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해저에서 발생한 진도 9의 지진으로 발생한 전대미문의 쓰나미로 관북지방이 쑥대밭이 되었다. 그뿐인가! 나가사끼와 히로시마에 터졌던 원폭으로 피폭되었던 그 역사적 비극이 지금은 후쿠시마 원전 폭팔로 또다시 피폭되는 역사의 반전이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국민성이 또 한 번 세계인으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피난길 400Km 고속도로에 끊임없이 늘어선 행렬에 새치기 하는 차 한 대 없고, 편의점 앞에 일용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어도 조용한 가운데 꼭 필요한 것만 집어들고 나가는 사람들, 그들의 질서의식은 몸에 배인 천부적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런가하면 떼 죽음을 당한 혈육, 일가친지들 앞에서 대성통곡하고 실신해도 될까 말까한 이 비극앞에서 의연히 참아내는 저들에게 세인들은 찬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저력으로 저들은 아마도 우리들이 상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초고속으로 복구하고 세계에 여보라 할 것이 분명하다. 그 예를 우리는 2차세계대전후 패망한 일본이 반세기만에 세계 일류 국가로 발돋움한 경제 부흥을 통해서 이미 경험한바 있다.

물론 이는 한국동란이 저들의 경제 부흥에 기여한 큰 원인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유형들이 과연 칭송을 받거나 본 받아야 할 일인지에 대하여는 깊이 생각할 일이다. 전대미문의 비극 앞에서 인간이라면 대성통곡하여야 마땅하다. 이것이 인간에 주어진 본성이다. 그러나 저들은 울음통이 막혔는지 울지 않는다.

우는 것은 비겁한 자의 소치라고, 패배자의 고백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바다 건너의 일을 제 일처럼 울어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회에서 일본을 위해서 울며, 울며 기도하랴!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당한 여러 민족적 비극이 왜 우리들에게 왔는지 묻고 울고 또 울었다.

내 어렸을적 찬 교회당 마루바닥을 흥전히 적시며 울고 울면서 기도하던 어른들을 보면서 자랐다. 나는 저들이 폭포수처럼 흘리던 눈물을 머금고 대한민국은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우리는 울고 또 운다 제 슬픔에 겨워 울기도 하지만 보다는 민족의 안녕 질서를 위해서 우리는 밤을 지새워가며 또는 새벽을 깨워가며 운다.

우리는 삼팔선이 우리의 탓 인양 아직도 울면서 회개한다. 비록 한쪽에서는 개독교 소리를 듣는 비리가 터져도 아직도 민족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우는 애곡성의 곡쟁이들이, 기도하는 남겨진자들이 수도 없다. 이렇게 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앞에 아주 겸허한 미물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무릎꿇고 기도한 것이 예전에 맞지 않는 일인지는 몰라도 아주 잘 된 일이다. 대통령이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겸허하게 소리높여 기도한 것은 자신의 체면을 불사하고 하나님앞에 나간 일인 까닭이다. 나는 지금이라도 일본 열도가 울음소리로 가득 채워져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가 메아리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