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직접 선택해서, 모든 것을 보여주고 가르쳤던 열두 제자들 가운데서조차도 예수를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자들에게 ‘내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하고, 그가 이 지상에 오기 전에 이미 예정된 그 죽음 앞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죽음의)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 ‘살려 주소서’라고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다가, 끝내는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망해 버리고 만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예수 자신이 부활도, 메시아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은 거의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감히 말한다면 오히려 평범하고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인들에게 무엇보다도 불가사이하게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해서 기독교인들은 성경 속의 그 불투명한 예수라는 인물과,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와 같은 ‘황당한’ 사건들을 가지고 그렇게도 확고부동한 구세주의 상을 세울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인용문은 어느 대학교의 교수이시며 스님이신 분께서 다른 대학의 종교 문제 연구 세미나에서 발표하신 것이다. 스님의 당황은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아 고민하는 사람들을 대변한다. 사실 나도 이전에 비슷한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교회 안의 불신자

사실 나는 불교와 유교 배경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불교 설화들을 재미있게 읽었고, 거의 매달 제사를 지냈다. 대학 때는 반야심경을 읽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를 나름대로 깨우치고 깊은 도를 깨달았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나의 갈증을 풀어 주지는 못하였다.

대학 시절에 지도 교수님의 인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 후 성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성경은 만만하게 전체를 열어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교수님과 더불어 성가대원을 할 정도로 교회에 중요한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예수님에 대하여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만났는지 물어보지 않았으므로 정체를 들키지 않고 안전하게 교회를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세례를 받으면 혹시 믿음이 생길까 하여 못 이기는 척 세례를 받은 적도 있었다. 세례를 받는 순간에 비둘기같은 성령의 모습이 나타날까, 혹은 하늘에서 음성이 들릴까 하는 기적을 기대했지만 세례를 베풀던 목사님의 손이 내 머리를 떠나는 순간에 느낀 허전함은 거의 배신감의 수준이었다. 그 어떠한 특별한 느낌도 없었다. 사실 세례를 받는 것은 엄청난 영적사건인데 영성이 없는 내가 그 영적사건을 육체로 느끼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었는지를 그때는 알지 못하였었다. 그만큼 나는 엉터리였다. 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과거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신자의 변화

그러던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198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미국 알라스카 설원에서였다. 교회에 다닌 지 8년이 지난 후였다. 그날 전까지 나는 이해 안 되는 성경 구절들에 대해 부정적인 비판을 했었지만, 나는 성경에 대한 의심들을 접고 아는 것을 하나씩 붙잡기로 했다. 우선 확실하게 붙잡은 것은 예수님께서 실존 인물이며 그의 말씀들이 매우 진실되고 깊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위 인용구에서 스님께서 지적하셨던 것과는 다르게 내일이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그가 거짓말과 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다음 질문을 하게 했다. 만약 그의 말씀들이 진실된 것이라면, 그가 말한 다른 것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나라, 죽음과 영원한 세계 등도 사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이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나는 멈추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내 가치관과 세계관, 인생관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에도 물론 성경에 이해 못하는 구절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내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냉소적이기기보다는, 이해되는 것부터 진지하게 성경의 말씀을 믿고자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태도를 바꾸었을 때, 그제서야 성경의 진리들이 조금씩 깊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진리의 심원함과 존재의 결함

물론 예수님의 진리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 삶 속에서 나의 존재적 결함으로 인한 대가를 지불했는지 모른다. 진리가 나를 사로 잡았지만 내 속에 진리를 거부하는 모순이 있었다. 여전히 세상적 가치관을 벗지 못한 나는 크고 작은 많은 과오들을 범하였다. 내가 이전에 비판했던 불량한 종교인들의 모습이 내 속에서도 쉽게 발견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내면화 하지 못한 나의 미성숙한 존재 때문인 것을 알게도 되었다.

아직도 나는 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성장과 퇴보의 우여 곡절 속에서 발견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럴수록 진리가 더욱 확실하게 돋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홀한 것은 내가 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온 진리가 나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참 된 진리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해되지 않은 이유


내가 예수님을, 그리고 예수님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를 지금은 안다. 성경의 말씀들은 우주 최대의 비밀에 관한 정보들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정보가 허드레 소설과 같이 한 번 읽으면 다 이해되리라고 착각했었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성경의 내용이 황당하게 쓰여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성경의 말씀들 중 어느 부분이 코드(code), 즉 암호의 형식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암호는 모든 사람에게 한눈에 이해되지 않는다. 암호를 암호로 알아보고, 암호를 해독한 사람에게만 암호에 담긴 비밀이 드러난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암호가 해독된 사람에게 암호가 해독된 만큼 이해된다. 암호는 해독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성경은 해독되어야 한다.

읽어도 뜻을 모르는 암호

스님에게 성경은 온통 암호투성이의 책과도 같다. 교회 밖의 불(佛)자와 교회 내의 불(不)신자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암호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 다 아는 한글로 기록되어, 읽기는 읽지만 그 참된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이디오피아의 내시가 이사야서가 이해되지 않아 빌립을 통하여 도움을 받은 것과 같은, 암호 해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암호 해독이 되면 스님께서 질문하신바 “어떻게 해서 기독교인들은 성경 속의 그 불투명한 예수라는 인물과,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와 같은 <황당한> 사건들을 가지고 그렇게도 확고부동한 구세주의 상을 세울 수 있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스님의 질문은 두 가지를 향하고 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십자가 사건의 비밀스런 의미에 관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사실은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주고 계신다.

“너희가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다음에야 비로소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8:28)

이 말씀은 예수님의 황당한 죽음을 통하여 두 가지를 알게 될 것인데, 예수님의 구세주로서의 정체성과 예수님의 말씀들이 혼잣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의 7언에 담겨져 있다. 십자가의 7언은 혼잣말이 아니었고, 그가 왜 그리스도인지를 알게 하는 핵심 비밀이 담긴 암호들이다. 물론 우리는 십자가의 7언의 암호를 해독하기 전에 몇 가지 준비 작업들을 거칠 것이다.

오늘 글을 마치면서 생각하는 것은 이 글들은 혼돈에 빠졌던 과거의 나에게 주는 오늘의 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가졌던 혼돈 속에 계신 분들에게 드리는 선물이다. 교회 밖의 불자들이 그리고 교회 안의 불신자들이 이 글들을 읽으시면서 더 빨리, 그리고 깊게 예수님을 이해하실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