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들어가는 말)
땅 끝에 서는 선교를 통해서 놀라우신 은혜와 축복과 감동과 감격 그리고 영혼들에 대한 열정을 선물로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척박한 땅, 사막과 같은 아프리카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도 눈물겨워서 지금 이 순간도 저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케냐 선교를 통해서 받은바 크신 은혜와 사랑을 케냐 선교 기행문을 통해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선교지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나누는 가운데 우리들 모두에게 선교에 대한 열정들이 되살아나고, 현장에서 수고하시는 선교사님들을 물심양면으로 보다 더 잘 후원하여서 동역하는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때문입니다.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선교사님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들을 놓고 함께 기도하고 연구하면서 우리 모두가 마태복음 28장의 지상 최대의 명령인 선교의 사명에 적극 동참할 수 있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 기행문은 선교사님들의 선교 사역을 실질적으로 돕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선교 동원의 활성화를 위한 것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러나 케냐에 나가 있는 91가정, 170명의 선교사님들 전체를 섬기는 마음으로 쓰여진 글이기에 특정 선교사님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지양하고자 하며, 케냐 선교를 중심으로 쓰여지지만 이것이 확대되어서 세계 선교로까지 우리들의 마음이 활짝 열려지기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비록 중국과 중미의 니카라구아와 그리고 케냐 밖에는 가보지 못했으나 일행으로 함께 했던 다른 강사님들의 경험에 의하면 후진국의 못사는 대부분의 다른 나라의 형편들도 어느 정도의 차이이지 케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몸바사에 있는 쓰레기 더미 속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

케냐 선교가 내게 준 의미
2010년 7월 22일부터 30일까지 9일 간의 여정으로 아프리카 케냐 단기 선교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 속에서 주어진 놀라우신 은혜였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케냐 선교 이전과 이후의 저는 180도로 완전하게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저를 변화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함으로써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허락해 주시고, 선교 본질적인 교회로의 회복에 쓰임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신 것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아마도 저는 이번에 경험한 큰 은혜와 감동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빚진 죄인 중에 괴수로써 교회의 본질인 선교를 회복하고 강화하는데에 나머지 생애를 바쳐서 쓰여지게 될 것을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케냐 선교 이전까지만 해도 Clean Church Movement(이후 CCM으로 명칭) 운동을 통해서 교계의 잘못된 점들 특별히 부정과 부패, 불법, 편법 등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면서 정화 운동을 강력하게 펼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CCM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정신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방법은 직접적인 채찍이 아니라 한 발 물러서서 하나님께 기도로 맡겨 드리고 교계 전반에 걸친 간접적인 계몽으로 그 방법을 크게 전환하였습니다.

현재는 <한국교회 종교개혁하자>는 매우 과격하고 무례하며 공격적인 선전포고와도 같은 글을 삭제하였고, 그런 성향 속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모든 글들을 내려 놓은 상태입니다. 그러하기에 이번 가을 노회를 통해서 제기하고자 했던 모든 고소와 고발의 문제들을 포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상대가 되는 그 분에 대한 마음의 변화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에 대한 한없이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을 제게 넘치도록 부어 주셨습니다. 너무나도 처량하고 측은하게 여겨지는 마음이 생기니까 더 이상 추진하고자 했던 일들을 계속해서 진행시킬만한 동력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선교 이전까지만 해도 이번 가을 노회에서의 고소와 고발 사건들을 전 세계 한인 교회 주소록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이슈화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총동원하여 여론을 조성해서 잘못된 것들에 대한 일침을 가하겠다고 하는 싸움에 대한 결의를 굳게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저의 마음이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CCM을 처음 시작하고자 했던 대의를 향한 방향성은 100%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그 방법은 전면적으로 수정해서 덕을 세울 수 있는 방법으로 지혜롭게 그리고 좀 더 객관적으로 진행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CCM 운동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방법은 수정해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써 우리 모두가 함께 동참하고자 하는 중도적인 개혁으로 전환하였습니다. 더욱이 저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건들에 대해서는 한 발짝 물러서고 관련이 없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교계 전반에 걸쳐서 함께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대안과 해결책을 연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앞으로는 나아가고자 합니다.


▲빈민촌 한 구석에서 돼지와 함께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

케냐 선교사 가족 수련회에 강사로 참여하게 된 계기
제가 케냐 선교사 가족 수련회에 강사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선교학 교수님이신 이성일 목사님의 권유 때문이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필리핀에서 직접 선교사로 5년 동안 사역을 하셨고, 선교학으로 유명한 에즈버리 신학교에서 선교학 박사까지 공부를 하신 분으로써 현장에서의 직접적인 경험과 학문적인 선교학의 지식을 두루 갖추신 분으로써 선교사님들을 재교육하고 선교사님들에게 필요한 전략과 자료들을 후원해 주시는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는 목사님이십니다. 저는 이성일 목사님에게 선교학을 배우면서 목회의 패러다임을 선교가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선교 중심적인 교회로 그리고 선교가 본질이 되는 교회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7월에 있을 케냐 선교 대회에서 강사로써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온 것이 지난 3월의 일이었습니다. 3월이라고 한다면 제가 한참 두날개 양육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우뚝 서 있을 때입니다. 아무도 저에게 목사로써의 본질적인 사역과 관련해서 제의해 오지 않을 바로 그 때였습니다. 강단을 잃어 버린 목사는 살아 있어도 실상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입니다. 그런 저에게 120여 명의 선교사님들에게 3-4번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것을 사양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의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싸인으로 알고 그 자리에서 즉시로 응답하였고, 사모의 허락을 받은 다음 날에는 최종적으로 참여의 의지를 밝혀 드렸습니다. 하늘문교회 사임 이후로 지금까지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강단을 허락해 주셨던 몇몇 목사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려 드립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 목사님께서는 2차 두날개 집중훈련을 끝까지 마치신 분으로써 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상태에서 선교 대회에서 함께 사역할 것을 제의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찬양 사역자로써도 지난 20년 동안을 사역해 왔던 저는 “목사님 제가 찬양 인도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올렸더니 크게 반가워 하시면서 허락해 주셨기에 말씀사역과 찬양사역으로 섬길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케냐 선교사 가족 수련회에 강사로 참여하게 된 이후로 저의 모든 삶의 중심은 케냐 선교였습니다. 모든 것을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였고, 이것을 위해서 판단하였고, 이것을 위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케냐 선교사 가족 수련회는 3월부터 제 마음 속에서 이미 착실하게 준비가 되어왔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때의 저의 수입은 월 $500이 전부였습니다. 한 아이를 둔 아빠로써 더욱이 둘째의 출산을 앞두고 있는 가장으로써 미국에서 한 달에 500불의 수입으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매월마다 렌트비 내고, 보험료 내고, 각종 생활비를 감당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케냐 선교는 자비량으로 비행기 표를 구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무려 $2000이나 되었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한 손길들을 통해서 비행기 삯을 쉽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뜻을 정하고 나아갈 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공급해 주시는 정확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후원금은 1차, 2차, 3차로 지원되었는데 이때마다 각각에 사연이 있는 간증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고자 합니다.


▲도로변에 있는 상가의 모습

기도로 준비시킨 선교여행 – 기도원에서의 3일 간의 집중기도
3월 이후로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단연코 케냐 선교 대회였습니다. 선교사님들에게 무슨 말씀을 어떻게 전할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쓰여질 날만을 학수고대하면서 말씀의 칼날을 갈고 또 갈았습니다. 3월부터 4월, 5월, 6월, 7월까지 기도하면서 케냐 선교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결단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짐이 없다고 하셨는데 무슨 섭리와 역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이고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리는 연인의 마음같았습니다. 줄리엣의 창가에서 사랑의 노래를 불렀던 로미오의 마음이 아마도 저와 비슷하였을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7월 말에는 임시로 거처하던 곳에서 이사를 하여야 했기에 선교를 떠나기 직전에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미리 기도원에 올라가서 3일 동안 집중적인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밤 11시에 뉴왁 공황에 도착해서 그 다음 날인 31일 토요일에는 곧바로 이사를 해야 했기에 저는 선교를 떠나는 그 전날까지도 이삿짐을 싸야 했습니다. 더욱이 아내는 임신 8개월째로 배가 산만큼 나와 있어서 움직이는 것 조차도 어려운 처지였으니 짐을 싸는 것은 전적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선교를 앞두고 기도원에 올라가서 산만하고 바쁘고 분주한 일상의 삶을 멀리하고 집중적인 기도를 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의 깊은 교제를 원하셨고 저는 그에 순종으로 응답하게 될 때, 새 방언으로의 업그레이드가 되는 놀라운 기름부음의 체험을 선물로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20년 전에 방언의 은사를 받은 이후로 열심히 사용하여 아는 말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아는 말로 찬양하고, 방언으로 찬양을 올리면서 기도 생활을 유지해 왔습니다. 처음으로 받았던 방언은 계속적인 사용으로 진화하면서 5년 정도가 되었을 때에는 4가지의 다른 종류의 방언을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15년 동안 저는 4가지의 방언으로만 기도를 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저에게 있어서 계속적인 기도제목 중에 하나는 새 방언으로의 업그레이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에게 응답으로 기도원에 올라간 첫째날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무려 4가지의 다른 종류의 새 방언을 선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이번 선교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 졌습니다. 저는 이 은사들이 이번 선교에 있어서 저에게 꼭 필요한 기도의 도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실제 선교기간 내내 새롭게 주어진 방언으로 나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도로변에 있는 주택의 모습

나이로비까지 가는 길
케냐의 수도인 나이로비까지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어서 제가 특별하게 수고를 해야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고 영국 런던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는 과정에서 기다리는 시간들까지 모두 포함하면 뉴왁 공항에서 나이로비까지는 20시간이 넘는 장시간의 여행길이었습니다. 더욱이 전날 새벽까지 밤을 새면서 이삿짐을 싸야 했고, 아침 일찍이 출발하는 비행기로 인해 새벽 5시 30분에 집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긴장감 속에서 쌓인 여행으로 인한 여독이 몸을 피곤하게 하였고,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해발 1700 미터의 높은 고도에 있는 나이로비에 도착하게 되자 두통으로 인해서 현지에 적응하는 것 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나이로비까지 가면서 크게 느꼈던 두 가지는 조국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에 대한 자부심과 축구 대표팀이 원정 경기를 가게 되면 느끼는 적응 훈련의 어려움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아프리카에 가는 비행기 편으로 영국의 비행기인 버진 아틀란틱을 탔습니다. 선진국인 영국의 비행기였으나 서비스나 시설은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을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한국 비행기를 타게 되면 전세계 1위 서비스로 선정된 회사를 홍보하는 문구들을 보면서 무심코 지나쳤었는데 이곳 저곳을 여행하게 되면서 다른 나라의 비행기들을 타보면서 느끼게 된 것은 한국 항공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수준이 정말로 높고, 좋은 것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인천공항은 국제공항으로 세계적인 허브 공항이기에 높아진 대한민국의 국력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이로비에 도착해서 체험한 것은 제 몸이 마치 제 몸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피곤한 여독과 시차의 차이, 높은 고도로 인한 고통은 아프리카 땅이 결코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였습니다. 실제로 비행기 값이나 비행시간도 중남미 지역에 비하면 몇 배로 비싸고 긴 거리이기에 북미주에 있는 교회들은 가까운 중남미 선교에 집중하게 될 때 보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선교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도로변에 있는 번화한 상가의 모습

케냐의 전반적인 정세와 상황
케냐는 아프리카 56개국 중에서 이번에 월드컵이 열린 남아프리카 공화국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말하는 이에 따라서 두 번째 또는 세 번째로 순위가 바뀌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들의 공통된 견해 중에 하나는 아프리카에서 믿을 수 있는 확실한 통계를 산출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로 보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산률이 높은 나라들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아도 출생 신고 및 사망 신고 조차도 하지 않는 실정이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기행문을 통해서 언급되는 수치들은 정확도를 확인해 줄 수는 없으나 케냐에서 5년, 10년, 20년 이상 거주하시면서 현장에서 직접 사역을 담당하셨던 경험이 많으신 선교사님들의 입술을 통해서 전해 들은 이야기이므로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는 내용들입니다. 통계 수치와 관련해서는 이러한 어려운 점이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케냐는 아프리카 56개국 가운데에서 2-3번째로 잘 사는 나라이기는 하나 국민 1인당 GDP가 $380밖에 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중남미의 못사는 나라 중에 하나인 니카라구아가 약$600 정도인데 이 보다도 훨씬 못한 금액이니 얼마나 못사는 나라인지요. 가난의 정도가 얼마나 극심한 지는 미주 지역에 사는 보통 사람의 한 주 주급도 안 되는 소득이 1년 전체의 총소득임을 통해서도 비교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케냐가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잘 사는 나라라고 하니 다른 나라들의 수준은 더없이 비참한 수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번 케냐 선교사 가족 수련회에는 유일하게 케냐 선교사님 외에 이디오피아 선교사님이 한 가정 참석하셨는데 그 사연은 사모님께서 급성으로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서 눈 주위에 온통 곰팡이 같은 것이 흰 눈이 쌓인 것처럼 부스럼으로 나셨는데, 이디오피아에서는 치료를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서 케냐의 수도인 나이로비까지 오셔서 치료를 받으시던 중, 선교사 가족 수련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휴양지인 몸바사까지 13시간을 기차를 타고 참석하신 경우입니다.

저는 이디오피아 선교사님 가정이 이번 선교대회에 참석한 것을 통해서도 엄청난 은혜를 체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이번에 선교 대회에 참석하신 이디오피아 선교사님 가정은 저의 장인 어른이 섬기셨던 한민교회에서 후원하셨고, 모셔서 집회도 열었던 선교사님이셨습니다. 저는 5년 전 처가댁을 방문했을 때에 우연히 선교 보고용 비디오 테잎을 발견하고 보았던 적이 있는데 이 때에 받은 바 은혜가 있어서 줄곧 마음에 품고 생각이 날 때마다 중보로 기도를 해 왔던 선교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대해서 무지했던 저는 이번에 케냐에 가게 되면 무작정 이디오피아 선교사님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기대속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20명 정도의 선교사님들이 모이는데 이것이 아프리카 전체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의 모임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선교 대회에 왔을 때에는 이 대회가 아프리카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의 모임이 아니라 케냐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 만을 위한 대회라는 것을 알고서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을 했었는가 하고 이디오피아 선교사님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렸습니다. 이디오피아에는 총 4가정의 선교사님이 파송되어 있는데 이에 비해서 케냐에는 91가정 170명의 선교사님들께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이디오피아는 이만큼 케냐에 비하면 훨씬 더 열악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대회 당일날 아침 이디오피아에서 선교사님 가정 하나가 치료를 목적으로 케냐에 왔다가 참석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4가정 중에서도 제가 만나뵙기를 희망했던 선교사님을 실제로 직접 만나 볼 수가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거의 까무라칠뻔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종이 충분한 지식이 없어서 잘못 생각한 것까지도 현실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인간의 상식으로 설명 될 수 있겠는지요? 오랫동안 사모하면서 가슴에 품고 기도해 왔던 선교사님 부부를 직접 만나 뵙게 될 때에 주어진 반가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꼭 붙잡고 많이 위로해 드렸고, 격려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디오피아 선교사님 가족에게 쉼을 베풀어 주셨고, 그로 인해서 사모님께서는 날이 갈수록 빠르게 회복이 되시어서 정말로 감사하였습니다.

아프리카 지역과 중남미 지역의 후진국들은 정부와 관리들의 부정, 부패가 심각한 나라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케냐도 마찬가지여서 정부의 부정, 부패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케냐 중에서도 가장 부패가 심각한 조직이 바로 공권력을 지니고 있는 경찰이라고 하니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지 않는지요? 특별히 교통 경찰들은 뇌물을 받기 위해서 차량들을 잡는다고 하니 더 이상 말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실제로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정권이 바뀌어서 국가의 재정을 다음 정부로 이양하게 될 때 Balance Zero로 한 푼도 넘기지 않은 적도 있고, 국민들의 혈세로 채워진 3조원이라는 엄청난 재정도 타이핑 실수로 단순 처리해 버리고도 찾지 못하는 나라가 케냐입니다. 치안은 형편이 없고 매우 불안정합니다. 도적질과 무장 강도들이 판을 치는 나라 그래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사는 집들의 경우에는 100% 사설 경비원들이 집 앞에서 문을 지키고 있어야만 하는 나라, 1970년대 한국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담장 위에 날카롭게 깨진 유리 조각들을 붙어 있는 나라가 바로 케냐입니다.

케냐는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자국어와 함께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영국의 영향으로 법제도는 잘 갖춰진 나라이나 실제의 운영은 심각한 부패로 개판인 상태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한국에 있었던 코리아 타임과 같은 습성이 있어서 약속 시간에 1-2시간 정도 늦는 것은 기본이고, 빨리 하는 것은 복이 달아나고 천천히 하는 것은 복이 들어온다는 생각으로 ‘하쿠나와타다’ 문제없다. 내일로 미루는 관습이 강하다고 합니다. 즉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가 케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 기관에서 필요한 서류를 요청하면 내일 오라고 한답니다.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내일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 찾아가면 또 다시 내일 오라고 한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뇌물은 자연스럽게 건내지게 되고, 그렇게 일들이 처리가 되는 나라가 바로 케냐입니다.

선교사님들이 지니고 있는 운전 면허증은 허잡한 종이 쪼까리의 작은 문서였는데, 이것 하나를 받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생을 하셔야만 한답니다. 이처럼 케냐는 뒤떨어져도 너무 뒤떨어진 나라인데 아프리카에서는 2-3번 째로 잘 사는 나라라니 미국이라는 나라의 위대성을 다시 한 번 더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관광을 주수입으로 하는 휴양 도시인 몸바사 국제 공항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지만 수도인 나이로비 공항은 1970년대 한국의 고속버스터미널 수준보다도 못해 보였습니다.


▲무윙기 시골 교회에 다니는 어린이의 모습

케냐의 전반적인 정세와 상황
케냐는 특별히 강도가 많은 나라인데 현장에서 도적질을 하다가 잡히면 그 자리에서 돌로 때려서 죽여도 상관이 없는 나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떼로 몰려 들어서 그냥 패서 죽이기까지도 한답니다. 그런데 식민지 습성이 깊이 베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도적질을 시인하는 법이 절대로 없답니다. 그래서 수색 끝에 자신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왔어도 “어, 이 돈이 왜 내 주머니에 들어와 있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라고 퉁명스럽게 딴청을 부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식민지 시절, 도적질을 하다가 들킨 노예는 죄를 시인하면 반드시 죽여 버렸으나 끝까지 고문을 참으면서도 시인을 하지 않으면 죽도록 맞기는 했어도 목숨만은 살려 주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케냐인들은 도적질 하는 것에 대해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본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것을 강대국들이 와서 무력을 앞세워서 빼앗아 간 것이기 때문에 도적질은 본래 자신들의 소유였던 것을 다시 찾아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케냐의 국민성은 낙관적이고 단순하고 순진하나 거짓말을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편이고 국토는 남한의 8배 정도이나 준 사막과 같이 버려진 땅, 쓸모없는 땅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케냐는 야생동물의 천국으로도 불립니다. 그래서 사파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3천 종류 이상의 새가 서식을 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이기에 하루에 한 끼 우유 한 잔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으며 AIDS의 나라로도 유명한 나라가 케냐입니다. Gas는 1리터에 미화로 $1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절대 빈곤층, 빈민들이 100만 명 이상 있고 세계 3대 빈민가 중에 하나가 케냐에 있습니다. 빈민가의 상황은 쓰레기 더미가 산과 같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위생시설이 취약하여서 배설물들이 그냥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어기에 악취가 매우 심하였으며 돼지들과 맨발의 아이들이 함께 뒹굴고 있었으며 어린이들은 하루 종일 쓰레기 더미 속을 뒤져서 고작 50센트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고 합니다. 빈민가를 실제 방문하였을 때 느꼈던 충격은 매우 큰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이런 쓰레기 더미 가운데서도 한국 선교사님들이 들어오셔서 학교를 세우고 빈민가의 아이들을 먹이며, 입히며,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선교사님들의 학원 사역을 통해서 이슬람을 무너뜨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할렐루야!

AIN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는 아인(AIN)이라는 GUEST HOUSE가 있습니다. 이곳은 케냐 최대의 호텔인 사파리 호텔에서 오랫동안 매니져로 수고하셨던 집사님께서 나오셔서 운영하시는 숙박시설인데,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에게는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곳이었습니다. 시설은 전체적으로 깨끗한 편이었고 특별히 이곳에서 제공해 주는 서비스 가운데 일품이었던 것은 사모님께서 해 주시는 한국 요리였습니다.

나이로비는 인구 5백만으로 한인 교민의 수는 700명 정도 입니다. 한인 교회는 2곳이 있고 각각 70-80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답니다. 한국 식품점은 모두 4개가 있으며 중국산 배추가 생산이 되어서 김치를 비롯해서 각종의 한국 음식들을 해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요리 중에서 생선은 분명코 처음 보는 케냐산 생선이었는데 조리는 한국식으로 해서 마치 북어조림과 같은 맛을 내게 한 것이었고, 배추 김치를 비롯해서 각종의 김치는 미국에서 조차도 맛보기 힘들 만큼의 절정의 맛을 내고 있었습니다.

경영자가 되시는 집사님께서는 민수기 34:10-11, 여호수아 15:32, 역대상 4:32절에 나오는 지명인 가나안 땅의 동쪽으로 약속의 땅의 의미를 지닌 아인으로 이름을 지으셨는데 여기에는 A급의 인(INN)이다 라는 뜻도 있고, 아프리카의 인(INN)이다 라는 뜻도 있으며, A로 시작을 하니까 전화번호부에서 처음에 나오는 이점도 있어서 이렇게 짓게 되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지면을 활용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앞으로 케냐에 가실 분들이 계시다면 이곳을 적극 추천해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희 일행은 케냐에 도착한 첫날 하루를 이곳에서 머물면서 3번의 식사를 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서야 이곳 주인이신 집사님께서 해 주시는 말의 뜻이 이해가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샤워 시설에 대한 설명이었는데, 이곳은 더운물이 잘 나오니 샤워를 하고 편히 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뜨꺼운 물도 나오지 않았고 물줄기도 형편이 없었습니다. 물의 온도는 단지 찬물의 기운만 없게한 미지근한 정도였고, 물도 미국의 집들이 콸콸콸 나온다고 한다면 줄줄줄 나오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케냐의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다른 숙소도 2군데 더 이용을 할 수 있었는데, 이곳들에서는 졸졸졸 나오는 수준이었고, 물의 따스함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때에야 비로소 아인(Ain)의 집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무윙기 시골 교회에 다니는 어린이의 모습

한국 선교사님들의 열악한 상황
케냐의 상황은 대략 이런 모습들이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사역 여건은 매우 열악하고 암담한 현실의 벽 앞에서 어렵고 힘들게 사역들을 해나가고 계셨습니다. 비교해서 설명을 드리자면 케냐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님들의 한 달 생활비는 최저가 $5,000이라고 합니다. 미국 선교단체는 적어도 한 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할 때 아이들의 교육 등을 모두 고려해서 이렇게 지급을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선교사님들은 단 한 사람도 이런 수준의 대우를 받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절반 이하의 수준이고, 많이 받으시는 분들이 $3,000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활을 하냐구요? 아이들의 교육의 질을 현지인 학교에 보내는 식으로 저하를 시키든지 아니면 파송단체로부터 받은 선교비 외에 나머지 모자른 부분들에 대해서는 일가친척들이나 아는 사람들로부터 공급을 받아 생활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일임을 우리 모두가 공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공급하심 속에서 감사함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끝을 흐리시는 모습 속에서 후방의 교회들이 선교사님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에 5천 불이라는 금액은 2명의 자녀를 둔 선교사가 아이들을 국제 학교(International School)에 보내면서 최저로 사용하는데 있어서 결코 많은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케냐에서는 사진을 첨부한 파일을 인터넷 상에서 이메일로 다운로드 받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전산망이 취약하기 때문에 한 장을 다운로드 받으려고 해도 몇 시간이나 걸리고 이것도 중간에 버퍼링이 심해서 중단이 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희 일행은 케냐에 도착한 다음 날, 한국식으로 말하면 강원도 산골쯤으로 여겨지는 무윙기(Mwingi)로 이동을 해서 교회 사역과 학교 사역을 하시는 모습을 견학하였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교사님 댁에서 맞이한 저녁 식사였습니다. 메뉴는 현지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서 해 주신 청포묵과 빈대떡이 있었고, 김치와 된장국 정도의 단촐한 것이었으나 가장 맛있는 식사였고, 훈훈한 식사였고, 감사한 식사였습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에서 케냐를 방문한 강사 일행을 정성껏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영접해 주신 사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려고 할 때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식사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는 순간 전기불이 나가게 해 주셨습니다. 어쩌면 타이밍이 그렇게도 절묘하게 맞을 수 있는지 당황스럽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기도가 끝난 후에도 전기불이 다시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렌턴과 촛불을 켠 후에야 비로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전기불은 식사를 마치고 교제를 나누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들어왔다가 나갔다가를 몇 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 이것이 경제적으로 못사는 나라, 어려운 후진국에서 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열악한 현실이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지금은 그래도 전기가 들어오니까 얼마나 생활이 편해졌는지 모르겠다고 감사하시며 전기가 들어오는 것을 크게 자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들어왔다가 나갔다를 반복하는 전기 조차도 들어오지 않았을 때에는 얼마나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내셨겠습니까? 그 어려움이 충분히 짐작이 되자 마음 한 편이 무거워 지기도 했고, 숙연해 지기도 했습니다.

제안 - 선교보고(X), 긴밀한 밀착선교(O)
이제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선교사님들의 사역을 이해하고 보다 더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제안을 드리자 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전시효과를 위한 홍보용, 과시용의 선교보고는 하지도 말고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파송 교회와 후원 교회들에게 간곡하게 요청을 드리는 바입니다. 1년에 한 번이나 두 번 받는 보고를 위한 보고는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선교지의 상황은 돌발변수가 많고, 열악하며, 계획한 바대로 일들이 추진되기 보다는 정부나 관리들의 부패로 인한 방해 등으로 인해서 지연되는 일들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선교비만 주고 마는 선교에서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 속에서 밀착된 동역으로의 선교가 이루어질 것을 제안합니다. 이 말씀은 선교사님들의 상황과 사역의 진행 등을 함께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일을 함께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찌보면 물질보다도 마음이 담긴 기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후방 교회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말로는 기도하고 있다고, 기도해 주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시간을 내서 열심히 기도로 선교사역에 동참을 하였는지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모두가 이 일에 온전히 헌신하지 못한 면들이 없지는 않은지요? 저의 제안은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어두움의 세력인 영적인 싸움 이전에 먼저 외로움과 고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선교 사역의 일체를 함께 공유하고 함께 추진하고 함께 진행해 나간다면 특별히 따로 보고를 할 필요도 없고, 받을 필요도 없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사역을 해 나갔는데 뭣하러 보고를 위한 보고를 준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파송 교회와 후원 교회들이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선교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쏟는 가운데 함께 동역하는 밀착된 선교를 해 나갈 때 우리의 선교는 외롭지 않고, 고독하지 않으며, 열악하고 힘든 여건과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해 나가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흑암 속에 있는 영혼들을 품어서 하나님의 빛의 자녀가 되게 하는 그 무엇보다도 보람있고, 가치 있는 축복된 사역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할렐루야!

조경윤 목사(CCM 섬김이 / www.cleanchurchmovemen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