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새벽예배. 한국교회 부흥의 첫 번째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척교회부터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성도들의 신앙성숙과 더불어 부흥을 소망하는 곳에는 새벽예배의 열기가 더욱 뜨겁다. 이에 기독일보는 남가주 한인교회들의 새벽 설교를 집중 조명하여 새벽제단에서만 내리는 특별한 은혜를 나누고 개교회를 넘어 지역과 미주 전역의 부흥을 함께 소망하고자 한다.

2007년 1월 14일 평양 대부흥 100주년 기념주일에 창립된 주님의교회(담임 김병학 목사)는 시작만큼 의미심장한 포부와 비전을 가진 교회다. ‘LA동부지역의 관문이며 세계로 향한 교회’가 그것. 새벽예배에서 강력한 QT 훈련을 받고 뜨거운 기도로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는 주님의교회는 당찬 비전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고 있다.

<본문> 로마서 11장 1~12절

롬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11: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11: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11: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11: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1: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1: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지난시간 보았던 로마서 10장 21절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복음을 전해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루종일 손을 활짝 벌리고 기다리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거절당하셨지만 계속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대답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들은 버림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배척했고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치욕스런 십자가에 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백성들을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바로 바울자신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버림받을 사람이 있다면 바로 바울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또한 사용하심에 자기 자신을 증거로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서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본다면 바울 자신 같은 사람은 버림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간증과 고백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나의 행한 것을 보면 살아있다는 것이 말도 안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의 근거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변화되었으므로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거가 되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인정할 만한 인생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변하는 것이 주관적이라면...객관적 예를 바울 자신을 들어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2절 엘리야도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얼마나 힘들었던지 자신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절망이요 답답함입니다. 신앙을 나눌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죽을 형편이라고. 예배도 공개적으로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 7천을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눈이 이러해야 합니다. 7천대 1일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7천배나 많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엘리야가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가 지나쳤던 사람 중에 신앙을 지키고 있는 사람도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드러난 능력이 없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나 간신히 신앙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나 동일한 한 사람으로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회복하여야 하는 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별 볼일 없어 보여도 하나님은 이렇게 보십니다. 내가 열심히 헌신하는 것 같지만, 그저 자기 신앙 근근히 유지하면서 사는 자나 일대일이다. 하나님이 볼 때 그런 영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나만 남았다고 불평하기 쉽습니다. 본문에는 엘리야가 송사했다고 나오는데 강하게 어필했다는 뜻입니다. 불평했다는 말이다. ‘하나님 어찌된 겁니까?’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만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토굴에도 숨어있고 집에도 숨어있는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7천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은 성도간 회복되어야 할 안목입니다. 다른 영혼을 인정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관점이어야지 내 기준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안목이어야 합니다. 내가 볼 때 형편없거나 변화되어야 할 사람인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5절 엘리야 시대에 남겨진 7천의 사람처럼 지금도 하나님이 남기신 사람들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를 보는 관점은 바로 이 안목이어야 합니다. 우리 서로는 이 세상 가운데 남은 자들입니다. 엄청난 위기 속에 살아남은 존재입니다. 얼마나 귀한 존재들입니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6절 사람의 행위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위로 본다면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바울이 누리고 있다고 하는데, 은혜를 많이 받은 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남은 사람을 만나고 찾기 위해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7절~12절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이 구하는 것은 의인데 그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고 바로 이런 이방인들의 믿음에 자극을 받아서 이스라엘도 회복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들에게 예배된 은혜는 엄청난 것입니다.

지금의 모습만 보지 마십시오. 저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만 한다면... 풍성한 은혜를 예비한 줄로 믿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헌신하기만 한다면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시오.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인줄 믿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해보이지만 분명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알아야 합니다. 끝까지 품으려는 하나님의 마음 알기 원합니다. 이렇게 다른 영혼들을 바라봐야 하는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인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