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있다’하고 ‘믿음이 있다’ 한다. ‘나만큼 예수 잘 믿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한다. 은연중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정말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두 가지를 보면 안다.

하나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것. 반대로 말할 수 없는 축복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증명되어야 그 사람이 믿음이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목회를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어려울 때 주님을 찾다가도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보게 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축복에서는 펄펄 뛰면서 ‘감사합니다. 주의 이름 높입니다.’ 하다가 어려움이 오면 그 즉시 교회를 떠난다. 여러분의 신앙이 진짜라면 축복 속에서도 주님을 떠나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놓치지 않는 두 가지 모습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는 상당히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부분에 있어 총체적 위기이다. 지진과 기근 등이 끊이지 않는다. 영적 세계를 보면 이만큼 종교다원주의가 판치고 영적 전쟁이 치열했던 시대가 없었다. 자유주의건, 보수주의건 요즘에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신학적 혼합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주장하며 가르치면서도 고난은 사라지고 축복만을 가르친다. 실용주의에 젖어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교회 부흥지상주의에 사로 잡혔다. 균형을 잃어버렸다.

고난을 이야기하고 감격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60, 70년에는 고난을 기쁨으로 받는 이들이 많았다. 고난 중에 기뻐하라는 야고보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은 축복만을 주장하며 고난을 빼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성도들이 축복만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형통과 번영을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 고난을 이해하는 것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바른 교회가 되는데, 그리고 영적 세계에서 믿음의 거장으로 우뚝 서는데 중요한 성경적 이해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할 때 항상 고난과 축복을 같이 이해해야 한다. 한국의 주석학자 박윤선 박사는 축복과 고난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난을 이해하고 축복을 체험한 사람은 뭔가 다르다.

왜 고난과 축복을 같이 이해해야 하는가. 성경을 보면 항상 지혜와 명철을 함께 이야기 한다.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 명철은 악을 떠나고 죄를 떠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죄를 떠나고 반드시 악을 떠난다. 악을 떠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성경에는 동반하는 단어가 있는데 지혜와 명철. 또 하나는 사랑과 공의이다. 우리는 사랑만 이야기하지 하나님의 공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가 결여된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면 올바른 공의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를 이야기 할 때 명철을 이야기 하고 사랑을 이야기 할 때 공의를 말하듯 고난이 있는 축복이 될 때 온전한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고생과 고난은 다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가 정치자금을 갖고 쓴 적이 있다. ‘소대통령’ 노릇을 해가며 하루 저녁에 천만원씩 술을 먹었다. 그가 서울 구치소 갈 때 성경을 들고 갔다. 얼마되지 않아 그가 한 말을 어떤 기자가 쓴 글이 있다.

그가 욥기서를 보며 자신은 ‘욥과 같이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넌센스이다. 자기 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똑똑한 척, 잘난 척 하지만 자기식으로 자기 성경을 만들어 놓고 열심으로 예수 믿는다고 말한다. 신앙과 믿음은 성경이 보증하고 뒷받침하고 말씀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16세기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 시작됐다면 오늘 21세기 교회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운동이 펼쳐져야 한다.

새로운 프로그램, 시설을 만들어 놓는 것으로는 역부족. 하나님의 말씀이 왕노릇해야 하며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강단이 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말씀을 붙잡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우리의 목전에서 목격할 수 없다.

고생과 고난이 다름을 성경이 말한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고생과 고난이 어떻게 다른가. 고생하는 것을 고난한다고 한 것이 김현철씨. 고난을 고생한다고 하는 것은 무지한 것. 이민생활와서 ‘육지전, 공중전, 해상전 다 해봤다. 고생 많이 했다.’고 말한다. 고생은 고생으로 끝나고 고난은 고생 가운데 무엇인가 열매가 맺혀지는 것. 고생을 한 사람들은 더 거칠어지고 성격이 더 모나게 된다. 고난을 겪은 사람은 더 온유하고 겸손하고 인격적으로 변화된다. 신앙과 믿음에 변화가 없다, 인격에 변화가 없다라면 고생한 것이다.

지금 고생하는 분이 있을 수 있다. 고생에서 끝나지 않고 고난의 영광을 쟁취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바란다. 벧2:19-20. 베드로사도가 두 가지 고난에 대해 구분한다. 자신의 죄와 실수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 판단실수로 고생하는 것을 고난이라고 말하지 말라. 고난은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한다. 말씀대로 살다가 진리대로 살다가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당하는 고생을 우리는 고난이라 한다.

고생은 아무 영광이 없다. 십자가를 위해서 고난 받는다. 그런 멋진 그리스도인이 돼야겠다. 이 고난을 받은 사람은 어떤 역사가 일어나나. 성령의 열매를 맺힌다. 9가지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고난. 고생은 해도 이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시기 질투, 이런 것들이 마음이 나타난다.

고난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고난은 선택이 아니다. 필수이다. 고난이 선택이라면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필수라고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 남녀노소, 목회자, 평신도 누구나 똑같이 고난을 겪는 것이다. 양상이 다르고 모양새가 다를 뿐. 인생은 고난을 위해 태어났다고 하는 말처럼 필수이지 선택이 아니다. 이것을 알면 절망하지 않는다.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내가 따라가겠나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나라를 위해 달려가겠다고 고백해 보라. 자신도 은혜 받고 옆 사람도 은혜 받는다. 도전이 된다.

고난과 성화.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부르시고 내팽개쳐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성숙시키신다. 성화의 과정. 칭의, 성화 영화이다. 이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다음. 즉시 가게 돼 있다. 우리들을 순도 높게 만들어 가시고 빚어 가시고 인도해 가신다. 특별히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양육법이다. 그러나 칭의가 적용되지 않은 사람은 성화가 시작되지 않고 고생하면서 하나님 원망한다. 성화의 과정을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칭의의 과정을 가고 성화의 과정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낳으시고 양육하시며 반드시 구원하신다.

사연이냐 간증이냐
사연을 늘어놓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연은 절대로 영적인 진보를 가져오지 못한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자신이 다 말한다. 와서 하는 말 보면 불신의 말을 한다. 세상 논리로는 맞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아니다. 사연이 없을수록 신앙생활을 빨리 진행시킬 수 있다. 사연은 죄의 경험담이다. 간증이 많은 사람은 그 고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나를 변화시켜 주셨다는 고백이 있다.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평생을 다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금. 사연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 간증을 만들고 있는가. 사연을 만들어 가는 사람은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없다. 신앙생활은 오래했지만 열매가 없다. 간증을 보이기 원한다. 사연을 갖지 말라. 목사님 사연만 많고 간증은 없는데요. 늦지 않았다. 이제부터 만들라.

하나님이 백성들을 고난 가운데 성장시키신다. 하나님의 백성, 교회로 세우시고자 하시는 방법에 3가지가 있다.
1. 허용작전 –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심, 욥의 고난을 보면.. 오직 그의 손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하나님이 허용하셨다.
2. 광야작전. – 모세와 다윗. 모세가 바로 에게서 40년을 자라고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다. 세상 것을 내려놓지 못함으로 광야에서 내려놓게 하신다. 그 작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빨리 알고 고백해야 한다. 광야에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주시기 위해서 이다.
3. 벼랑끝작전 – 인간은 벼랑끝에 가지 않고는 놓는 법이 없다. 타락한 본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벼랑끝에 모셔서 당신의 백성을 만들어 가신다.

고난에 대한 유명한 글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
이 세상 삶에서 시련과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서 신앙고백보다 더 중요하고도 세심함 믿음의 시금석은 없다.
죄인의 고난은 사형 집행인이 사형수를 꽁꽁 묶는 줄과 같고, 의인은 고난은 의사가 환자를 싸매는 붕대의 차이와 같다.
가난과 고난은 교만을 기르는 양분을 제거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