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숙 사모의 '그럴 수도 있지' 라는 CCM이 있습니다.

세상 만사가 '다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 하며 지나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에 돌맞아 죽은 사람이 두 사람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여리고성 함락 후 돌 맞아죽은 아간입니다. 그는 전쟁에서 얻은 물건을 훔쳐서 결국은 제비뽑기 당해서 온 가족이, 훔친 물건과 더불어 땅에 묻히는 치욕적인 죽음을 당합니다.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구약에 또 한번 나옵니다. 열왕기상에 나오는 라봇이라는 사람은 포도원 주인이었습니다. 얼마나 탐스러웠는지는 모르지만, 아합왕까지 그 포도원을 탐냈습니다.

그 포도를 탐내면서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못 뺏고 끙끙 고민해요. 누가 아합의 아픈마음을 위로합니까? 이사벨, 내조자입니다. 훌륭한 내조자입니다. 덕분에 돌맞아 죽은 사람이 라봇입니다.

아봇도 돌맞아 죽었고, 아간도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다른 점은, 하나는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는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인 포도원을 절대 팔지 않겠다고 한 것 때문에 돌 맞아 죽었어요.

잘못된 것입니까? 라봇이 돌맞아 죽은 것은 악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합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누구 탓으로 돌맞아 죽은 겁니까? 자기 탓으로. 내가 절대로 팔지 않겠다 했기 때문에, 팔았더라면 살아있을 것 아닙니까?

라봇은 자기가 악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 결심 때문에 돌맞아 죽은 것, 자기 탓으로 돌 맞아 죽은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사람이 나오죠.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쁜 뜻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잘 믿어보겠다가 재산 팔아서 갖다 바쳤습니다. 그런데 다 안갖다바쳤거든요. 하나님 속인 것 때문에 즉사했습니다.

또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 잘 돼야 하는 데, 돌맞아 죽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야기 하면 돌 맞아 죽은 것 잘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주님이 서신 것을 봐요.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이상 잘된 것이 없습니다. 그 한 사람이 죽는 순간에 메시야가 서서 보고 있었다는 것은 신, 구약을 통틀어서 그 장면 하나 밖에 안나옵니다.

스데반이 말씀을 그렇게 전하지 않았으면 안죽었습니다. 자기 탓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자기들이 다 안갖다 바쳤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자기 탓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하다가,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것 때문에 죽었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을 끝까지 잘 섬기려고 하는 것 때문에 죽었어요.

하나는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자기 허물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죽은 거에요. 또 하나는 세상이 워낙 악하다보니까, 그 악 속에서 자기의 입지를 지키려고 하다보니까 죽은 거에요.

하나는 자신의 악, 또 하나는 세상의 악 때문에. 그러나 둘 다 자신의 의지, 선택 때문에 죽은 거에요.

그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내가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고난 당해 마땅하다하는 고난이 있고, 자기의 허물과 죄가 없는 데, "애매히 당하는 고난(벧전2:19)"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아름다워요.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허물 때문에 고난 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이 공평하게 보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을 지나갈 때마다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어요.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양에라도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을 받도록 믿음을 단련시켜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6~7)"

여기에 보면 믿음을 금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금이 용광로를 통과하면 더 순수해진다, 금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을 말할 때에, 금의 순수성을 놓고 말할 때 금이 순도가 높을 수록 가치가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질을 놓고 이야기할때, 그 믿음의 퀄러티를 높여주기위해서 고난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빈다. 그 고난을 사용하실 때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시고 있는 것은, 믿음의 질이 높아지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오실때 그 사람들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워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종종 고난을 통과하면, 언젠가는 고난의 끝이 이 세상에서도 두배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되기를 고대하며 삽니다. 그러나 때로는 믿음의 삶의 끝이 돌맞아 순교하는 것일 때가 있어요.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께 가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고난을 통과할 때마다 그 사람에게 베풀 칭찬과 존귀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이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이 무엇이건 간에, 그 미래를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은 세상의 칭찬과 다른 것입니다.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존귀함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다 라는 것을 볼수 있길 바랍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예수 믿는다는 게요. 고생을 자처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신것이 고생을 위해서라니요? 예수믿으면 복받고 만사형통하고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제가 신앙을 할 때에도 고생 길이라는 것을 기대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사실 목사안수 받을 때까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목사안수를 받고 나니 주변 분들이 가시밭길을 시작하셨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사모하는 자는 또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욕을 먹습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 자체가 고생이에요.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생활을 한다라는 것은 바르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을 의인으로 간주하신다고 그랬습니다. 제자훈련이라는 것은 예수님처럼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기 위해서이다.

뻥 하는 순간 옥수수가 강냉이로 바뀝니다. 15-30분 사이에 그렇게 됩니다. 제자훈련을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훈련받고 나오면 완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제자훈련 코스 1,2,3기 하고나면 성숙한 그리스도의제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을 통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자훈련을 잘하고 나면 어떤 상황에 가서도 예수님의 제자라면 잘 섬겨야 되잖아요. 마지막 마가의 다락방에서 하신 것, 내가 스승이고 선생이다. 그러나 주(Lord)이고 선생인 내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너희의 발을 종처럼 씻는다. 만일 제자훈련이 그러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진정한 제자훈련은 무엇일까요? 베드로 사도는 고난을 통과할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가는 과정은 예수님의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요, 여기있는 말씀처럼 자기의 허물과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고, 의로우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죄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처럼, 빛이라는 말, 소금이라는 말 때문에 다가오는 고난을 견디는 사람에게 오는 고난을 말합니다.


두번째 고난은 세상을 부끄럽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르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잘되는 것 같으면 그 사람들이 빨리 빨리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은 하나님 백성들이 선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간디가 영국의 속국으로부터 해방시킬 때 사용했던 방법이 무저항주의입니다. '구타하면 맞고 욕하면 듣고, 저항하지 말아라' 그 한가지만으로 간디라는 사람이 인도를 영국에서 해방해 냈어요. 피동적인 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적극적인 선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아름다움을 드러내면서 산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도전을 받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아니요, 100% 그런 교회 아닙니다.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이 몇분이나 될까요? 은연 중에 나는 아니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말하는 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을 행하는 삶,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삶 속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라는 것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이 얼마나 무섭게 바뀌어가는가 하면 교회 이름으로 행하는 선보다 교회이름으로 행하는 악이 더 큰 것처럼 그런 무게감을 느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사람으로서 바르게 사는 사람으로 고난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려고 하면 고난을 당해요. 이번에 아이티,
죽어있는 사람, 어려움에 빠진 사람 도우려면 당장 내 주머니를 비워야 되요. 손해를 본다는 말이에요.

손해를 본다는 것이 내가 어려움을 당한다는 말이에요. 사회적으로 큰 일을 두고 보면, 사회적으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려는 사람들은 희생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선을 행하라, 그것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피하지는 말아라. 왜? 그것이 세상을 부끄럽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지 않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이적을 행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시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구했던 그것이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불법이었다는 거에요.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은 사람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healthy wealthy 신학이라는 것을 들어보셨나요?

그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정말 하나님이 계십니까?

내가 믿음이 좋기 때문에 내 이웃이 잘된다, 내가 믿음이 좋기 때문에 내 옆집에 있는 사람이 부자가 된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 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 뜻 밖에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

세번째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인지 알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기도할때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기도해라. 당신은 어쩌면 화를 자초하고 있을 수도 있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까요? 갑자기 뿅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게 해 주실까요? 아니면 정말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붙여 주실까요?

'하나님 나는 인내심이 없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기도할 때, 넘치는 복이 생기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복이 이것인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복이 고난이면, 고난이 넘치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고난을 받을 때 인간은 2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떠납니다. 교회, 성도를 떠날 뿐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께 열심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해서 바르게 살다보니까 이 고난이 임했구나. 이 고난이 임하는 것이 내 탓이긴 내 탓이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으니, 내가 하나님께로 도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길가밭, 돌짝밭, 가시밭, 좋은밭이 있습니다. 고난은 내가 하나님 임재 속에서 살고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게해주는 것입니다.

고난이 임할 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은 1년 365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이 너희위에 계심이라. 예수믿는 복이 그런게 복입니다. 고난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4:19),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 5:7)"

선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우리가 자초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받는 고난은 아름답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고난 당하는 것이 베드로 사도가 서신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고난당하는 것, 영적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삼킬 자는 찾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것은 현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욥 1장, 2장은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고난의 문제, 그 배후에는 하나님만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권 아래 움직이고 있는 사단도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이 고난이 단순한 삶의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큰 구원을 이루는 역사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강연: 조영팔 목사(콜롬버스장로교회)
정리: 권나라 기자