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쓴 소리 칼럼이 지면을 탈 때마다 독자들의 반응은 둘이다. “기분 나쁘다”는 불만성의 반응은 글의 내용과 관련 있는 일부 목사들한테서고, “시원하다”는 감사성의 반응은, 주로 평신도나 일반인들로부터다. 안 그래도 더러는 청심환의 도움이 필요한 글들이어서 혹시라도 무반응이면 어쩌나? 했는데,.... 때 마침 교회운명이 한순간에 바뀌게 될지도 모를 민감한 이슈 하나가 등장 했다. “성직자의 불륜문제” 라는 제목으로 필자의 글이 얼마 전, 미주한인 유력 종교 신문을 비롯해서 주간 코리아모니터와 수많은 인터넷 접속 친구들에게까지 번져 나가면서 “성직자의 비리, 덮을 것인가”를 놓고 지금 물밑 논쟁이 사방에서 한창이다.

목사들 만큼 남의 부정비리를 전문적으로 들추고 비판하는 허가 낸(?) 직업은 흔치않다. 그것도 성스러운 강단에서 말이다. 문제는 남의 비리에는 엄격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비리에는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게 비난거리가 되는 까닭이다. 빛이든 등불이든 자신을 먼저 들어내지 않으면 세상을 밝힐 수가 없다. 그래서 등불은 등경위에 두는 거고, 해와 달은 늘 공중에서 자기를 전부 들어내 주는 것이다. 이게 목사다. 누구 앞에서나 부끄럽지 않은 밝고 투명한 모습을,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어야 그게 성직자다.

이런 충고, 오래전 어느 젊은 목사에게 해 주었더니 “들어내다니요, 그건 지혜로운 목회방법이 아니라” 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후배는, 끝내 터진 비리를 넘지 못한 채 어느 날 보따리를 싸고 말았다. 인심이 천심이면 인목(人目)도 천목(天目)과 같은 사실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사람을 속이면 하늘을 속인다는 역설의 의미를 말이다.

비행(非行) 을 숨기고 비리(非理)를 덮는 이중성의 버릇은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흡사한 것 같다. 오죽 했으면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있는 회칠(灰漆)한 무덤 같다” 며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외식(外飾)성을 그리도 질타 하셨겠는가.

성경이 창세 이래 아직까지도 베스트셀러인 것은 더럽고 추잡한 내용까지도 숨김없이 다 기록해 놓은 정직성과 진실성 때문이고, 참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우월성, 또한 여기에 기인한 때문이다. 이것이 성직자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진실해야 되는 이유고, 비리를 덮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더더구나 지금 많은 선량한 교인들이 고통당하고 교회들이 큰 위기를 맞게 된 것이 돈이나 여자문제로 생긴 비리라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진짜 기도다운 기도를 해 보면 응답은 하나뿐이다. “목사가 책임지고 떠나야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살 수 있다” 는, 하늘의 음성 말이다.
(2011년 3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