 장면을 예수님도 보았다. 이번 일본은 강진 9.0도에 쓰나미 까지 밀어 닦쳐 센다이 도심을 위시하여 동북쪽 바닷가를 바닷물로 덮어 버리는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대자연의 힘도 무섭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고 인간의 무력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일순간 집도, 배도, 자동차도 기차도, 생명도 앗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2만 이상의 생명이 죽어갔고 화장할 기름도 없어 매장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인류의 최대의 참사였구나 하는 쓰라린 마음, 가슴을 조이며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부터 6호기까지 폭발 위기에 처하자 세계인들이 모두 아우성을 치며 방사능 유출로 핵 재앙이 일어나질 않을까하고 대피 소동까지 벌리고 있었다. 반경 30Km에서 80Km까지는 모두 대피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을 탈출, 한국으로 오는 사람들도 많다는 소식들이다. 잠잘 호텔비가 문제되는 사람들은 한국 찜질방에서 밤을 세운다는 뉴스도 듣는다. 슬픔과 아픔. 지옥 같은 어둠속에서 허덕이는 일본인들에게 하룻밤 사이에 여진이 두 세번 씩 도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러니 일본 열도가 무서울 수밖엔, 그러나 일본인의 침착성이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예수님이 이런 장면을 보면서 누가 이웃이냐를 묻고 계신다.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값는 다는데 이런 슬픔을 당한 저들에게 사랑과 위로와 격려와 희망을 전 할 말이 필요하질 않겠는가?

왜 하필이면 예수님은 이런 장면을 보면서 3대 문제점을 지적하셨을까?

첫째는 제사장들을 보면서 혀를 찬다. 본척만척하며 그냥 지나쳤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보의 역활을 하는 현대로 말하자면 거룩한 까운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는 성직자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던 저들.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라고 강대상에서 외치는 저들....... 생활과 행동이 너무나 위선적이다.

둘째는 레위인 들이다. 성수주일을 않고 여리고 즉 세상으로 내려가던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매 맞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 하며 혀를 차며 그냥 지나친다.

세째 사람은 유대인들이 상종치도 않던 사마리아인들, 인격적으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살던 죄인들이다. 그러나 저들이 헌신적으로 기름과 포도주을 부어 상처를 싸매주며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혀서 주막집으로 되리고 가서 따스하게 몸조리 잘하도록 부탁하며 돈을 드려 먹을 것을 사서 주어서 혹시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다시 와서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고 떠난다. 이 셋 중에 강도 만난자의 누가 이웃이냐?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라.

중국에 중견기업으로 성공한 천광바오(43)씨의 기사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어릴 땐 얼음과자 장사를 하였으나 대학 졸업 후 낡은 가전제품기계 설비부품 공장을 차려 성공 하였고 “사랑은 국경이 없다”며 100만 위안을 일본에 성금하고 홍콩에서 비행기로 일본까지 찾아가 빌게이트 처럼 많은 재산은 없을 지라도 78%를 사회에 기증하며 살겠다고 한 기사 내용이다.

우리 한국에도 한류 스타들 욘사마의 배용준씨가 10억원, 동방신기팀 10억원 이병헌 7억원 원빈 2억원 장동건 2억원 류시언.최지우 2억원...등으로 50억 이상이나 기증하셨고 제일동포 한창우씨는 100억을 드렸고, 대한민국에서도 각 기업, 방송국에서부터 모든 메스콤이 앞장서서 일본을 돕기 위해 모금하며 얼마 전에는 일제 때 위안부들도 슬픔을 당한 일본을 돕자고 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웃 형제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얼마나 일본이 감동을 받으며 힘을 얻겠는가. 다시 소니, 토요타. 스포츠 로 절망을 딛고 일어 설 것이다. 예수님은 강도만나 죽게 된 자를 책망 한 적도 없었고 왜 성전을 떠나 세상으로 타락했느냐고 꾸짖지도 않으셨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종교 운동을 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까지 올라가신 것이다. 에덴 이후 하나님을 떠나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오신 것을 우리는 믿고 이웃 일본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