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는가(임박), 이미 지금 여기에 있는가(현존)?

신학을 넘어 크리스천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질문이다. 가톨릭 신학자이자 세계적인 종교학자로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일생을 바친 성서고고학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san)의 신작 <하나님과 제국(God and Empire, 포이에마)>에서 이 ‘민감한’ 질문을 다룬다(물론 책 머리말만 읽어도 이 질문을 위해 4백여쪽 분량의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사실 이 민감한 질문에 쉽게 모범답안을 제출할 수 있다. ‘이미’와 ‘아직’ 사이라고. 하지만 크로산은 ‘임박한’ 예언들 속의 ‘폭력성’에 주목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세례)요한의 말이 맞지만 그 나라는 요한이나 다른 누군가(정황상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가 예상했던 것처럼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를 연구해 온 소위 ‘진보적’ 신학자이지만,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버스에 실을만큼 ‘보복하는 하나님’에 대한 증오를 표현한 반기련의 주장에는 반기를 든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임한 적의 침략(또는 가뭄이나 다른 재난)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쁜 신학 또는 저속한 신학이라고 생각한다”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신학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자 성경에는 자비에 대한 탄원, 관대함과 용서를 바라는 기도로 가득차게 됐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어 “성경이 하는 주장이나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과는 별개로, 하나님이 이제껏 누구를 처벌한 증거가 있는가?”라고 오히려 반문한다. 그는 “그것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결과라는 증거는 너무나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쓰나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생긴 재앙”이라고 차마 말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죄를 짓고 하나님에게 비슷한 의심을 품어본 적이 있는 ‘일반적인’ 한국 크리스천이라면 새겨볼 만한 말이 아닌가?

우리는 공명정대한 하나님이라면, 대내적으로 ‘국왕의 불의’와 대외적으로 ‘제국적 지배’에 놓인 이 세계를 정의와 평화로 변화시키시리라 생각한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대대적인 세상 정화’가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 땅의 불의를 참고 견디며, 때로 신앙의 선배들은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이 가치를 위해 싸웠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 종말론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오해가 있다고 설파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세상 정화가 세상의 끝, 즉 하나님이 이 물질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유대교와 기독교 종말론 중 하나 혹은 둘 다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로산은 “천지를 창조하는 동안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한 것이 ‘좋다’고 여섯 차례나 말씀하셨고,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며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창조물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 일을 언젠가는 행하실 것”이라 설명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세상 정화가 거룩한 새 세상을 위해 파괴된 세상을 비우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행하는 세상의 변화는 폭력을 평화로 바꾼 이 땅에서 이뤄지며, 이를테면 이 땅에서 하늘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처럼 하늘에서 이 땅으로 이동하는 것이 된다. 크로산은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실물 크기 모형은 건축가 사무실에 있는 모형처럼 하늘에 간직돼 있지만, 마지막 건설 현장은 지상이 될 것”이라며 변화된 세상을 그릴 때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사야 2장의 노래처럼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변화된 물질세계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책은 기독교 성경이 부당하고 폭력적인 문명의 정상성과 끊임없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정의롭고 비폭력적인 하나님의 급진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비폭력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급진적’ 시각은 성경 전체에 되풀이되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폭력적 불의라는 정상성 속으로 어떻게든 되돌리려 애쓴다고 말한다. 저자는 “성경이 승리를 통한 평화만 다루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성경이 필요없을 것이고, 정의를 통한 평화만 다루고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믿지 않을 것”이라며 그러므로 성경이 순전하고 권위가 있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좀더 쉽게 말하면 성경에는 ‘노아식 해결책’과 ‘아브라함식 해결책’이 번갈아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상에서 늘어나는 악의 문제를 푸는 하나님의 두 가지 방식이다.

노아식 해결책은 지상에서 날로 늘어간 악과 폭력, 부패를 보고 하나님이 내린 해결책은 유일하게 올바르고 정의로운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고, 아브라함식 해결책은 폭력적인 노아식 해결방법을 뒤엎고 의로운 한 사람이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 위해 선택되는 것이다. 즉 인류의 타락을 해결하는 해결책이 소수를 위해 다수를 ‘멸절시키는’ 방법과 소수를 통해 다수를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4천여년에 걸쳐 계속된 이 과정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는 세례요한의 ‘임박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예수의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로 이어졌다. 예수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둘의 차이는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독점’과 ‘프랜차이즈’로 이어진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그의 처형으로 끝이 났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표현을 빌어 예수는 비전이나 이론 뿐 아니라 실천과 공동체 프로그램을 공표했다.

저자는 이를 “예수는 자기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미 받아들였고 그 속에 들어갔으며 그 속에서 살고 있음을 밝히고, 그 모습을 와서 보라고 모든 사람을 초대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현존함을 알렸다”며 “이는 우리처럼 살라고 역설한 것이고, 우리가 이미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에 거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 맞게 행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수의 공동체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함께 식탁을 나누는 상향식 나눔의 공동체였으며, 로마의 하향식 탐욕 공동체에 대한 긍정적 대안이었다.

이러한 구도는 신약의 절반을 쓴 바울과 신약의 마지막 권을 쓴 요한에게로 이어진다. 저자에 따르면 바울은 폭력이 지배하는 로마 제국신학의 대중 담론 속에서, 유대 땅을 넘어 더 넓은 로마 세계에 적합한 자신의 언어로 이미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파했다. 그리고 로마에 의해 조국의 파괴를 경험하고 밧모섬으로 쫓겨난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현존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여기 이 땅이 아니라 저 위 하늘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바울의 우주적 종말론과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가 등장해 이 세상을 ‘청소하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완성’으로 대비된다.

종말론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논의도 피해가지 않았다. 크로산은 “‘휴거’라는 단어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며 “그러나 현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제멋대로 해석하는 관념이나 주제, 개념 역시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대대적인 세상 정화가 이미 시작됐지만 그것이 자기 세대 안에 성취될 것이라 (완전히 잘못) 믿었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마치 시찰 나간 황제가 수행원들과 함께 제국의 도시에 들어갈 때 시민들이 그를 맞으러 나가고 축하연과 환영식을 열어 도시로 귀환하는 황제를 수행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라는 구절은 이처럼 성도들은 완전히 변화되고 전적으로 변모된 비폭력과 거룩, 정의, 평화 가운데 온전히 완성된, 이 땅으로 귀환하는 그리스도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결론을 맺는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가 ‘곧’ 일어나기를 기대해야 하는 사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가 ‘폭력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해야 하는 사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가 ‘문자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해야 하는 사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 기독교인이 초림을 ‘유일한 강림’으로 받아들이고, 그 거룩한 현존과 협력하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정의는 잔인하고, 정의가 없는 사랑은 진부하다”는 명언을 남긴다.

이 책에 대해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뉴스위크> 편집자인 존 미첨은 “크로산의 주장에 동의하든 안 하든, 그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아주 분명하고 도발적으로 제시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